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12] 경주 천군동 절터

내가 여기에 온 건 우연이 아니었어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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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군동 절터 동·서탑이다. 동탑은 탑 터를 낮게 파고 주변에 석축을 쌓고 그 한가운데 기단부를 놓았다. 서탑은 바닥 위에 그대로 기단부를 놓았는데 두 탑의 높이를 맞추기 위함인지 동탑은 바닥을 판 대신 기단부를 높게 올렸다.


우연히 들어선 길에서 만난 절터

9월인데도 폭염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는다. 햇빛이 강열한 한낮에는 거리에 나갈 수조차 없을 만큼 뜨겁다. 해가 저문 밤에도 달아오른 도시는 쉽게 잠들 수 없다. 더워도 너무 덥다. 이럴 땐 이른 새벽을 택해 풀밭으로 나간다.

동이 트지 않은 풀밭은 그런대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은 생동하듯 기지개를 켠다. 잎사귀마다 크고 작은 이슬을 매단 모습은 맑고 깨끗하여 순수성을 내뿜는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미치기 전 먼저 풀밭에 닿는 것을 즐기는 건 중독이다. 동이 터 오기라도 할 때면 풀밭의 이슬들은 빛을 머금어 더욱 싱그러워진다. 빛나는 이슬을 만날 때면 신(神)이 풀잎에 뿌려놓은 가장 맑고 신성한 선물이라 믿는다.

이른 새벽 경주 어느 풀밭을 잠행하다 동이 트는 걸 알았다. 영롱하게 빛나던 이슬이 사라진다. 빛에 타 들어간 것인지, 풀숲에 몸을 숨긴 것인지 모르나 이슬은 빛을 싫어하는 습성을 지녔나 보다.

나 역시도 그렇다. 떠돌다 햇살이 밀려드니 서둘러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낯선 길을 달리다 불쑥 보문단지 낯익은 길이 나타난다. 이런 길은 익숙함에서 오는 무료함이 싫다. 이럴 땐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나 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땐 스스로 새로움을 찾아야 한다.

보문호와 경주월드를 끼고 달리다 무작정 대로변 좁다란 길로 들어선다. 작은 초등학교가 나오고 이내 길이 좁아진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큼의 폭, 무성히 자란 풀이 평소 인기척이 드물다는 걸 알려준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비포장길이 나타난다. 차를 몰아 깊숙이 들어가면서도 막다른 길이면 어쩌나 걱정이 인다.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두고 미묘하게 일렁이는 갈등,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여기서 돌아나가는 건, 저 길 끝에 있을 무언가를 버리는 것과 같다. 늘 그랬듯 ‘GO’는 나의 모험에서 가장 큰 용기와 결과였다.

풀들이 점점 길을 좁힌다. 마치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라도 하듯. 차는 거칠게 풀을 헤치고 나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른 공터가 나타난다. ‘뭐지?’ 풀밭이 길 한쪽에 펼쳐진다. 나락이 영그는 논과 풀밭은 관리된 것과 버려진 것의 반대성을 지닌 것과 동시에 미묘하게 닮았다. 생전 처음 와 보는 곳 한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방을 살핀다. 그때다. 우람한 무언가가 보인다. 얼른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 서탑 앞엔 석조유물이 놓여있다.


풀밭으로 남은 천군동 절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감탄이다. ‘아!’하는 감탄이 뱉어진다. 두 기의 석탑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두 석탑을 눈앞에 두고 미묘한 감정이 인다. 여기가 어디인지, 이 탑이 어떤 탑인지조차 모른 채 멍하니 서 있다 탑 앞에 서 있는 안내문을 읽는다.

경주시 천군동 절터다. 통일신라의 사찰 터로 추정한다. 두 탑은 1963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82호로 지정된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이다. 무너져 있던 탑재와 주춧돌을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복원했다. 1938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발굴조사를 했고 중문과 금당, 강당 자리를 확인했다. 기와와 벽돌, 지붕 맨 윗부분 끝을 장식했던 치미가 나왔다. 무려 58cm에 이르는 큰 크기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절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논밭으로 경작이 한창이다.

탑이 서 있는 땅은 풀이 너무 무성해 감히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풀밭 넘어 보문단지의 알록달록한 색깔의 놀이기구가 지척이지만, 여기서는 마치 시간이 멈춘 오랜 과거인 듯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저 무성한 풀밭으로 들어가 마음껏 누비고 싶지만, 태초의 땅처럼 풀밭은 두려움마저 자아낸다. 풀밭 어디엔 삵이나 오소리, 들고양이와 독사, 살모사 같은 혐오스러운 뱀이 저들만의 영역을 이루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침범하지 말자.

