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락 회장님, 우리시대 경주최부자, 하늘의 별이 되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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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별이 되신 고 이정락 회장님.

2014년에 척추 수술을 받았다. 세 번째 받은 수술이라 입원 기간도 길었고 회복도 더디었다. 퇴원하고 나서 재활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럴 때 이정락 회장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박사장, 듣자 하니 척추수술을 했다고! 내가 몸보신 한 번 시켜줄 테니 사양하지 말고 나오게!”

고마운 말씀과 거절할 수 없는 간곡함에 선뜻 말씀을 따랐다.

회장님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더니 경주고도보존회 황병길 국장도 미리 와 있었다. 회장님은 우리를 향해 대뜸 ‘게장 좋아하느냐?’고 물으셨다. 게장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기꺼이 사주십사 말씀드렸다.

회장님은 손수 차를 몰아 번잡한 시내를 빠져나가 교외로 나가셨다. 그런데 길이 이상했다. 게장집인데 이상하게 한적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 내가 크게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양탕!’ 음식점 간판에 이렇게 쓰인 것을 보고 ‘게장’이 아닌 ‘개장’인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 집안에는 희한하게 개고기를 먹으면 반드시 사고가 나는 징크스가 있다. 하여 집안 사람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영양탕은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기까지 와서 그런 내력을 말씀드릴 수 없었다. 이때부터 회장님께 들키지 않으면서 만족스럽게 먹는 시늉을 했다.

다행히 차려져 나온 고기에는 데친 정구지, 즉 부추가 가득했다. 일단 부추를 앞접시에 퍼담은 나는 고기도 두어 점 올렸다. 그런 다음 부지런히 밑반찬과 부추를 먹었다. 틈틈이 내 쪽의 고기를 회장님과 황국장 앞으로 밀어두는 센스도 발휘해 가면서...!

그런 상황을 모르시는 회장님은 “오늘 따라 고기가 많네!” 하시면서 식당 사장님을 불러 팁까지 넉넉히 주셨다. 이렇게 ‘스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내 고기 먹는 시늉이 얼마나 완벽했던지 황 국장조차 끝내 눈치채지 못 했다. 회장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그때의 감동이 가장 먼저 밀려오며 왈칵 눈물이 났다.


법경회, 경주고도보존회 등 손수 만들고 혼신 다해 후배들 이끌어, 국내외 답사, 다양한 고도보존정책에 크게 기여!

이정락 회장님은 경주 출향인사들 중 단연 으뜸인 분이시다. 재경경주향우회와 경주중고서울동창회 경주 출신 법조인모임인 법경회와 경주고도보존회 등을 손수 만드시고 직접 총무와 회장까지 맡으시며 출향인들을 하나로 묶고 당신 스스로 함께 발전하는 발판이자 방패가 되어주셨다.

법조인으로서는 서울형사법원장을 지내셨고 변호사로서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맡아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법으로 보호해주셨다.

무엇보다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2005년에 ‘경주고도보존회’를 만드시고 혼신을 다해 이 회를 이끄셨다.

나는 바로 이 경주고도보존회에서 회장님을 뵈었다. 경주중고등학교서울동창회 간사 겸 동창회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할 때 동창회보에 교토와 경주를 비교한 여행기를 올렸는데 그 글을 보신 회장님이 경주고도보존회 첫 해외답사로 교토를 떠올리고 여행사를 경영하던 나를 불러 답사를 맡기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이 향토학교(뒤에 박물관학교)를 다녔던 나는 회장님 뜻을 받들어 고도보존회의 가치에 맞는 교토 여행을 기획했음은 물론 나 자신 함께 경주고도보존회에 참여하게 해주십사는 청을 드렸다. 이런 인연으로 뒤에 경주고도보존회 회보를 만들기도 했다. 회장님 추천으로 경주의 주간신문인 서라벌신문 서울취재본부장을 맡아 만 7년 동안 봉사하기도 했다.

회장님은 경주를 고도답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세계의 다양한 고도와 관광지를 답사하며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을 미리 예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해마다 세계의 고도를 답사하는데 진심을 쏟으셨다. 덕분에 경주고도보존회는 해마다 정기 해외답사를 통해 고도보존과 관광지 발전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때 일본의 교토와 나라 아스카무라를 첫 여행지로 다녀온 고도보존회는 유명 온천 휴양지 유후인, 중국의 항주와 소주, 서안, 곡부와 맹부, 북경을 각각 따로 다녀왔고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씨엠립,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히바, 베트남의 후에와 다낭을 직접 모시고 다녀왔다. 내가 직접 모시지 못 했지만 중국 운남성 차마고도와 튀르키에 이스탄불을 비롯한 고도들도 다녀왔다.

