아버지 목숨 구하려 호랑이에 맞선 ‘효자와 소[牛]’

삼형제의 효심 돋보이는 ‘삼효각(三孝閣)’

이상욱 기자 / 2024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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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 경주 오릉 동편에 위치한 삼효각 전경.


삼효자 월성김공지비(三孝子 月城金公之碑)

경주 시내에서 오릉 주차장 입구에 이르면 도로 왼쪽에 토담으로 된 한옥 고가가 있다. 고가 앞에는 삼효각(三孝閣)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목조기와의 대문을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 동편에 목조와가로 된 잘 정비 보존된 비각이 있다. 이 비각이 월성김씨 삼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삼효비(三孝碑)를 보호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경주 김씨 문중의 육대조이며 병조판서 충암공 귀일의 손자이신 응벽·응규·응정(應壁·應奎·應井)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을 왕명으로 건립한 비각이다’고 기록돼있다.

비문에 따르면 삼형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신을 묻은 채 자신들은 비바람과 눈서리를 피해 편안히 집으로 돌아설 수 없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꿇어 앉아 시묘(侍墓)에 비바람과 눈서리에도 중단함이 없었다.

묘에 예를 올릴 때는 항상 섬돌 위에서 곡을 하였다 한다. 그래서 삼형제가 밟고 디딘 섬돌이 뚫어져 깊이가 몇치나 되었다고 한다.

↑↑ 본지 162호에 실렸었던 삼효자 월성김공지비.

어느 여름날 저녁 뇌성우가 치며 비바람이 크게 일고 문득 소리가 나자 삼형제는 머리와 귀를 모으고 들으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깜짝 놀라 움막 밖으로 나와 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뒤 또다시 소리가 나서 이상히 여겨 신주(神主, 위패)를 껴안고 움막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움막의 북쪽산이 좌우로 무너져 내려 삼형제가 거처하던 움막을 덮쳤으나 삼형제는 무사했다.

이는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에 하느님과 조상이 돌봄이 있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삼형제는 신춘(神春)이라는 개를 길렀는데 집 소식을 알고 싶으면 편지를 써서 개의 목에 달아 집으로 보내면 개는 능히 그 뜻을 알고 삼형제의 집을 왕복했다. 집에서도 글을 써서 삼형제에게 소식을 전하는 등 집과 묘 사이를 왕래하는 심부름을 맡아 했다. 이 개 또한 영리함에 앞서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에 감동했으리라.

↑↑ 삼효각 내 삼형제의 효행을 기록한 ‘삼효자 월성김공지비’.

3년이 지나 상복을 벗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침저녁으로 좋은 음식과 의복을 갈아 입지 않고 계속 조상의 사당뵙기를 종신토록 했다. 이 같은 삼형제의 출중한 효행은 널리 알려졌다.

후일에 명종이 삼형제의 행적을 알게되면서 명종 16년(1561년) 효자 정려를 내렸다. 또 이들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 귀감을 삼기 위해 삼효자각(三孝子閣)을 건립했다.

↑↑ 지난 2015년 개축해 잘 정비된 효자각 전경.


효자월성김공휘인학정려비(孝子月城金公諱仁學旌閭碑)

경주시 진현동 중리마을에 깨끗하게 정비·관리되고 있는 목조기와의 비각이 있다. 효자월성김공휘인학정려비(孝子月城金公諱仁學旌閭碑)다. 비문에 따르면 효자 김공(金公)은 정조 22년(1798년)에 태어나 월성최씨 재택(在擇)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김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남달리 어질고 섬김을 알아 한시도 부모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 앞에 나아가고 물러감과 말씀에 대답도 모두 부모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했다.

공은 연일군에 살았는데 자라면서 집안이 극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고, 시간이 날 때는 장작을 팔아 쌀·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사서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했다. 김공의 효행에 대한 소문은 인근 고을에까지 전해져 그를 칭송하는 일이 그치지 않아 좋은 본보기가 됐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키우는 소등에 나무를 싣고, 또 자신이 등짐을 지고서는 성내에 있는 장에 갔다.

나무를 팔아 부모님이 즐겨 먹는 생선과 양곡을 사서 소등에 얹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을 뒷산 고개에 이르자 난데없이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에 나타나 아버지를 해치려 했다. 기겁을 한 김공은 소의 코뚜레를 풀어주고 성을 내어 고함치기를 “너는 산군(山君)이니 부자의 예절을 알 것이다. 나의 부친을 해치지 말고 원컨대 내 몸으로 대신하거라”고 꾸짖었다. 이어 호랑이를 잡고 때리며 구르며 죽음을 각오하고 아버지를 구원했다.

↑↑ 본지 157호에 실렸었던 효자월성김공휘인학정려비.

같이 간 소도 주인이 해를 당함을 보고 怒號(노호, 성내 소리 지름)하며 범에 달려 들어 뿔로 받고 발로 차 마침내 호랑이를 물리쳤다. 그 소는 집으로 달려가 방황하며 슬피 우니 이에 놀란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보니 소가 왔던 길로 다시 달려갔다. 집안사람들이 소를 쫓아 현장에 가니 아버지는 무사하나 아들 김공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오호라! 비록 소가 말 못하는 무지한 미물이나 주인의 효
성에 음직여 의를 본받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로다’ 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져 가히 특별한 글을 쓸만한 것으로 사림(士林·선비)에서 글을 써 올리니 정조 임금께서 상으로 김공에게 효자로 정려했다. 또 소에게는 먹이를 내리는 한편 소를 팔지 못하도록 했다.

↑↑ 효자각 내 김공의 효행을 기록한 ‘효자월성김공휘인학정려비’.

연일군 오천에 있는 김공과 소의 무덤을 월성김씨 문중에서 1967년(丁未) 경주시 진현동 중리마을 현재 위치에 효자각을 옮겼다. 현손 김원극이 비문을 쓰고, 높이 143cm, 넓이 46cm, 두께 23cm의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충효각에서 200m 떨어진 토함산 서쪽에 김공과 소의 무덤을 나란히 이장해 역사에 전하게 해 무릇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게 하였다.

“효는 곧 오륜의 으뜸이고 백행의 근원이니 이 어찌 중하고 크지 않겠는가?”

이 비각은 지난 2015년 후손들이 개축을 통해 현재 깨끗하게 관리되면서 김공의 효 사상이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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