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몇 채 값의 돌안경, 부(富)보다 덕(德) 쌓기로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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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영 작가
남석돌안경은 수집가들에게도 인기 있는 골동품으로 떠올라 있다. 돌안경은 길쭉한 타원형의 안경집에 담겨 보관되었는데 이 안경집도 만만치 않은 공예품이자 골동품으로 여겨진다.

기록에 의하면 1889년∼1891년 사이 조선에 온 미국선교사 J-게일이 쓴 ‘코리안 스케치’라는 기사에 ‘안경 하나에 15달러의 고가였는데 양반들이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다’고 전한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쓰면서 미국의 연대별 달러 가치를 알려주는 전문 사이트를 찾아보니 1889년의 가치측정은 없고 1900년부터 시작되는데 당시의 1달러 가치가 ‘한 켤레의 특제 가죽 구두를 살 수 있는 가치’였다. 지금도 좋은 가죽 구두를 사려면 수십만 원은 들고, 그때 가죽 구두가 지금보다 훨씬 비싼 것이라 보면 15달러가 적어도 수천만 원에 해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조선후기의 최부자댁 가주들이 지인들에게 돌안경을 선물했다면 그것은 지금으로 치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귀한 선물이었을 것이고 문파 선생님 당대인 일제강점기로 따져도 가치를 가늠하기 힘든 귀한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1960년대 초 남석돌안경 하나에 1000만원, 6·25로 맥 끊어져

최염 선생님도 돌안경 가격이 궁금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남석돌안경의 값을 알아보신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걸 알아보신 것이 1960년대 초인데 그때 남석돌안경 하나에 1000만원이 넘었다고 기억하셨다. 그 당시 1000만원이면 서울의 집 몇 채를 거뜬히 사고도 남을 큰 금액이었다. 더구나 최부자댁 돌안경은 최고의 품질에 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것이었고 무엇보다 다른 곳에 경쟁 상품이 없었던 만큼 최소한 그 이상의 값어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시기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차이가 있고 남석돌안경은 아니지만 나 역시 돌안경을 주문해서 만들어본 적 있다. 아버지께서 환갑을 맞으셨을 때 형제들과 함께 돌안경을 선물해 드린 것이다. 그게 33년 전인 1991년이었는데 그때 가격으로 200만원이 넘었다. 그 무렵에는 돌을 깎는 기술도 자동화되었고 안경테 만드는 기술도 자동화되었던 시기인데도 이렇게 비쌌다. 그 현대식 돌안경도 연수정을 갈아 만든 것이었는데 수정의 무게가 있어서 그런지 안경이 요즘 안경들에 비해 훨씬 묵직했다. 아버지가 돌안경을 썼을 그때만 해도 돌안경은 부의 상징이었고 눈 건강을 위한 최고의 안경으로 여겨질 때였다.

그렇다면 돌안경이 왜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았고 눈 건강에 좋다고 여겨졌을까? 돌안경은 추울 때는 온기를 머금고 있어서 눈을 보호해주고 더울 때는 서늘한 기운을 머금어서 역시 눈을 보호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추운 곳에서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도 안경알에 수증기가 끼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뒤에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에 따르면 수정 자체에서 원적외선이 방출되어 눈에 좋고 렌즈의 입자가 규칙적이고 조밀한 덕분에 빛의 굴절률이 낮아서 깨끗하게 보이고 코팅을 하지 않아도 빛을 반사해서 눈을 보호하는 기능까지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최부자댁에서는 조선 후기에 이미 이 요즘 안경도 갖추기 힘든 건강성과 기능성을 가진 명품 안경을 만들었던 셈이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당연히 생긴다. 이 귀한 명품 안경을 최부자댁에서는 왜 상업화 하지 않았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최부자댁 돌안경은 일일이 손으로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안경알을 갈고 소뿔이나 귀갑을 다듬을 장인들도 극소수로 귀했다. 즉 이 돌안경을 무한대로 만들어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안경에 쓸 만한 수정의 채취가 그렇게 쉽지 않아 대량생산 자체가 어려웠다. 보통 안경알을 만들 만한 수정은 투명한 빛깔의 연수정으로 지름이 10cm 이상이어야 하고 길이도 최소한 20cm 이상이어야 했다. 연수정이라고 해서 다 안경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수정 자체에 잡다한 얼이 적어야 했다. ‘옥의 티’라고 하는 만큼, 얼이나 티가 없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 적은 것이 좋은 수정인 것이다. 기계로 돌을 깎을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일일이 손으로 돌을 자르고 갈았던 시절이니 그런 큰 원석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안경알이 대체로 평균 잡아 한두 벌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1년 걸려서 생산해 낼 수 있는 안경알이 많아야 스물에서 서른 개도 채 되지 않았다.