이들 답사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반드시 답사에 대한 평가회를 했다는 것이다. 이 평가회는 참석자 전원이 똑같은 자격으로 자신의 느낀 바를 토로하는데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밝히도록 배려되었다. 그로 인해 어른들의 시각이 아닌 어린이와 학생의 시각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명품 평가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런 평가들은 따로 고도보존회 자료집이나 회보로 기록되어 경주시나 시민단체, 주요 정책기관에도 보내졌다.

회장님과 경주고도보존회는 해외뿐 아니라 경주답사와 경주에 대한 각종 포럼에도 열심이었다. 매년 경주에서 중요한 유적지와 새로운 관광지를 답사하고 그때마다 경주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다.

경주시가 당면한 중요한 현안에 대해서도 해당 부분 전문가와 시당국자, 고도보존회 인사들로 구성된 평가회를 열어 발전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찾도록 도왔다.

회장님은 부여, 공주, 익산 등 국내 다른 지역 고도도 경주와 함께 발전해야 할 매우 중요한 고도로 여기고 답사하고 교류하는 것을 중히 여기셨다. 또 우리나라 고도 보존과 경제 발전 관광문화의 총아로서 서울과 인근 수도권을 답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정기적으로 답사했다. 경복궁과 숙정문, 인사동과 북촌, 송파 고구려 고분, 암사동 선사 유적지, 남양주 수종사, 하남 교산지구 등 많은 곳을 방문하며 조금이라도 나은 안목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셨다.

지금 경주를 위한 특별법에 ‘신라왕경 특별법’이 있지만 그 법안의 기초는 ‘고도보존 및 발전에 대한 특별법’이었고 그 기초는 다시 ‘고도보존특별법’이었다.

이 특별법은 경주고보존회의 상임이사들이 대거 참여해 만들었지만 결국 통과되지 않았던 ‘경주 세계역사문화도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상당 부분 참고했다. 이 역시 이정락 회장님의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위에서 나열한 꾸준한 실천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극한 부부애의 모범, ‘선배들의 골수까지 짜 먹어라’ 격려하며 당신 스스로 골수 내어줘!

회장님은 많은 부분에서 후배들의 모범이 되신 분이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단연 부부간의 사랑과 예우였다. 이것은 회장님 세대의 다른 선배님들께는 찾아 보기 어려운 정말 특별한 모습이었다. 회장님은 경주고도보존회 전체 답사나 모임에 꼭 사모님과 동행하셨다. 그 이유가 고향사랑을 사모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진심과 추진력이 금방 떨어진다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사모님 역시 회장님의 이 마음에 기꺼이 공감하시고 거의 모든 답사와 행사에 꼭 함께 참여하시며 회원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셨다. 고도보존회 회원들도 이런 회장님의 본을 받아 부부 동반에 참여하기를 즐겼다. 회장님의 장례식에 고도보존회 회원들과 부인들이 함께 조문하는 모습이 눈에 띈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회장님은 웃음을 중요히 여기고 늘 실천하신 분이기도 했다. 어떤 말씀을 하시건 그에 합당한 유머를 붙여 말씀하시기를 즐기셨고 그게 특별한 자애로움으로 느껴졌다. 노마지로(老馬知路)-늙은 말이 길을 안다는 고사성어는 회장님이 선배들을 예우하는 동시에 나이 드신 당신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어디서나 당신을 기꺼이 늙은 말로 소개하며 후배들을 웃음으로 격려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일까? 회장님은 젊은 시절에는 선배들의 경륜과 지혜를 경청하고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경주고도보존회가 처음 출범할 때부터 한마음으로 참여하셨던 김수학 전 국세청장님, 권오찬 전 경주고 교장님, 김해석 시인님, 이영만 전 체신청장님..., 이런 분들에 대한 마음 가득한 예우는 후배들의 절대 모범이었다. 내가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를 낸 후에는 경주최부자 종손이신 최염 선생님을 일부러 모시면서 나를 함께 불러 격려해 주셨다. 이때 ‘선배들의 골수까지 짜 먹어라’는 감동적인 말씀을 내려주셨다. 그 말씀은 이정락 회장님 자신의 골수도 기꺼이 후배들에게 내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 골수를 짜 먹은 후배들이 또다시 경주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제2, 제3...의 이정락’으로 남을 것이다.

회장님 변호사 사무실에 늘 걸려 있었던 액자가 하나 있었다. 경주최부자 정신인 ‘육연(六然)을 써놓은 액자였다. 회장님은 그 육연을 몸소 실천하신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주최부자이셨다. 그러나 자처초연(自處超然)-혼자 있을 때 초연하라는 가르침은 끝내 실천하지 못하셨다. 회장님 주위에는 언제나 회장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기에 혼자 계실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장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사실은 떠나지 않으셨다. 많은 후배들의 가슴에 회장님의 밝은 웃음과 언제나 경주를 아끼셨던 마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장님을 추모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회장님은 오래도록 살아계실 것이다.


박근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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