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버린 문화적 가보-영남대 문파문고와 9첩 진사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9월 26일
공유 / URL복사
↑↑ 박근영 작가
영남대 중앙도서관 5층에는 고문헌실(古文獻室)이 있고 이 고문헌실을 통해 6층으로 올라가면 ‘문파문고’라 붙인 철문이 나온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복도가 나오고 그 복도를 중심으로 오른 쪽에 우람한 책장이 세 개가 있고 그 책장에는 한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고서적들이 세로로 혹은 가로로 꽂히거나 얹혀 있다. 왼편에는 최부자댁 사진과 함께 육훈이니 육연을 안내하는 액자가 걸려 있고 문파 선생님을 비롯해 문파 선생님의 아버님이신 최현식 공 사진을 비롯하여 문파 선생님이 기증하신 고문헌 중에서도 특별히 가치 있는 책자들이 별도로 전시되어 있다. 문파문고는 엄격한 습도와 통풍 관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 문파문고에 전시된 최현식 공, 문파 선생님 등 사진


영남대 ‘문파문고’ 최부자댁 특별한 가훈과 9첩 진사 배출한 인문학적 저력 느껴져

이 문파 문고를 보면서 나는 최부자댁이 왜 다른 부자들과 다른지를 극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어떤 부자들이 이처럼 책을 사랑하고 조상대대로 지녀왔으며 우리나라 어떤 양반 가문에서 이처럼 많은 문헌 자료들을 모아 대학에 기증했을까. 경주최부자가 다른 양반이나 부자들과 달리 육훈이나 육연 등 분명한 부의 철학을 가지고 그것을 자손대대로 물려준 바탕에는 이처럼 책을 아끼고 간직해온 인문학적 소양이 함께 있었다는 생각에 새삼스럽게 전율이 느껴졌다. 문자향서권기(文子香書卷氣)라는 말이 그야말로 확연하게 다가왔다.

이 문파 문고는 그해 6월 최염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찾게 되었다. 2017년 6월, 영남대 정상화를 염원하는 관련 5개 단체 회담에 참석했을 때 관련 인사들과 함께 둘러보게 된 것이다. 그때 최염 선생님 모습이 영남대학교 문파문고에 걸린 문파 선생님 모습과 너무 닮아 보이셨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최부자댁 내력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독자라면 특별히 벼슬을 하거나 유명한 학자를 배출하지도 않은 최부자댁이 이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랄 것이다. 최부자댁은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 1대 정무공께서 문반에서 무반으로 출신하신 이후 2대 동량 공이 용궁현감을, 3대 국선 공이 사옹원 참봉을 지난 이후 조상 전래의 유훈으로 진사 이상 벼슬을 살지 않았다. 그런 최부자댁 가계에서 아홉 분의 진사를 배출한 저력을 알 것 같았다.

↑↑ 문파문고에 보관된 최부자댁 책들

최부자댁은 양반의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사 혹은 생원시에는 꾸준히 급제자를 내었다. 흔히 9대 진사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9대 진사가 아니고 9첩 진사가 맞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6대 종률 공으로부터 11대 현식 공에 이르기까지 5대 동안 3분의 생원과 6분의 진사를 배출했다. 뒤에 생원시보다 진사시에 대한 명칭이 일반화되었고 내막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9대 진사라는 말을 퍼뜨리게 된 듯하다.

조선시대는 3대가 넘도록 벼슬을 살지 못하면 양반으로 행세하기 어려웠다. 물론 진사·생원이 벼슬이 아니지만 이 정도 시험에 합격하는 것으로 양반으로서의 신분을 보장받는 동시에 선비 혹은 학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검증받을 수 있었기에 최부자댁 조상님들은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이 기본 요건을 갖추었다.

그렇다고 생원시나 진사시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굳이 따지자면 이 시험은 상당히 어려운 시험이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는 대과(大科)와 소과(小科) 그리고 잡과(雜科)가 있었다. 대과는 관리로 채용되는 문과와 무과가 있었다. 여기서 문과의 경우 지방에서 치르는 1차 시험인 초시(初試)에 합격한 선비들 2차 시험인 중앙에서 치르는 복시(覆試)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데 이 복시를 ‘소과’라고 부른다. 이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간 합격자들이 300일 이상 공부한 후 임금 앞에서 3차 시험을 치는데 이게 전시(殿試)라 불리는 대과다. 대과에 합격하면 본격적으로 벼슬을 받게 된다.

이중 소과는 생원과와 진사과로 다시 나뉜다. 생원과는 사서와 오경 등 주로 경전 내용으로 시험을 보았고 진사과는 시(詩)와 부(賦) 등 문예적 자질을 시험으로 보았다. 초시는 전국적으로 5~600여명을 뽑았고 복시에는 100여 명을 뽑았으니 그 정도면 그 당시 최고의 수재라 할 만했다. 참고로 조선 후기 대과는 소과를 치지 않고도 볼 수 있었고 대과와 소과가 각각 다른 시험으로 치러졌다. 다만 소과가 양반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계속 남았다.

벼슬을 마다하고 진사나 생원만으로 입신해왔지만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공부를 해야 했고 집안이 누대에 걸쳐서 부자로 살았으니 자연 집안 대대로 전해져 오는 서책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서책들은 선대 조상님들이 꾸준하게 사 모은 것이거나 필사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게 중에는 당대의 학자들을 모아 직접 편찬한 것도 많다. 해방 전에도 육당 최남선 선생과 위당 정인보 선생이 최부자댁에 머물며 경주 역사를 정리하여 ‘동경통지(東京通誌)를 저술한 바 있다.

