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옛시와 문장으로 찾아가는 백률사

역사와 문화 어우러진 서라벌의 숨결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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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상(觀音像)과 서루(西樓) 소금강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백률사는 암자와 다름없는 작은 절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이외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많다.

백률사가 이차돈의 순교와 신라의 불교 공인과 관련된 절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 옛시와 문장으로 백률사를 찾아가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백률사와의 인연이 깊어 남다르게 여겨지는 곳이다. 어린 날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갔던 최초의 절이기도 해서 할머니와 백률사에 대한 시를 첫 시집에 수록하기도 했다.

↑↑ 백률사로 가는 입구에 자리한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관음상 영험이야기

『삼국유사』 제3권 「탑과 불상」 조에 ‘백률사(栢栗寺)’가 나온다. 관음상의 영험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효소왕 때 국선(國仙: 화랑의 우두머리) 부례랑이 북명(지금의 함흥)에서 말갈족에 잡혀갔고, 그 직후 천존고(天尊庫)에 있던 보물 현금(玄琴)과 만파식적(萬波息笛)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 관음상 앞에서 며칠 동안 기도하자, 불상 뒤에서 부례랑과 안상이 나타났고 탁자에 현금과 만파식적이 제자리로 되돌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모두가 좋아하며 즐거워하였는데 얼마 후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다름아니라 6월 12일에 살별인 혜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는 서쪽에 나타나므로, 천문관리가 아뢰기를 “만파식적과 거문고가 이룬 공적에 대한 작위를 봉하지 않아 이런 불길한 변고가 나타난 것입니다”하므로 이때서야 만파식적의 이름을 높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더니 그제서야 혜성이 사라졌다. 이후에도 백률사 관세음보살상으로 말미암은 이적이 많으나 사연이 너무 복잡하여 쓰지 않는다고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적었을 만큼 관음상에 관한 신이한 일이 많았다.

벡률사 관음상에 대해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의 뛰어난 조각쟁이가 중생사의 불상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보살님이 일찍이 도리천 하늘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에 밟은 발자국이 돌 위에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그 발자국 자취는 ‘관세음보살님이 부례랑을 구원해 돌아올 때의 발자국 흔적’이라 하기도 한다. 절 입구에는 오늘날까지도 자국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백률사에 연관되어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백률사는 이미 신라 때부터 관음성지로 유명했다.

기록상으로 보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관음상의 영험을 통한 사세가 쭉 이어져 왔다. 하지만 너무 유명세를 탔기 때문일까? 관음상은 경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단관음상은 1412년(태종12년) 개경사(開慶寺) 주지 성민의 요청에 의해 이안(移安) 봉안되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전한다. 개경사는 태조 이성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태종 8년에 세워졌는데 건원릉을 지키는 능침사(陵寢寺) 역할을 하는 절이다. 국가 권력이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빼앗아 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근데 이상한 것은 경주를 떠난 관음상은 그곳에 가서는 영험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백률사 중수기(1608년)에 전하고 있다. 경주옥적이 경주를 떠나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처럼 참 희한한 일이다.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의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 양주(현 구리시) 있던 개경사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전단관음상(旃檀觀音像)은 어디로 갔을까? 소재를 파악하고 원래 있던 백률사로 가져오면 그 영험이 되살아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환지본처(還至本處)의 일이야말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전단관음상은 바다를 건너온 귀한 불상임에 틀림없다. ​전단향나무는 인도에서 나는 향나무로 주로 불상을 만드는 목재로 쓰이고 뿌리는 가루로 만들어 향으로 사용한다. 최초의 불상 또한 전단향 나무로 만들어졌다. 초기 불교경전에도 전단향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인도의 잠언시 수바시타에 나오는 「전단향 나무처럼」은 언제나 읽어도 좋다.


부서지면서도/ 도끼 날을 향기롭게 하는/ 전단향나무처럼
나 아닌 것들을 위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험한 날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 험해지지 않는다
뱀들이/ 온몸을 친친 휘감아도 가슴에 독을 품지 않는/ 전단향나무처럼
마음이 맑은 사람은/ 아무리 더러운 세상에서라도/ 그 마음 흐려지지 않는다


↑↑ 백률사 서루 (출처: 불교신문).


옛시와 문장으로 찾아가는 백률사 서루(西樓)

경주시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옛 문사들은 소금강산 백률사 서루에 올라 서라벌을 내려다보며 시를 읊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사진이 2008년 불교신문에 의해 처음 공개되었다. 사진에는 2층 누각과 대웅전 일부 모습이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종각과 요사채 건물이 있다. 경주를 찾은 명사들이 백률사 서루에 올라 찬란했던 서라벌을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는 일이야말로 경주를 찾는 보람이었으리라.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사들이 남긴 아름다운 글을 몇 편 읽어본다.

