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경주 월성 ‘1800년 전 주거·의례’ 흔적 발견

발굴 조사 통해 토기와 개의 뼈 확인
대지 조성 과정 및 의례적 요소 드러나

오선아 기자 / 202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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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성발굴조사 현장서 가진 현장설명회.

경주 월성에서 1800여년 전 사로국 시기의 취락지와 의례의 흔적이 발견됐으며, 이와 함께 다양한 토기와 의례 제물로 사용된 개의 뼈도 확인됐다. 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지난 7일 월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발굴조사 성과를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 의례 유구에서 확인된 개 뼈.

조사 구역은 월성 서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지점으로, 남천에 접한 연약한 지반의 모래층이 퇴적된 지형이다. 월성이 삼국시대 토측 성벽으로 구축된 형태인 왕성으로 전환되기 전, 3세기 사로국 시기의 취락 모습을 중심으로 공개됐다.

↑↑ 월성A지구 발굴 구간.

발굴 조사 결과, 3세기 전중엽에 취약한 대지에 취락을 조성하기 위해 1.5미터 높이에 가까운 성토 작업, 즉 흙으로 쌓아 기초를 만드는 작업이 수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사용된 재료로는 벼의 겉껍질, 식물 종자, 조개 껍데기 등이 포함돼, 대지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막대한 인력과 자원이 동원된 성토 작업이 성벽 축조보다 100여년 전에 이미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또한, 취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대지 조성층의 가장 남쪽에서는 의례를 거행한 흔적을 보여주는 유구도 확인됐다. 이 유구는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든 원형 구조로, 직경이 약 6미터에 달하며, 불을 질러 마무리한 상태로 폐기된 것으로 나타났다.


유구 안에는 2~3점 씩 짝을 맞춘 토기 15점이 출토됐고, 그 토기 위로 황색 안료가 칠해진 마직물이 감싼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특히 개를 의례제물로 바친 정황이 발견됐으며, 이는 비슷한 시기 유례가 없어 주목되고 있다.

이번 월성 발굴조사 담당 장기명 학예연구사는 “성벽 조사를 시작으로 성벽의 건설 시기와 토목 기술을 조사하다가, 그 아래에 이미 성벽 이전의 3세기 문화층이 존재함을 확인했다”면서 “이 사실을 확인한 후 성벽 조사를 보고 후 조사 범위를 기존 조사 구간 옆으로 확대해 조사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앞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성벽은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월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매우 제한적이며, 파사왕 22년(서기 101년) 당시 성곽을 쌓고 ‘월성’이라 이름 지은 기록조차 간략하다”며 “101년이라는 숫자의 진위 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도 고고학적 검증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성벽 조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대규모 의례가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에 따라 성벽이 특정 시기에 건설된 만큼, 그 이전에 거주했던 인구와 집단의 상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조사 전에는 남성벽의 환경을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조사 결과 남천이 범람한 모래층으로 가득한 연약지반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역에는 바로 취락이 들어설 수 없기 때문에, 성벽이 건설되기 이전 3세기 전중엽에 모래를 다져 성토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명 학예연구사는 “사로국 시기의 취락과 관련된 대지 조성은 남천의 범람으로 형성된 모래 퇴적층 위에 이뤄졌다”면서 “대지 조성은 크게 정지 작업과 취락 지반 조성 순으로 진행됐으며, 정지 작업에서는 모래 퇴적층을 요철이 없는 평탄한 바닥으로 조정하고, 특정 구간마다 목주를 설치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히 취락 내부로 들어서는 진입 지점부터는 모래 퇴적층을 깊게 굴착해 볏짚을 포함한 유기물질을 새로이 깔아채웠다”면서 “대략 두단계에 걸쳐 대지 성토가 이뤄졌고, 이러한 대규모 공사와 노동력 투입이 이미 3세기 중반, 즉 200년 내지 300년보다 앞선 시점에 가능했음을 시사하는 자료”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토기를 통한 연대 파악을 언급하며, “토기 고고학에서는 25년에서 30년 단위로 연대판단이 가능하다”면서 “목탄 시료를 탄소연대측정법으로 분석해 3세기 전중엽 시기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대지 조성은 성벽보다 100년 앞선 3세기 전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장기명 학예연구사는 사로국 시기 대지 조성 직후 취락 초입부에서 발견된 세원진 유구에 대해 “유구의 내부 공간은 크게 3~4개 지점으로 구분된다”라고 밝혔다.

출토된 유물에 따르면, 남쪽 지점에는 목제 시설 안에 약 15점의 토기가 비치되고 마직물로 덮여 있으며, 서쪽 지점에서는 개가 희생되고 7점의 토기가 안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북쪽 지점에서는 연질토기, 골각기, 철기가 출토됐으며, 동쪽 가장자리 지점은 유구 바닥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추정된다.


그는 “일부 양상은 주거의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했으며 의례적 정황이 뚜렷하다”며, “2세기 후엽에는 이미 해자 북편에 장방형 주거지가 확인됨에 따라, 원형 유구는 장기적인 거주용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의례 요소가 명확히 드러나는 만큼, 초기에는 임시 거주 기능을 띠었으나 결국 용도 변경돼 의례 유구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구 폐기의 배경에 대해 “대지 조성 직후 지어진 초창기 건축물과 취락 초입부의 입지적 상징성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주월성은 사로국 초기인 파사이사금 22(101년)에 축성됐고, 5세기 이후에는 신라왕경의 핵심인 왕성으로서 가능해 국운이 다할 때까지 존속한 것으로 추정됐다.

성의 모양이 반달 같다고 해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해 재성이라고도 했다. 고대 궁성 중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위치 비정에 이견이 없는 왕성이며, 전 세계적으로 왕성의 존속기간이 800년이 넘는 곳은 월성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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