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인문학 산책] 윤정모 작가와 경주 외가 나원리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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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원리 입구에 나원백탑으로 불리는 국보 경주 나원리 5층석탑.

윤정모 작가의 책을 펼치면 프로필에는 경주 외곽 출생으로 표기되어 있다. 경주 출생이라고 해도 될텐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원리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나원리는 작가에게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윤정모 작가는 1946년 11월 외가인 경주 현곡면 나원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엄마 없이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돌봄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갈 때까지 나원에서 보낸 시간들은 작가의 소설 속에서 어김없이 등장한다.

요즘 산모들은 병원에서 몸을 풀고 산후조리원을 가지만 예전에는 산달이 되면 대부분 친정에서 몸을 풀었다. 병원에서 태어난 세대가 아니라면 태어난 순간의 첫 손길은 아마도 외할머니였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어머니의 어머니로 모계사회로 이어지는 띠뜻함의 혈통일 수 밖에 없다. 조선시대 역사적 인물의 출생지를 보면 외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이 있다. 결혼 후 처가에 가서 생활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원리의 재미있는 이야기들

나원리 입구에는 나원백탑으로 불리는 국보 39호 5층석탑이 있다. 탑은 천년이 지나도 흰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신라 3기8괴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난이 많이 자생한다하여 란원으로 부르다가 이후 나원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마을의 유래가 있다. 탑 이름도 마을이름을 가져와 부르게 되었다. 인터넷에는 나원리5층석탑을 계탑이라 부른는 이가 있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계탑은 나원 3리에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탑재들은 사라진지 오래되었으며 현재는 알 수 없는 분묘가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기와조각들이 나왔다고 하니 오래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이름도 계탑 또는 탑각단이다.

나원리에는 진덕여왕릉 조성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현재 진덕여왕릉은 이웃마을 오류리에 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왕릉터를 두고 지관들끼리 오류가 좋다 나원이 좋다 서로 경합하였다고 한다. 묘안을 내놓았는데 계란을 묻어두고 먼저 부화하는 곳으로 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원보다 먼저 오류에서 부화되어 오류리에 현재 진덕여왕릉이 있다고 한다. 나원리에는 왕릉을 조성하다 만 흔적이 마을 뒷산에 있다고 한다. 마을 어른은 친절히 입구까지 안내까지 해주었다.

↑↑ 윤정모 작가(한국작가회의).


윤정모 작가의 어린시절 나원리

윤정모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여러 권의 소설을 찾아 읽게 했다. 1992년 발간된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의 후기에 수록된 작가연보는 나원에서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가 있었다. 요약 정리하면 하면 아래와 같다.

-나원에서 출생하여 다음해에 부모가 이혼을 하였고 48년 어머니 재혼 후 서울 청량리에서 2년 살다 6.25전쟁이 일어나서 경주 외가로 피난가서 나를 맡기고 다시 떠났다.

-외삼촌이 보모 역할을 하며 업어키웠다. 큰삼촌은 군속으로 군대 있었고, 중간 삼촌은 나를 엎고 보리밭에 가서 새를 보거나 깜부기를 뽑았다. 막내삼촌은 책보를 메고 산너머 학교를 다녔는데 삼촌을 따라 학교에 가고 싶었다.

-여섯살 때 마을 동사에 방2개 임시 교실 정하고 1학년 2학년을 모집했다. 7세에서 18세까지 모집하는 바람에 함께 놀 동무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제일 어린 나이로 입학했다. 탁아소처럼 이 동사학교를 다녔다. 놀아줄 사람들이 많았다.

-광목 고무줄팬티가 흘러내렸던 경험이 있었지만 어려서 부끄러움을 몰랐다. 팬티없이 치마만 입고 다녔고 엉덩이를 맞았던 경험이 있고 삼촌에게 일러주기도 했다. 부모없는 아이라고 업신여김 당할까봐 할머니 외삼촌들은 눈을 부릅뜨고 내 주변을 살피는 과잉보호 속에 자랐다. 외갓집 식구들은 처음부터 남다르게 길렀다. 마을의 다른 애들과 달리 호미도 못쥐게 했다. 단 한번도 부엌일을 시키지 않았다. 넌 공부해야돼 소리를 제일 많이 들었다.

-소풍가서 잠이 들면 나이 많은 언니들이 집에까지 업어다 주기도 했다. 몸이 유난히 작았
고 5학년 때까지 삼촌들이 자주 업고 다녔다. 두번 낙제를 했다. 1학년을 두번 다녔다. 5학년을 마치고 부산으로 전학갔다.

위와 같이 작가가 기록한 연보를 읽다보면 동화책을 읽는 것 같다. 작가의 유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 외에도 나원초등학교에 두 번이나 낙제를 했던 경험, 아홉살 때 동사 마당에서 최초로 본 활동사진 나운규의 <아리랑>의 남자주인공이 낫을 쳐든 장면은 충격적이었는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고 했다.

외갓집에 와서 잠든 사이 엄마가 떠난 뒤 밤새 울던 아이를 외삼촌들이 번갈아가며 업고 달래주던 그 첫날부터 외삼촌들은 보모이자 보호자 역할을 했다. 둘째 외삼촌은 14살, 막내 외삼촌은 10살이 더 많았다.

