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손(祖孫) 간 열행과 눈먼 아버지 눈뜨게 한 효자 이야기

남편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 베어 낸 열부
장원급제로 아버지 눈 뜨게 한 효자 최공

이상욱 기자 / 2024년 0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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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동 야척마을에 들어서면 보이는 열부유인충주지씨·영산신씨 양세정려각 전경.


조손(祖孫) 간의 남편에 대한 열행 전해 내려와

-열부유인충주지씨·영산신씨 양세정려각(烈婦孺人忠州池氏·靈山辛氏 兩世旌閭閣)
경주시 충효동 문화중·고교를 지나 야척마을로 들어서면 왕복 2차선 도로 왼쪽에 아담한 한옥 목조 건물의 비각이 있다.

이 비각 내에는 열부유인충주지씨(烈婦孺人忠州池氏)와 열부유인영산신씨(烈婦孺人靈山辛氏)조손 간의 비석 2기가 자리하고 있다.

왼쪽 비는 열부유인지씨정려각(烈婦孺人池氏旌閭閣), 오른쪽 비는 열부유인신씨정려비(烈婦孺人辛氏旌閭碑)라는 비문을 새겨 이들의 효행을 전하고 있다.


-열부유인지씨정려각
열부유인지씨정려각의 주인공인 지씨 부인은 지석절(池錫浙)의 딸로 태어나 평해(平海) 황치술(黃致述)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삼종(三從)의 도를 지키면서 치밀하게 계획해 밤마다 길쌈을 하며 재산을 모았다. 또 진심으로 남편을 내조하며 착한 배필이 되어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살았다.

황씨 집안은 평해고족(平海 古族)으로 대대로 상조(上祖)는 봉군(封君) 받고, 중조(中祖)는 조관(朝官)으로 좋은 가실(家室)을 이뤘다.

중년에 들면서 액이 있어 남편이 병이 들었다. 지씨 부인은 남편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 간절하니 산도 가히 뚫고 돌도 가히 통하는 법, 정신이 일도에 무엇이 구애되랴.

이 비의 비문에는 지씨 부인은 남편을 위해 ‘흰 칼날 들이대어 자신의 허벅다리 살점을 베어내고, 좌우의 다리를 한번 베고 두 번 벤다’고 기록했다. 이어 ‘선혈이 흘러내려 선약같이 떨어지니 귀신이 감동하고 천리가 도운지라 남편은 부인 정성 의뢰하고, 부인은 열녀되니 저 하늘 크게 밝아 그 절개 감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부인의 정성에도 남편은 1934년 사별했다. 부인은 손수 옷을 지어 여한 없이 남편을 보냈다. 그후 1971년 지씨 부인도 남편 따라 죽으니 살아서는 한 집이요,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안장됐다.


↑↑ △비각 내 왼쪽은 열부유인지씨정려각(烈婦孺人池氏旌閭閣), 오른쪽은 열부유인신씨정려비(烈婦孺人辛氏旌閭碑)다.

-열부유인신씨정려비
열부유인신씨는 지씨 부인의 손자 며느리다.
신씨 부인은 승지(承旨) 신상동(辛尙憧)의 후손인 덕술(德述)의 딸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해 어버이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고, 항상 규문(閨門) 안에 거처하며 음식, 길쌈, 바느질 등 부녀자가 할 일을 잘 익혀 한 사람이 능히 백 가지 공부를 다했다고 한다.
또한 단아해 가히 내칙편(內則篇)에 편입될만했다고 전한다.

신씨 부인은 16세 때 평해황씨 가문인 황백운에게 출가했다. 열부 신씨가 들어온 이후부터 황씨 가문은 더욱 복운이 온 집안에 가득해 상하가 휘황하게 빛나니 종친과 인척이 모두 칭찬해 가히 집안의 창성을 기대하게 됐다.

하지만 이 무슨 액운인지 남편이 병이 들어 몇 달이 지
나도록 약효가 무효하고, 마침내는 생명을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신씨 부인은 능히 손가락을 끊어 선혈을 남편 입에 드리우고 기절했던 남편을 되살리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뜻하지 않게도 4일을 연명한 후 마침내 운명하고 말았다.

열부는 실올 같은 한 생명을 따라 죽기를 이미 마음 속에 결정했다. 그리고 손수 남편의 염습과 장례를 마친 후 밤빛을 틈타 스스로 칼을 꺼내 자결을 하려 할 즈음 가족에게 발각됐다.
이어 음식을 전폐하고 이로 인해 병이 되어 백방으로 간호했지만, 시부모를 봉양하는 도리에 어려움이 있는지라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고 느꼈다.

결국 자기가 죽은 후의 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겨 벽에 붙이고 간수를 마시고 남편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순절했다. 당시 나이는 17세였으니 결혼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이 같은 지 씨 할머니와 손부 신 씨의 열행은 東康讀誌差之 2㤠友便(동강독지차지 2열우편) 문헌에 기재됐다.

이후 1989년 5월 높이 186cm, 너비 45cm, 두께 20cm의 비신에 月星 李鍊代(월성 이연대) 씨의 비문을 받아 김형진(金亨鎭) 씨가 새긴 열녀비와 비각을 세워 이들의 열행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 △내남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한 효자성균진사월성최공 정효각 전경.


극진한 효성에 눈먼 어버지 눈 뜨게 해

효자성균진사월성최공지비(孝子成均進士月城崔公之碑)
경주시 내남면 소재 내남초등학교에서 서쪽 200여m 지점 논 뒤편에 말끔히 단장된 한옥 건물의 비각이 있다. 효자성균진사월성최공의 정효비(旌孝碑)다.

효자 최씨는 월성인으로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15세손이다.
그는 아버지가 눈에 병이 들어 앞을 보지 못하자 명의를 찾아 약을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그 정성에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영영 눈이 어둡게 되자 출입을 할 때 손을 잡고 안내하며, 음식을 드실 때는 수저로 떠드리는 등 마음과 몸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 △비각 내에는 최씨의 효행을 기록한 효자성균진사월성최공지비가 세워져 있다.

최씨는 평소에 과거에 급제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해드리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네가 과거에 급제했느냐”하고 물었다. 최씨가 “예. 급제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크게 감격해 일어나는데 두 눈을 갑자기 뜨게 됐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모두 그 효성에 감동해 이뤄진 것이라 했다.
효자 최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이조 때 비각이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 동안 퇴락이 심해 1988년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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