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13] 경주 굴불사 터

경주 금강산이 품은 사방불을 아시나요?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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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21호로 지정된 굴불사 터 석조사면불상(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이다. 3m쯤 되는 높이의 바위면에 입체·양각·음각의 다양한 기법으로 입상·좌상 등을 가리지 않고 조각했다.


경주 금강산을 아시나요?

경주에는 다섯 개의 큰 산이 있다. 신라는 왕경 내 다섯 개의 산을 정해 신성시했다. 왕경오악(王京五岳)은 북악 금강산과 표암봉 일원, 동악 토함산, 서악 선도산, 남악 남산, 중악 낭산이다. 북한 강원도와 대한민국 강원도에 걸쳐 있는 금강산이 유명해서일까. 경주 금강산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177m 높이의 야트막한 경주 금강산은 북한과 강원도 일대의 금강산보다 훨씬 이전부터 금강산(金剛山)으로 불렸다. 고려 개국 이전에는 경주의 산만 금강산이었고, 강원도의 산은 풍악산·개골산 등으로 불렸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금강산은 모두 경주의 금강산을 일컫는다.

신라시대 금강산은 특별한 산이었다. 신라의 수도 계림에 있기도 했거니와 화백회의가 열리는 장소 중 한 곳이기도 했다. 경주 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이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 당도한 표암봉(瓢嵒峰)과 신라 제4대 왕인 석탈해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디 이뿐이랴. 법흥왕 시절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려는 왕에 맞서 귀족들은 기존의 토착 신앙을 고수하려 했다. 이때 법흥왕의 측근이자 사인(舍人)의 직책을 맡은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는 불교 국가로 탈바꿈했고 급속도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통일신라에 접어들면서 이차돈을 성자로 높이 평가하며 무덤 인근에 사당을 지어 기렸다. 이차돈의 무덤이 있던 곳이 바로 금강산이다. 금강산에는 신라시대 왕이 자주 찾았다던 백률사와 기도의 영험한 소문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손을 모은다는 굴불사 터가 있다.

↑↑ 177m 높이의 경주 금강산은 북한과 강원도 일대의 금강산보다 훨씬 이전부터 금강산(金剛山)으로 불렸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금강산은 모두 경주의 금강산을 일컫는다.


바위 사방에 부처 새긴 굴불사 터

금강산 백률사 초입에 특별한 부처가 있다. 사방에 각기 다른 부처를 새긴 석조사면불상이다. 세상 어디든 자비로운 마음으로 굽어살피겠다는 의미이리라. 남산의 칠불암도 안강 금곡사 터의 사방불도 처음 대할 땐 적잖이 놀랐다. 부처는 산 중 홀로 있거나 근엄하고 위엄 서린 모습으로 법당 위 협시불과 함께 있는 것만 봤었다. 노지 바위 사방불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보물 제121호로 지정된 굴불사 터 석조사면불상(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은 통일신라 작품이다. 3m쯤 되는 높이의 바위면에 입체·양각·음각의 다양한 기법으로 입상·좌상 등을 가리지 않고 조각했다. 동쪽에는 약사여래 좌상이, 서쪽엔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삼존불, 남쪽엔 입불상 2구를 양각했으며, 북쪽엔 양각의 입상 보살 1구와 음각의 입불상 2구를 새겼다. 부처들은 모두 풍만한 체구의 건강한 모습이다.

나는 사면불 중 특히 동쪽 약사여래 좌상을 좋아한다. 부처의 모습이 이질적이지 않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쪽 바위 면은 앞쪽으로 살짝 굴곡이 져 부처의 몸도 앞으로 살짝 굴곡져 있다. 마치 세상을 보듬어 안으려는 듯 아늑하다. 부처 뒤에 새겨진 불꽃 문양의 광배도 섬세해 영혼의 절대적인 신(神)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사면불을 돌며 손을 모은다. 동쪽 약사여래불 앞에서는 더욱 마음을 정갈히 하며 약사불의 왼손을 어루만지게 된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명예를 얻고 재산이 많아도 몸이 성치 않으면 허사다. 인간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건 건강을 잃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몸뚱어리가 가장 귀하다는 것은 건강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 동쪽에 새겨진 부처는 인간을 병에서 구원한다는 약사여래 좌상이다. 동쪽 바위 면은 앞쪽으로 살짝 굴곡이 져 부처의 몸도 앞으로 살짝 굴곡져 있다. 마치 세상을 보듬어 안으려는 듯하다.


