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잣집 가보1-이병철 회장에게 전한 단계석 벼루의 뜻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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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가 남령 최병익 선생이 소장중인 최상품의 단계석 벼루.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을 취재하면서 많은 의미 있는 의문들을 품게 되었다.

그 반면 굉장히 현실적인 물음도 생겼는데 그게 바로 최부자댁에는 어떤 값진 보물들이 전해져 내려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부자가 된 최국선 공부터 따져도 300년 넘게 부를 이어온 집안이니 남들보다 훨씬 눈에 띄는 가보(家寶)가 전해져 내려 올 것이란 추측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런 물음을 최염 선생님께 여쭈어보자 선생님도 매우 재미있는 질문이라며 웃으셨다.

그렇게 반기시는 것과 달리 선생님의 안색은 금방 어두워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질문과 관련해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때부터 며칠에 걸쳐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실로 가슴 뜨겁고 웅장한 이야기들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최부자댁, 다시 말해 최염 선생님께 내려온 최부자댁에는 특별히 진귀하거나 값나가는 물건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최부자댁을 떠난 보물들은 가히 기록적이다. 그중에서도 최염 선생님이 직접 확인하고 다른 이에게 전달한 가보가 한 점 있어 우선 이 이야기부터 들려드리기로 하겠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단계석 벼루’에 대한 이야기다.

‘벼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문방사우(文房四友)라는 말일 것이다. 붓, 먹, 종이, 벼루를 통칭하여 부르는 이 문방사우 중에서 선비들이 가장 아낀 것이 있다면 단연 벼루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물품들은 소비성 제품이지만 벼루는 석재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한 번 장만하면 오래가는 ‘문방사우의 대장’ 역이다. 때문에 반가(班家)라면 한두 점쯤은 대물림하며 가보로 보존할 수 있었기에 그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골동품을 가지고 있어도 벼루가 없다면 ‘대문 없는 집’이라고 할 만큼 벼루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긴다.



“벼루는 5관이나 되는 문양을 잘 살린 단계연이었고 벼루집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파서 합으로 만든 최고의 명품이었지요”

벼루는 돌을 깎고 갈아서 만들지만 벼루용 석재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치는 것이 중국 광동성(廣東省) 단주(端州)에서 생산되는 단계석(端溪石)이다. 이 단계석이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재에 비해 좋은 것은 무엇보다 돌 자체에 아름다운 문양이 스며 있어서이다. 이 자연상태의 문양을 단계석을 다루는 장인은 최고로 돋보이게 깎고 갈아 그 벼루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단계석이 벼루 만들기에 적합한 또 다른 이유는 재질이 단단하여 수분 흡수력이 낮은 반면 입자가 고르고 조밀해 벼루를 다듬을 때 정이나 조각도가 움직이는 대로 조각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단계석은 흑색, 청색, 녹색, 자주색, 갈색 등 여러 가지 색을 띠고 있는데 그 중 자주색, 자갈색 나는 재료를 최상급 단계석으로 친다고 한다. 이 단계석 벼루는 다른 지방에서 나는 벼루와 차별되어 이름난 학자 문인들이라면 응당 단계석 벼루 한 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그런 단계석 벼루 중에서도 우리 집의 단계연은 특별했어요. 우선 무게가 자그마치 5관이나 되었으니 다른 벼루에 비해 단연 큰 벼루였지요. 내가 기억하기로 가로가 약 35센티에 세로가 50센티, 두께가 5센티쯤 되었지요”

요즘 단위로 1관은 3.75kg다. 5관이면 자그마치 19킬로다. 게다가 세로로 무려 50센티라니, 이런 큰 벼루는 어지간한 반가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큰 벼루다.

“이렇게 큰 벼루가 품격도 아주 높았어요. 특별히 조각을 하지는 않은 대신 벼루에 스며든 원래의 문양이 마치 고사리가 뒤엉켜 있듯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한눈에 보기에도 최상품의 단계석을 최고의 장인이 다듬은 것임을 알 수 있었어요!”

보통 벼루를 논할 때는 질(質), 품(品), 공(工), 명(銘), 식(飾)이라고 해서 벼루의 석질과 벼루 재질 자체의 무늬, 돌을 다듬어 벼루를 다듬은 수준과 벼루에 새겨진 글씨의 품격, 벼루에 새겨진 문양이나 장식의 수준 등을 함께 보는데 최부자댁 단계석 벼루는 이런 미학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최염 선생님의 회고였다. 그런데 단지 벼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벼루를 보관하는 벼루집이 또 일품이었어요. 5관이나 되는 벼루를 보관하려면 벼루집도 당연히 그에 걸맞게 커야 할 것 아닌가. 더구나 최상의 품격을 자랑하는 벼루였으니 벼루집 역시 그에 합당할 만큼 아름답고 격조가 높아야 했겠죠”

이 벼루집은 특별한 위에 더 특별한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다. 보통 우리나라 목가구의 특징은 못을 쓰지 않고 짜맞추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다하는 벼루집들 역시 대부분 짜맞추기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이 벼루집은 그런 일반적인 기준마저도 넘어서서 아예 오동나무를 통째로 파내어 그 자체로 합을 만든 최고의 명품이었다. 오동나무를 켜고 잘라서 짜맞추려고 해도 그만한 굵기의 나무둥치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인데 이건 숫제 오동나무를 파서 합을 만들고 그 합 자체로 벼루집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장관이었겠는가?

