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 가보2-인촌이 탐낸 신라시대 최고의 사랑채 수조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9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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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댁 큰 사랑채 앞에 놓여 있는 석조 수조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 본가를 비롯, 교촌의 오래된 한옥들은 그 자체로 문화사적 보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최부자댁은 교촌의 정신적 지주인 곳이기에 눈여겨 볼 곳이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 방문객들이 최부자댁을 들리면서도 정작 소홀히 여기고 지나치는 보물이 있다. 그게 지금 이야기하려는 ‘수조(水槽)’다.

누구보다 최부자댁을 자주 들런 내가 최부자댁 사랑채에 놓여 있는 수조에 관심을 가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나는 어릴 때부터 경주 일대의 유적을 샅샅이 공부하고 다닌 사람으로 그 수조가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최염 선생님께 그 수조의 출처를 여쭈어보자 선생님 얼굴에 반가운 표정이 떠올랐다. 선생님 표정만으로 이 수조에 사연이 많겠구나 싶어 가슴이 뛰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독자들은 이 연재 34회에서 썼던 ‘경옥고’ 편을 떠올려 주시기 바란다. 그 경옥고를 당시 반월성 안에 있던 인왕서당에서 달였는데 문파 선생님께서 인왕서당을 매입한 이유가 비단 경옥고 때문만이 아니라고 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인왕서당을 사들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서당운영이 힘들었던 것을 문파선생님이 사들여 운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 서당은 조용하고 시원해서 글공부하기에는 좋았을지 모르나 사방이 높은 성으로 싸여 있어 쉽게 오고 갈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그러니 학동들이 차츰 줄어들었고 그와 함께 서당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문파 선생님은 이곳을 사들여 서당을 서당답게 운영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 경옥고를 고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라 여겨 최부자댁에서 달이던 경옥고를 거기서 달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하게 여긴 이유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그 서당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신라시대 석재 수조였다. 우연히 인왕서당에서 수조를 발견한 문파 선생님은 한눈에 그게 보통 유물이 아니란 것을 알고 그 보물이 훼손되거나 없어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수조에 대한 소문이 나면 엉뚱한 곳으로 유출될 것을 고려, 함구하고 서당에 대한 매매를 서둘렀다. 

특히 이 시기에 우리나라 귀중한 석재 유물들이 대거 일본으로 밀반출 되던 시기여서 문파 선생님이 유독 신경을 쓴 면도 없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일본인들은 가장 먼저 우리나라 전역에서 많은 미술품들과 유물들을 긁어모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식민지 초기 그중에서도 단연 인기가 높았던 것이 석물들이었다. 일본이 식민지 정책으로 한창 경제력이 높아지면서 권세와 부귀가 있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정원을 꾸미면서 진귀한 석물들에 대한 소비가 급등했다.

때문에 일본 골동품 장사들은 우리나라 전역의 절이나 절터, 양반가 등을 돌아다니며 석탑이나 석등, 석재 유물들을 싼값으로 사모아 일본으로 가져가거나 숫제 유물들을 훔쳐서 내보내기도 했다. 그런 시기에 우연하게 절간이나 다름없는 서당에서 눈에 띄는 석조 수조를 발견했으니 문파 선생님도 이것을 허투루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서당과 경옥고를 핑계 삼아 그 집을 사셨지만 어찌 보면 그 서당을 산 첫 번째 계기는 석재 수조에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집을 샀으니 그 안에 딸린 여러 가지 동산(動産)은 자연히 할아버지 차지가 되었고 그 수조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지요!”

문파 선생님이 이런 안목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선생님이 직접 ‘경주고적보존회’라는 민간단체를 만들고 회장을 맡으면서 경주 일원에 대한 유적과 유물 공부를 각별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그 서당을 살 때 원래 문파 선생님 성품대로라면 마땅히 수조값을 치르고 샀을 테지만 혹시라도 매매 도중에 수조에 대한 소문이 나 엉뚱한 곳으로 유출될 것을 고려한 선생님은 수조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서당에 대한 매매를 먼저 서둘렀다.

다만 원래 제시된 서당 가격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서당을 구입했는데 이 역시 그만큼 수조를 아꼈기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그 수조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던지 인왕서당을 사자마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그 수조를 집으로 날라 오셨어요. 그러나 수조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보통의 소달구지로는 바퀴가 견뎌내지 못했어. 수소문 끝에 바퀴에 쇠를 감은 큰 소달구지를 구해서 싣고 와야 했어요. 그러나 워낙 무거운 탓에 그 소달구지마저 견디기 어려워서 목도하는 사람 7~8명을 달구지 곁에 붙여서 숫제 함께 들어 올리다시피 하면서 운반해 와야 했지요. 막상 수조를 집 앞까지 옮겨놓고 보니 이번에는 대문 안으로 소달구지가 들어올 수 없어서 수십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다시 목도한 끝에 겨우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었어요!”

