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 남석 돌안경, 조선시대 최고의 첨단사업!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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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석 교수가 그린 정약용 선생 초상화. 남석 돌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 박근영 작가
경주최부자를 취재하고 연구하면서 찾아낸 보석 같은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을 선택하라면 단연 지금 쓰는 ‘남석돌안경’ 이야기다. 안경이라면 으레 서양에서만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나 해방 이후에 본격적인 사업이 진행되었을 것이라 믿기 쉽다. 그런데 이 안경이 전혀 예상 밖에도 경주최부자 집안의 독보적인 기술로 오랜 기간 전승되어온,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최염 선생님께 처음 남석돌안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엄청난 이야기가 왜 세상에 단 한 번도 전해지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말씀인즉 최부자댁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너무 많고 중요한 것도 많아 미처 돌안경까지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지만, 그 정도로 쉽게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사실이 너무나 소홀하게 여겨져 세상에 전해지지 못했다.

3대 가기도 힘들다는 부를 무려 10~12대를 내린 최부자댁에 남다른 특산품이 존재한다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울 텐데 누구도 이런 점에 시선을 돌리지 못했던 셈이다. 내가 경주최부자를 연구한 것이 정말 가치 있게 느껴지는 또 한 번의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최부자댁에서는 남석돌안경을 만들게 되었을까?

경주는 예로부터 옥돌, 즉 수정의 특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경주의 남쪽에 자리 잡은 남산은 우리나라 수정 중에서도 가장 양질의 수정이 나는 곳이다. 특히 남산은 안경을 만들기에 적합한 연수정이 많이 났다. 최부자댁에서는 그중에서 특히 최상품으로 치는 연수정이 모여들었다. 경주 속담에 ‘남산 돌이라고 다 같은 돌인 줄 아느냐?’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바로 최부자댁에 들어오는 수정들에서 전래한 것이다. 이 수정을 잘 갈아서 안경알을 만들고 여기에 소뿔을 깎고 갈아서 만든 안경테에 끼운 것이 그 유명한 ‘남석돌안경’이다.



최초로 안경 쓴 사람은 김성일 선생, 정조대왕과 정약용 선생도 안경 사용해!!

그러나 이 유명한 남석돌안경을 언제부터 최부자댁에서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최염 선생님도 구체적으로 모르셨다. 그래서 우리나라 안경의 역사를 샅샅이 찾아보았다.

기록상으로 남석 돌안경이 최초로 나오는 곳은 조선 인조 때인 1636∼1637년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민기(閔機)가 경주에서 남석안경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는 ‘동경수정안경’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는데 경주의 다른 이름이 동경(東京)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최부자댁 연표로 보면 이 시기는 최동량(1598~1664)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을 시기이나 부자가 되기 이전이므로 안경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적다. 추측하건데 다음 대인 최국선(1631-1682) 공이 부자로 행세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빈민구제니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니 돌안경도 이때부터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의 이런 추측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선조 때의 명신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 선생의 존재다. 이분은 의성김씨의 대표적 문인으로 선조임금이 왜에 통신사를 파견했을 때 정사 황윤길과 함께 부사로 임명되어 왜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이때 황윤길은 왜가 침략할 것이라 상주한 반면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용모가 옹색해 하찮게 보인 데다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우려하여 왜가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주, 나중에 왜가 침입하자 잘못된 정보를 올렸다 하여 삭탈관직당한다. 그러나 전쟁이 심해지자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격전 지역을 직접 쫓아다니며 관병과 의병을 위무하며 공을 세운다.

희한하게도 이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안경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만약에 학봉선생이 경상도 지방을 위무하러 다니다가 안경을 구했다면 그것은 그 이전부터 경상도 지방에서 안경을 만들고 있었거나 전쟁 중 왜군에게서 습득한 전리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 안경의 존재를 최부자댁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마침 최부자댁이 바로 학봉 선생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8대 최기영(1768~1834) 공 때다. 그러니 학봉 선생가에서 내려오는 안경이 최부자댁 윗대 어른들에게 어떤 계기를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 역대 왕 중에서 안경을 쓴 정조대왕(1752~1800)의 기록도 찾았다. 이분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해 엄청난 독서광이었고 그 덕분에 시력을 상해 지독한 근시라 안경을 썼다. ‘안경’하면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정약용 선생은 경기도 남양주가 본가인데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강진군에 무려 18년 동안 유배되어 있었다. 남양주에 있는 다산기념관에는 안경 안 쓴 다산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강진군의 다산기념관에는 안경 쓴 다산 선생이 그려져 있어 대조적이다. 남양주 기념관 초상화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고 강진군 기념관 초상화는 김호석 교수가 2009년에 완성한 것으로 정약용 선생의 기록과 선생의 후손들을 관찰한 후 그린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정조대왕은 정약용 선생을 깊이 신뢰하고 총애해 중책을 맡겼고 수원성 쌓는 공사도 총괄하게 했는데 어쩌면 정약용 선생의 안경은 정조대왕에게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남석돌안경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순조임금(1790~1834) 때부터다. 이때는 남석돌안경이 고급 안경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당연히 경주의 연수정으로 최부자댁에서 만든 안경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경주에서 돌안경을 만든 역사는 임진왜란 전이나 후라 여겨지고 최부자댁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이르면 17세기 후반, 늦어도 순조 이후인 18세기 후반인 것은 분명하다.