이 돌안경은 최부자댁 가보격인 특산품으로 문파 선생님 당대에만 하더라도 일 년에 수십 개의 돌안경을 만들어서 중요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거나 집안에 혼사가 있을 때 사돈댁으로 보내는 예물로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혹은 서울 나들이를 하실 때 중요한 지인들에게도 선물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최부자댁 남석돌안경과의 인연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부터 안경이 수입되면서 약화되기 시작했고 6·25를 기점으로 완전히 명맥이 끊어져버렸다. 명맥이 끊어진 사연도 드라마틱하다. 최염 선생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6·25 때 경주경찰서장을 지냈던 사람이 이강학 씨였다. 뒤에 치안국장까지 지낸 사람이었는데 이분이 6·25 당시 경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에 휩싸이지 않으니까 피난 갈 염려를 아예 하지 말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지프차를 타고 문파 선생님께로 달려와서 ‘지금 인민군이 안강을 점령했고 이제 곧 경주시내로 밀고 들어오게 생겼으니 빨리 피난을 가시라’고 전했다.

당시 문파 선생님은 대구에 계셨고 최염 선생님 부친이신 최식 어른이 급하게 피난 짐을 꾸리셨다. 이때 사당의 신주는 사당 밑에 묻어 화를 면하게 했고 돌안경은 안경 채로 집안에 있던 큰 금고에 보관했다. 이때 보관한 안경이 모두 100벌 정도였다.

한 달 정도 피난을 갔다 오니까 집안이 엉망으로 변해 있었고 안경알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 최부자댁은 육군건설공병단이 진주해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때 들어와 있던 군인들이 금고 중에서 제일 약한 밑바닥을 깨고 안경알을 전부 털어가 버렸던 것이다. 그 후로는 전쟁통에 안경을 만들 여력이 없었고 특히 경주 남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나서부터는 수정채취도 금해져서 돌안경의 명성은 그대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최염 선생님의 안경에 대한 회고는 좀 더 이어졌다. 60년대 중반쯤 문파 선생님이 하고 계시던 안경알이 너무 무겁고 색깔이 짙어서 좀 얇게 갈아 드리려고 당시 경주에 있던 ‘남석돌안경’이란 안경점으로 찾아간 적 있었다. 그 집 사장님이 예전에 최부자댁에서 돌안경을 만들던 장인의 아들이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돌안경 제조를 전수받아 대물림으로 안경방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자기를 포함해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때는 안경알을 기계로 자르고 가는데 기계란 것이 섬세한 사람과 달라 안경알을 깨뜨릴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문파선생님 안경은 특별히 더 좋은 품질인데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맡을 수 없다고 했다. 윗대 조상님들이 손으로 구현해내던 기술을 기계가 따라할 수 없었으니 그 정도로 조상님들의 손길이 섬세하고 대단했던 셈이다. 결국 남석돌안경의 신화는 시대의 흐름, 특히 최부자댁이 부자의 문을 내리면서 함께 그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문어발식 재벌기업들 부보다 덕 중시한 최부자댁 마음 배워야

돌이켜 보면 이 남산 돌안경은 17~19세기, 그 시대 ‘최고의 첨단기술’이었다. 더구나 이 돌안경 가공과 생산은 어지간한 자본이 투입되지 않으면 할 수도 없고 설혹 재원은 마련할 수 있어도 그 일을 할 장인을 구할 수 없으면 만들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함부로 따라 하기 힘든 전문 기술이었다. 그러니 그 기술을 산업화시켜서 상용(商用)으로 판매하려고 했으면 적지 않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댁 조상님 중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고 가용(家用)으로만 사용했을 뿐이다. 시중에 남석돌안경이 비싼 값으로 거래되었지만 그것은 최부자댁에서 판매한 것이 아니고 최부자댁을 통해 흘러나간 안경이 시중에서 자기네들끼리 알음알음으로 유통되었던 것들이다.

최부자댁 남석돌안경은 이런 점에서 또 다른 중대한 교훈을 준다. 우리나라 재별 대기업들은 산업이 한창 성장하던 1970년대부터 원래 기업 성장의 발판이던 자동차니 건설이니 전자사업 등에 만족하지 않고 무엇이건 돈 되는 일이면 다 달려드는 ‘문어발식 기업’을 만들어 왔다. 말로만 ‘계열사’였지 그 기업이 성장하는 주된 사업과 상관없이 돈 버는데 혈안이 되어 기업 몸집을 늘여왔다. 그렇게 한 이유도 간단했다. 기업이 커지면서 한 기업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수가 몇천 명에서 몇만 명에 이르자 그 직원들을 기본적인 내부 고객으로 삼아 생활자재와 용품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거대 재벌기업들이 동네 상권을 점령하는 편의점 사업에 뛰어들고 빵도 만들어내고 심지어 떡볶이까지 만들어 팔고 있다. 그런 경영권들은 하나 같이 재벌 2세, 3세들이 소유하고 있거나 최대주주가 되어 지배구조를 독식한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탄받아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부자댁 돌안경이 더 가치있게 보이는 것이다. 아무나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첨단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돈을 벌지 않았고 그 기술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을 후대하여 기술을 대물림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최부자댁 조상님들의 겸허한 마음을 현대의 재벌기업들은 조금이라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 비싼 안경을 선물로만 쓴 것은 부보다 덕을 쌓는 것이 훨씬 많이 남는 장사란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남석돌안경이 최부자댁 어떤 가보보다 귀하여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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