‘목도’란 옮길 물건이 무거울 때 사람들이 밧줄로 그 물건을 두르고 그 밧줄을 굵은 통나무에 건 후 여러 사람이 어깨에 통나무를 짊어져 나르는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공들여 옮지 수조는 그 후 여러 가지 검증 결과 신라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다른 수조들이 대부분 사각의 장방형인데 비해 이 수조는 그 모서리가 타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이런 형태로는 유일한 것으로 판명되어 매우 귀중한 석재 유물로 인증되었다. 지금도 이 수조는 영남대학에 기증된 최부자댁에 안전하게 놓여 있다. 영남대학에서 이 수조를 옮겨가지 않아 지금껏 최부자댁에 보존되고 있는 것이 다행할 뿐이다.



“할아버지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대학을 세울 생각을 하셨고 세운 학교에 이 수조를 옮겨둘 생각이셨지요!”

그런데 이 수조를 유난히 탐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다름 아닌 지금의 고려대학교, 당시의 보성전문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1891-1955) 선생이었다. 인촌은 보성전문을 인수한 후 몇 번이나 학교 박물관에 기증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인촌 선생과 유독 친했던 문파 선생님이 끝내 기증하지 않았을 만큼 아끼는 보물이기도 했다.

국보급 석조 수조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가 있으면 모양도 좋고 의미도 있을 것이지만 문파 선생님이 끝까지 이 수조를 기증하지 않은 이유도 따로 있다. 문파 선생님은 3.1운동 전, 손병희 선생이 운영하던 보성전문을 인수해 달라고 제안 받았을 때 백산무역주식회사 준비로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신 인촌을 추천하여 학교를 인수하고 운영하도록 주선했다.

“할아버지는 그 일을 두고 두고 아쉬워 하셨지요. 그때부터 할아버지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대학을 세울 생각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대학을 세우면 이 학교에 이 수조를 옮겨둘 생각이셨지요!”

그래서였을까 문파 선생님은 인촌을 도와 보성전문 이사로도 참여하면서 많은 기부를 했고 1921년에 김성수 선생이 동아일보를 창립했을 때 창립발기인으로도 참여했지만 끝내 이 수조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문파 선생님은 당신의 소원인 대학설립을 이루었는데 어떻게 이 수조가 아직도 최부자댁에 놓여 있는 것일까?

“나도 그게 의문이라...! 할아버지께서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설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증하지 않고 사랑채 앞뜰에 놓아두셨거든요. 지금도 가끔 할아버지가 왜 이 수조를 그토록 아끼셨을까 생각해 보곤 하는데 아직도 정확하게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있어요”

최염 선생님 말씀에 내가 이런 상상의 해설을 하면서 내 의견을 말씀드려 보았다. 물론 어설픈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회장님, 이 수조는 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다시 대한민국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조와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풍상을 견뎌온 석물이잖습니까? 문파 선생님께서 이 수조를 보시며 당신의 마음을 단단히 하고 스스로 흔들리지 않겠다는 표상으로 삼지 않으셨을까요?”

최염 선생님은 내 생각에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셨다. 선생님도 수조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보았다며 흔연히 공감하신 것이다.

참고로 최부자댁에는 이 수조 뿐 아니라 사각의 수조가 하나 더 있다. 이 역시 신라시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으로 최부자댁을 찾는 분들은 이 석조 수조들에도 관심 가져 보기를 바란다.

뒤에 나는 분당의 최염 선생님 댁에 들러 이 수조 이외에 선생님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나전칠기 장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근대의 작품처럼 휘황한 문양들을 넣지는 않았지만 정교한 나전 조각들이 박힌 칠기 장롱이었다. 그 장롱이 다른 곳도 아닌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윗대 조상님들 때부터 쓰시던 것이라 새삼스럽게 눈여겨 보았다. 이 외에도 조상님들이 갓을 보관하던 큰 갓집도 직접 보았고 또 조상님들이 사용하시던 오래된 낙관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다른 귀한 물품들은 없다는 것이 최염 선생님의 고백이었다. 최부자댁 조상님들은 반드시 필요한 물건 이외에 사치스런 물건들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모양인지 일반의 생각보다는 가보랄 것이 적은 듯싶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지금보다 50년 이전의 반월성을 기억하고 있다. 내 기억에 인왕서당은 없지만 그 반월성에서 석조 수조를 옮겨오던 문파 선생님과 바퀴에 쇠를 입힌 소달구지, 목도질에 매달렸을 인부들을 상상하면 숙연해진다. 이 무거운 수조를 옮겨오면서 내심 뿌듯하고 다행으로 여기셨을 문파 선생님의 마음도 떠올려 본다. 일본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영남대학교나 고려대학교에 있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수조를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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