굴불사는 누가 창건했나

금강산 백률사 초입에 있었다던 굴불사는 『삼국유사』에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굴불사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자연 암석에 새긴 사방불(四方佛)만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四佛山掘佛山萬佛山條) 편에는 굴불사와 경덕왕의 일화 전하고 있다.

‘경덕왕이 금강산 자락에 있는 백률사로 행차할 때, 산 아래에 이르니 땅속에서 불경 외는 소리가 들렸다. 신하들을 시켜 그곳을 파 보게 하였더니, 네 면에 사방불이 새겨진 큰 돌이 나왔다. 왕은 사면불이 나온 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掘佛寺)라 하였다. 지금은 사찰 이름이 잘 못 전해져 굴석사(掘石寺)라 한다’. 이 내용으로 보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 굴불사를 굴석사라 불렀던 것 같다.


↑↑ 백률사에 있는 이차돈의 초상화다. 이차돈의 무덤과 사당이 금강산에 있었다고 전한다. 법흥왕의 측근이자 사인(舍人)의 직책을 맡은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금강산 백률사와 경덕왕

당시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유사』 탑상 ‘백률사’ 편을 보면 계림의 북악 금강령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백률사는 언제, 누구에 의해, 왜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영험하다고 소문난 대비상(大悲像)이 하나 있다고 전한다.

전설에는 대비상(금동약사여래입상, 국보 제28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이 일찍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 밟은 돌 위의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

693년(효소왕 2년) 신라의 낭도 부례랑과 안상이 낭도 1000여명을 이끌고 금란(강원도 통천)으로 놀이를 나갔다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부례랑의 아비가 백률사 대비상 앞에서 여러 날 기도했더니 형탁 위에 거문고와 피리 두 가지 보물이 나타났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존상 뒤에 와 있었다고 전한다. 부례랑이 오랑캐의 부잣집 목동이 되어 소를 치고 있을 때, 갑자기 단정한 승려가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 위로하며 따라오게 했다.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안상을 만났다. 승려가 가지고 있던 피리를 두 쪽으로 갈라 하나씩 주고, 자신은 거문고를 타고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라로 돌아온 부례랑이 피리와 거문고를 가지고 궁궐로 와 왕께 아뢰니 크게 기뻐하며 대비상이 있는 백률사에 큰 재물을 헌납하여 부처의 은덕에 보답했다. 이 밖에도 대비상의 영험함이 많았다고 한다.

경덕왕의 백률사 행차는 대비상이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에게는 딸만 있을 뿐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자식을 보지 못해 첫 왕비는 폐하여 사량부인(또는 삼모부인)으로 봉한 후 의충 각간의 딸을 후비로 맞았다. 시호가 경수태후(만월부인)이다. 아들에 집착한 경덕왕은 표훈대덕을 불러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청해줄 것을 명했다. 천제를 만나고 돌아온 표훈이 왕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천제의 말을 고하자, 이번엔 딸을 아들로 바꿔줄 것을 청하라 명했다. 천제는 딸을 아들로 바꾸는 일은 가능하나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했고, 천제의 말에 왕은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는 것을 택하겠노라고 했다. 이후 왕후가 태자를 낳아 즉위하니 이가 혜공대왕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던 경덕왕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불국사와 석굴암 건축, 월정교 설치, 성덕대왕신종 제조 등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통일신라 전성기를 만들었던 업적 또한 칭송받을만하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집착은 신라를 위태롭게 만든 구실을 했다. 경덕왕의 아들 건운(혜공대왕, 신라 제36대 왕)은 겨우 8살에 즉위해 만월부인의 섭정을 거쳤지만 24살에 시해를 당하게 된다. 이후 신라는 불안정한 왕권전쟁을 겪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금강산 자락을 걸어 돌아와 보니 부처는 여전히 사방을 굽어살핀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부처는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중생을 바라본다. 때로는 그런 부처 앞에 고개 들지 못한다. 부처는 그런 존재다. 중생의 죄를 묻지 않아도, 꾸짖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뉘우치게 하는 존재다.

여느 사찰이든 법당을 들어설 때 법도를 따라야 한다. 기도자는 부처가 바로 보이는 정문을 이용하지 말고 양쪽 측면의 문을 이용하라는 것은, 인간의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는 부처의 자비이리라.

영험하다는 백률사의 대비상은 금강산을 떠나 경주 박물관에 있다. 기도발이 좋다는 굴불사 터 한편을 바라보며 마음을 모아 눈을 감는다. 천년을 돌고 돈 한 줄 바람이 스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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