↑↑ 자전적 소설 『꾸야 삼촌』 표지.

자전적 소설 『꾸야 삼촌』 속의 경주 또는 나원리

소설 『꾸야 삼촌』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담긴 소설이다. 어린시절 외가에서 자란 나원리 일대가 주된 배경이다. 이 소설은 치매 걸린 외삼촌이 집으로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릴적 업어주고, 데리고 놀아준 보모 역할을 한 외삼촌이다. 꾸야 삼촌의 이름은 한인구인데 외할머니가 ‘꾸야’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한국 전쟁의 피해 당사자가 된 외삼촌의 굴곡진 삶을 시대의 아픔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소설에는 경주의 친숙한 지명들도 등장한다. 지명을 살짝 바꾸기도 했지만 바로 알 수 있는 곳들이다. 나원(나우리). 현곡, 금장, 검단(금단), 청령(청량), 나원리 오층석탑, 형산강과 철교, 검단약수처, 현재 황성공원의 옛날 이름인 고성숲(고송숲) 등이 나온다.

특히 작가가 경험한 두 번의 피난이 현장감있게 다가온다. 첫번째는 서울 영등포에서 탄 기차가 오산에서 호주 포격기의 오폭으로 경주 외가까지 걸어서 왔다. 오면서 자주 엄마의 손을 놓치기도 했다. 졸지말라고 나무라는 어머니, 졸음과 허기와 피로, 수마와 지독한 고통을 견뎌내며 그 먼길을 걸어 경주로 왔다.
두번째는 안강에서 북한군과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자 외삼촌의 지게에 얹혀 나원에서 금장, 황성숲, 불국사, 입실로 이어지는 피난길에 올랐다. 감기와 몸살, 고열로 힘들었던 스무 날의 어린아이가 겪은 피난이 소설 속에 들어있다.


『꾸야 삼촌』은 작가의 외삼촌을 모델로 쓴 작품이다. 이 책 후기에 ‘주인공 꾸야삼촌의 모델이 되어준 막내외삼촌 영전에 바친다’라고 밝혔다.
논에 새를 보며 책을 읽고 영어단어를 외우던 작가의 외삼촌이 누구일까 궁금했다. 왜냐하면 《사상계》를 읽고 시를 쓰던 분이기에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인협회 또는 작가회의 회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원리가 고향인 친구에게 부탁하여 탐문한 결과 작가의 어릴적 이름은 윤찬선이었고 나원 3리에 살았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윤정모 작가의 소설 작품들

작가 윤정모의 소설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상처나고 아픈 곳, 예민한 곳을 파고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의 소설을 간략히 살펴보면 밀리언 셀러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삐』는 윤락여성을 통해 매춘과 외세, 즉 반미를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이 책의 인세를 양심수 가족들 단체인 민가협(민주주의실천가족협의회)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밤길』과 『누나의 오월』에서는 광주 5.18을, 『들』은 농민의 고통과 좌절과 분노를, 『나비의 꿈』에서는 작곡가 윤이상의 삶과 예술적 성취를 민족과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다. 한때 딸과 함께 영국에 체류하기도 했던 작가의 『슬픈 아일랜드』는 분단과 식민지배 등 우리나라와 닮은 아일랜드 역사를 거울처럼 비쳐보고 있는 소설이다.『딴나라 여인』은 해외입양 여성이 겪는 정신적 고뇌를 이야기 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다룬 『에미 이름은 조선 삐였다』 그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에 엄마가 있었어』를 최근 발표했다. 『수메르』 3부작은 5천년 전 인류최초의 문명 수메르와 한민족을 연결시킨 대서사시의 소설이다. 『수메르』는 필자가 처음으로 접한 작가의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가 집필한 소설은 스무 편이 넘고 계속 발표 중에 있다.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일을 스스로 불가사의 한 일로 여기며 몇가지 이유를 들었다. 좋은 스승과 멋진 선후배를 만난 것과 외삼촌이 다른 잡지도 아닌 《사상계》를 읽었다는 것을 들었다. 사상계를 구독하던 막내 외삼촌은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외삼촌은 아버지이자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나원리 5층 석탑 또는 나원백탑

작가가 다시 경주 나원리를 찾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어릴 적 나원리와는 사뭇 다른 나원의 모습을 볼 것이 분명하다. 나원역은 이미 폐역이 되었고, 대로들이 동네 앞을 지나가고 있다. 마을 안까지 공장이 들어와 있고, 나원 3리는 아예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다. 최근 형산강 건너 아파트단지로 연결되는 다리가 놓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용황동 아파트단지는 소설 『위대한 갯츠비』에서 주인공이 바라보던 강 건너 불빛과 다름없을 것 같다. 부와 성공을 대변하는 강 건너 화려한 불빛의 대척점에 나원리 오층석탑이 있다. 천년 세월에도 흰빛을 잃지 않는 나원백탑으로 불리는 탑만이 변함없이 서 있다. 마을 입구 산기슭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며 오래된 이야기들을 모두 알고 있을 것 같다. 소풍가서 잠이 들어 등에 업혀오던 소녀도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전인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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