예로부터 양가에서는 아들아이가 태어나면 선산에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고 그 아이가 늙어 죽으면 아이 때 심었던 나무를 베어 관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반면 딸아이가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어 그 아이가 커서 시집갈 때 그 오동나무를 베어 장롱을 만들어 보냈다고 할 만큼 오동나무를 중히 여겼다. 오동나무가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은 이유는 목질이 가볍고 단단하며 켰을 때 문양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오동나무의 특성상 거목을 만나기 어렵고 최부자댁 단계석 벼루 정도를 담을 만큼 큰 오동나무를 찾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니 그 벼루집이 가지고 있는 품격과 가치를 쉽게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자꾸만 대가를 지불하려 하자 학교만 잘 키워달라는 뜻에서 이 벼루까지 선물했어요!”

그러나 이 단계연과 벼루집은 1964년 여름 이후 최부자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문파 선생님께서 이 벼루를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선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벼루를 선물한 이유가 웅대하다. 문파 선생님께서 이병철 삼성회장에게 대구대 운영권을 넘겨준 후 이병철 회장이 할아버지께 자꾸만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려 하자 ‘대가는 필요 없으니 학교만 잘 키워 달라’는 단호한 의미로 거꾸로 이 단계석 벼루까지 선물한 것이었다. 다시 최염 선생님의 회고!

“그 벼루는 내가 직접 보자기에 싸서 할아버지와 함께 경주 우리집에서 서울의 삼성본관 이병철 회장 집무실까지 옮겨 갔고 할아버지께서 손수 보자기를 끌러 이병철 회장에게 주셨지요. 이병철 회장은 목조가구나 목각골동품에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유명한데 당시 벼루보다 벼루집을 더 꼼꼼히 살펴보며 한 10여 분 동안 눈을 떼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명품 벼루를 받은 이병철 회장이 반가와 환호라도 할 줄 알았던 예상이 뜻밖에도 매우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최염 선생님 기억에 더욱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것은 대구대를 문자 그대로 사심 없이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으로 키우라는 무언의 거대하고 진실된 압박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벼루가 삼성 관련 박물관이나 이런 곳에 전시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그토록 아름다운 벼루라면 응당 국보나 보물처럼 다루어도 손색없었을 성 싶은데요!”

내 질문에 최염 선생님은 씁쓸히 웃으셨다. 안타깝게도 최염 선생님 자신도 그날 이후 이 벼루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고 삼성에서도 이 벼루를 일절 공개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나누었을 당시가 2017년 초였다. 당시 최염 선생님은 문파 선생님 정신을 되살리고 영남대의 정상화를 위해 법적인 조력을 해주고 있던 최봉태 변호사란 분과 이 벼루와 관련, 삼성에 소송을 제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뒤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얽히며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나는 당시 최염 선생님께 대구대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어가는 시기에 왜 이 벼루라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셨냐는 참 어리석은 질문을 해보았다. 그때 선생님 대답도 처연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할아버지가 이병철 회장에게 준 이후 이 벼루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어요. 아니,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재산을 몽땅 희사하여 설립한 대학도 넘겨주신 할아버지신데 그 손자로서 벼루 하나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최봉태 변호사는 이 벼루를 이병철 회장에게 주었을 때는 학교를 제대로 가꾸고 키워달라는 의미로 주었는데 결국 이병철 회장이 학교를 고스란히 박정희에게 넘겨주었으니 약속 위반이 된 것이고 따라서 벼루를 도로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나는 그 말에 타당함을 느끼면서도 할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기왕에 줘버린 벼루에 대해서 가타부타 시비를 걸 생각이 없었지요”

나는 선생님 대답을 들으며 최부자댁의 후손들의 마음의 크기를 불현듯 깨달았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 재산, 심지어 선산과 살고 있는 집의 땅까지 모두 대구대학 설립에 희사한 문파 선생님의 넓고 깊은 정신세계와 그런 할아버지의 뜻을 지키고자 국보급 보물인 단계석 벼루를 깨끗이 단념했던 최염 선생님의 마음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온 경주최부자의 꿋꿋한 정신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염 선생님은 “이 벼루를 찾을 수 있다면 큰 뜻으로 학교 운영권을 넘겨주시던 할아버지의 숭고한 뜻이 재확인될 것이고 앞으로 영남대가 정상화되면 영남대 내 할아버지께서 기증하신 방대한 서책을 바탕으로 만든 ‘문파문고’에 함께 전시하거나 경주 교촌 우리집에 할아버지 기념관을 지을 때 ‘조상님들 정신을 상징하는 유물’로 적합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쉽게도 최염 선생님께나 문파문고에 아직도 이 단계석 벼루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삼성가는 이 벼루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문파 선생님도 돌아가시고 이병철 회장도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 지났으니 단계석 벼루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 제빛을 발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지나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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