무성히 영토를 넓히느라 애쓴 풀밭은 저들만의 세계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나는 풀밭 주변을 서성이며 탑을 본다. 경주에 있으니 신라시대 석탑일 테다. 탑의 규모나 형식을 보아도 신라 여느 탑과 닮았다.

사적 제82호인 천군동 절터에 서있는 동·서 삼층석탑은 보물(제168호)로 지정되었다. 두 탑은 불국사 삼층석탑이나 고선사 터 삼층석탑, 감은사 터 삼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부조(浮彫)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으로 너른 땅을 지키고 있다.


서로 같은 두 탑 서로 다른 두 탑

두 탑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다만 동탑은 탑 터를 낮게 파고 주변에 석축을 쌓고 그 한가운데 기단부를 놓았다. 서탑은 바닥 위에 그대로 기단부를 놓았는데 두 탑의 높이를 맞추기 위함인지 동탑은 바닥을 판 대신 기단부를 높게 올렸다. 탑이 있던 사찰의 이름이나 창건된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너진 채 흩어져 있던 탑재와 주춧돌을 모아 탑을 복원했다. 1938년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의해 중문과 금당, 강당 자리가 확인되었을 뿐 절에 관한 이야기는 무엇도 밝혀지지 않았다. 명문 기와라도 한 조각 나와주면 어떤 기록을 찾아 어떠한 실마리라도 풀릴텐데, 천군동 절터는 아직 세상에 제 이야기 한 줄 꺼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2020, 글항아리) 11쪽에 실린 1938년 촬영된 사진 속 천군동 절터 동탑이다.


책 속의 탑을 마주하다

동탑의 바닥을 굳이 낮게 파고 탑 주변에 석축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구덩이를 파고 세운 특이한 구조의 동탑을 보다 한 장의 사진이 스친다.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2020, 글항아리)의 11쪽에 실린 사진 속 탑과 흡사했다. 이 책의 저자 ‘모리사키 가즈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대구, 경주, 김천에서 자란 재조 일본인이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 본토로 건너갔지만 나고 자란 땅 조선을 그리워했다. 재조 일본인은 조선에서 나고 자랐지만 조선인일 수 없었고,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완전한 일본인이 될 수도 없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일본에서는 재조 일본인을 두고 귀태(귀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여기며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 책 11쪽에 실린 사진을 보면 여러 사람이 탑 앞에 서있다. 일부는 탑 위에 올라 서거나 혹은 탑 위에 앉았다. 이 사진은 모리사키 가즈에의 아버지 구라지가 경주에 교사로 부임할 당시의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는 ‘1938년 5월 10일 경주 천군리’라고 기록해 놓았다. 사진 속 탑을 보면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무릎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움푹 파인 구덩이 속에 서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뒷줄의 사람들은 탑 기단부에 올라서 있다. 탑의 꼭대기에 노반과 찰주가 없는 것과 구덩이가 파인 것을 보면 사진 속 탑은 동탑이다. 지금은 탑 주변에 잔디를 심어 관리하고 있지만, 1938년 당시는 탑재만 쌓아 복원한 상태로 주변은 그냥 황무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흑백이라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뒷산의 완만한 산세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인근에 현대식 건물들이 시야를 살짝 가렸을 뿐이다. 비록 일본인이 소장한 흑백 사진 한 장이지만 옛 모습을 본다는 건 참 의미 있는 일이다.

조선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재조 일본인 모리사키 가즈에 선생은 세상을 떠났지만, 내가 우연히 만난 탑이 책 속의 탑이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한 장의 사진과 사진 속 대상을 현실에서 마주했을 때의 감탄은 실로 강렬하다. 우연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탑과 나는 어느 시대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지금 여러 번의 환생을 거듭하다 필연에 의해 다시 만난 것은 아닐까. 굳게 잠긴 이 풀밭의 비밀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 풀밭이 열리는 날 그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탑 앞에 서있을까.

뙤약볕이 한없이 내리쬔다. 다시는 주저앉지 않겠노라는 듯, 힘 있게 서 있는 탑 아래 나도 오래도록 서 있다. 풀밭을 스치고 온 바람이 나를 스치고 탑을 스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천년이든 백 년이든 우리는 그렇게 서로 마주했던 게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말도 없이.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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