부를 활용해 최첨단 기술을 살렸고 전문화된 장인들을 양성하는 중요한 사례, 문어발식 기업들 본 받아야!!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또 하나 의문이 들었다. 안경은 조선시대 당시로는 굉장히 귀한 물건이고 최첨단 기술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귀한 기술이 왜 산업화 되지 못하고 집안의 가보쯤으로만 대물림 되어 왔을까? 그러나 최염 선생님의 회고를 들으면 최부자댁에서도 이 기술을 만만히 취급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최부자댁에서는 나름대로 이 기술의 전수를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 돌 채취꾼과 기술자들, 뿔테 제작자들을 꾸준히 대물림시키며 안경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돌안경을 만들려면 당연히 돌안경의 재료인 수정이 필요했다. 최부자댁에는 그 수정만 전문적으로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이들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비나 눈이 오지 않는 날은 매일 도시락을 싸서 몇 명씩 조를 지어 온 산을 누비며 수정을 채취하러 다녔기에 수정채취에 있어서 만큼은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또 그들의 수정 채취는 대를 이어 그 발굴이나 채취법이 전승되었다.

수정이란 것이 그냥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고 설혹 좋은 수정을 캤더라도 합당한 임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건 한낱 돌덩이에 불과했기에 수정만 캐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최부자댁에서는 이들에게 따로 전답을 떼 주고 수정을 캐서 바치도록 하는 대신 그 전답에 대해서 일절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수정 캐는 일만 해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는 기본 바탕을 마련해 준 것이다. 때문에 전문 채취꾼들은 아들이 태어나면 어릴 때부터 함께 산을 타면서 수정이 나는 바위의 생김이나 특징을 가르치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수하여 또 다른 전문 채취꾼으로 키웠다. 그런 전문 채취꾼이 1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수정 채취꾼이 수정을 가져 와 최부자댁 창고에 넣으면 이때부터는 수정을 갈아 돌안경을 만드는 장인들이 작업을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이 단단한 수정을 어떻게 갈았을까라는 점이다. 광물들이 단단한 기준을 모스 경도로 표시하는데 수정은 무려 7로 매우 단단한 광물에 속한다. 그 옛날에 이것을 어떻게 자르고 갈았는지 기술을 보지 못해 아쉽다. 더구나 돌을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근시 안경과 원시 안경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니 그 정교함을 어떻게 구사했는지도 의문이다. 정조대왕이 어렸을 때부터 안경을 썼다면 분명히 근시 안경이었을 것이고 정약용 선생이 쓴 안경은 원시 안경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안경알 만드는 장인들은 눈의 기능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지도 몹시 궁금하다.

안경알 제작과 함께 한편에서는 뿔을 갈아 안경테를 만드는 장인들도 일을 꾸준히 일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역시 구체적인 작업 방식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오래전 안경들을 보면 투박한 뿔테 안경을 쉽게 보는데 사람들은 흔히 뿔테 안경을 동물의 뿔로 만드는 것으로 안다. 물론 물소의 뿔을 안경테로 만들고 그게 아주 귀한 재료로 쓰였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거북의 등껍질로 만든 안경태는 소뿔로 만든 재료에 비해 10여배가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북 등껍질 소재의 안경태는 그 자체로 천만 원대까지 나간다는 것이 안경계의 중론이다. 그 옛날에 뿔테의 재료는 어떻게 구했고 제작기법은 어떠했는지도 향후 전문가들에게 물어볼 예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안경알 만드는 장인들과 뿔테 만드는 장인들도 역시 수정 채취꾼들처럼 최부자댁에서 준 전답을 받아 생활을 영위했고 그것을 대물림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런 계약관계로 인해 최부자댁에서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남석돌안경을 대를 이어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산업으로 양산되지는 못했어도 부를 활용하여 최첨단 기술을 살렸고 이 분야의 전문인들을 꾸준히 양성한 중요한 사례다. 오늘날 남들이 다 하는 일로 문어발식 경영에 익숙한 재벌 기업들이 깊이 참고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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