이런 서책들은 이조리의 남강서당, 경주 사마소의 병촉헌(炳燭軒)과 경주 향교의 부숙건물인 육영제(育英齊), 최부자댁 사랑채 등에 보관되어 오다가 문파 선생님께서 대구대를 설립하시면서 대학설립 조건을 맞추기 위해 모두 대학에 기증하셨고 후에 대구대학이 영남대 ‘문파문고(汶坡文庫)’에 보관되었다. 문파문고에는 조상 대대로 전해진 책 5500여권에 문파 선생님께서 직접 사모은 책이 더해져 1966년 기준 8968권의 책이 목록상에 올라와 있다. 이는 여느 대학들의 동양서적 보관과는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영남대학에 전해진 책들은 7000여권이었는데 허술한 관리로 도난 당하거나 분실 혹은 미반환 등으로 인해 현재는 5500여권만 전한다. 이들 없어진 책들 속에 어떤 보물이 숨어 있을지 상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참고로 이 책을 대구대에 기증할 당시 문파 선생님은 ‘동양철학과’를 개설해야 한다고 다짐해 놓으셨다. 신문물과 신기술을 등에 업은 서양 가치가 몰려드는 시대, 동양의 현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철학과 사상이 무절제한 서양 우월주의에서 우리 민족의 내면을 근실하게 지켜줄 수 있다고 보신 것이다. 그 결과 대구대가 1947년 한강 이남에서 처음으로 철학과를 개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파트도 별도로 생기게 되었다. 순수한 한 명의 기증자의 영향력이 이처럼 대단했던 것이다.


↑↑ 한문소설 구운몽 필사본


세 번에 걸친 장서기에 책을 모으고 보관한 경위 수록, 책들만큼 조상대대로 기록한 장서기도 대단!!

그렇다면 최부자댁에서는 언제 어느 분이 이렇게 많은 서책을 모으게 되었을까? 무인이었던 1대 정무공의 뒤를 이은 2대 동량 공은 직접 아버지의 행적을 더듬어 훗날 ‘잠와실기(潛窩實紀)’의 토대를 만들 정도로 글을 좋아하고 책 모으기도 좋아하신 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책을 모은 분은, 남강서당을 세운 7대 최언경(1943~1804) 공이다. 이후 자손 대대로 책을 모으고 보관해오다 11대 최현식(1854~1928) 공까지 모아진 책들이 문파문고가 되었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매우 특별하게 이들 책에 관한 전체적인 ‘장서기(藏書記)’, 즉 어떤 책을 어떻게 구하고 보관했는지를 설명하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영남대 문파문고에는 기증된 책들뿐만 아니라 모두 3차례에 걸친 장서기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동량 공으로부터 문파 선생님 대까지 꾸준히 책을 사 모으고 기록이 남은 것이다. 책도 책이지만 이 장서기가 더 대단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경이로움일까?

책들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인쇄의 유형별로 목판본, 석인본, 신연활자본, 금속활자본 등이 있고 탁본과 수묵화도 상당수에 이른다. 책들은 외국에서도 다량 구입하였기에 우리나라 본을 비롯하여 중국본, 일본본도 다양하게 모아져 있다. 내용도 매우 다양하여 고문과 경전, 역사서, 법전, 전기, 의학, 천문, 지리, 소설, 시문집과 족보, 필첩, 서간문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런 책 중에는 당대 명사들이 직접 쓰고 엮은 책들이 무수히 많다. 2012년에 제1회 경주 최부자 학술 심포지엄이 경주 힐튼호텔에서 열렸는데 이때 발표한 한국학 중앙연구원 옥영정박사의 논문이 이를 잘 말해 준다.

↑↑ 문파문고에서 따로 전시된 귀한 책들

최염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서책을 도서관에 기증하고 난 뒤에 이들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서책들은 통풍이 잘 되는 최부자댁 사랑채나 향교 육영재, 사마소 병촉헌 등 한옥에 들어 있어서 오래되어도 책이 상하지 않았고 분실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대구대학에 기증되고 난 뒤에는 콘크리트나 유리 등으로 꽉 막힌 서고에 보관되면서 책이 푸석푸석해지기 시작했고 교수들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고는 몰래 가져가거나 가져가서는 돌려주지 않는 일들이 잦아 분실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최염 선생님은 1970년에 최부자댁에서 일어났던 큰불을 떠올리시며 ‘그래도 도서관에 기증하기를 잘 했다’고 긍정적으로 여기셨다. 그 큰불에 최부자댁 사랑채가 다 타버렸는데 책들은 그 이전에 이미 도서관에 기증되었기에 다수가 보관된 것이라 믿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화마로 최부자댁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내벽에 당대의 화가들이 그린 벽화들이 모두 타버렸고 의친왕 이강 공이 직접 할아버지의 호를 써준 현판도 타버렸다. 과객맞이에 소홀함이 없어서 경주를 내방하는 각 시대의 명사들이 대부분 최부자댁에 머물렀고 이들이 남긴 서화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진귀한 가보들이 사랑채와 함께 사라졌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