새벽에 일어나 작은 누각끝/ 발을 걷고 하늘을 바라보네
누각 아래가 바로 계림이어서/ 기괴한 일 헤아릴 수 없네
노거수 자욱한 안개/ 일만호에 비껴 깔리네
흰 구름 동산으로 떠가고/ 푸른 물은 서쪽 포구로 흘러가네.
우뚝한 황금빛 절집 사찰들/ 서로 마주해 아침 햇살에 따스해지네
반월성 안에 빽빽한 숲/ 꽃과 대나무 이제 주인이 없네
공연히 에전 풍류 남아 있어/한 곡조 높은 가락에 춤추네
기억해보니 최유선/ 문장은 중국을 흔들어
포의로 갔다 금의환향하니/ 나이 29세 전이었네
흰 옥에 파리가 점을 찍어/ 당시에 쓰이지 않았네
지금도 남산 안에/ 채소밭 한 뙈기만 남아있네
오래지난 구세손/ 머리 묶고 무리에 썩여있어
불러서 높은 관 씌우니/ 사람들 현자의 후손인 줄 아네
또 설선생이 있어/ 성대하게 용과 호랑이처럼 겨누었네
방언으로 오경을 강의하니/ 학자들은 동방의 공자로 견주었네.
세상에서 두 군자라 불리며/ 이름 나란하니 이두와 한가지네
읊조리며 맑은 바람 쐬니/ 묵은 병도 나을만 하네
오가며 부처를 뵈옵고/ 빈당에서 향불 하나 피우고서
머리 조아려서 우리 임금/ 만년의 천복을 받끼만 축원하네
-이하생략


몽고침입으로 황룡사도 불에 탔지만 그래도 많은 건물들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전망 좋은 서루에 올라 경주를 내려다보며 열에 아홉은 금빛 사찰이라 지나는 객들은 구경하기 바쁘다는 표현과 뒤이어 큰 저택 구슬로 된 궁궐이 돌밭으로 변했네 라는 표현이 교대로 나온다. 파괴된 것과 파괴되지 않은 것들이 혼재된 도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온전한 전성기의 서라벌 모습은 얼마나 장대하고 아름다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4세기 고려 말 인물인 전사경(全思敬)은 『서루기」에서 계림에 있는 누각중 백률사의 누각이 가장 훌륭하다고 했다. 서라벌을 조망하는 최고의 위치로 백률사를 꼽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도 경주 남산 용장사에 거주하면서 경주의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니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백률사에 관한 시가 2편 있다. 「백률사 옥판 스님」이라는 시는 백률사를 드나들며 스님들과 교류하고 소통한 것을 알 수 있는 시이다. 「백률사 누각에 올라가 바라보면서」는 다음과 같다.

느릅나무 높고 낮게 흰 안개를 뿜는데/ 인가와 절집이 이웃하여 잇대 있구나.
물소리 서쪽으로 거슬러 시조(市朝)가 변하였고/ 산 형세는 북쪽이 낮아 문물을 옮겼다네.

석탈해 사당 가에 속절없이 달만 있고/ 경애왕의 능가에는 저절로 밭이 없다.
유유한 성패가 모두 이와 같으니/ 진(秦)나라 앞서 주(周)나라는 8백 년이었다네.

정지상, 박효수, 전사경 그리고 김시습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공히 백률사 서루에서 내려다 본 서라벌의 감회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백률사 돌계간을 올라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는 백률사에서 시내 조망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처럼 명소가 될 수도 있는 백률사 서루 복원은 요원한 일일까?

↑↑ 이차돈 순교비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많은 백률사 유물들

백률사의 서루는 허물어졌고 관음상도 경주를 떠나있다. 이외에도 백률사의 귀중한 유물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보관 전시되고 있다. 백률사 법당의 금동약사여래불은 높이가 179㎝ 입상으로 통일신대 최대 크기 불상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1930년대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로 불린다.

↑↑ 백률사 금동약사여래불(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이곳에서 발견된 이차돈 순교비도 백률사 석당기(栢律寺石幢記), 이차돈 공양비로 불리기도 한다. 높이 104㎝, 너비 29㎝ 6면으로 만들어졌으며, 6면인 것은 육바라밀을 뜻한다. 화강암 육각기둥 가운데 다섯면은 명문이, 나머지 한면은 이차돈 순교장면이 양각되어 있다. 

제1면에는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떨어지고, 목에서는 흰 피가 수십장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송이가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여 왕과 신하들이 마침내 불교를 공인했다”라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이차돈 사후 290여년 흐른 뒤인 817년 이 비를 만들었다고 『삼국유사』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 편에 전한다. 염촉은 이차돈의 본이름이다. 글씨는 김생이 썼다고 한다.

경내에는 자연암벽에 7층탑이 음각되어 있으나 도움없이 찾아 보기는 쉽지 않다. 대웅전 앞에 탑 세울자리가 없어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앞서 말한 영험한 부처님 발자국도 절 입구에서 살펴볼 수 있다.

↑↑ 20세기 초 발견 당시 ‘이차돈순교비’ 모습. (제공: 문화재청).

절 계단 오르기 전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하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에는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서쪽 아미타불, 동쪽 약사여래불, 북쪽 미륵불, 남쪽 석가모니불을 새긴 사방불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할 때 땅속에서 염불소리에 들려와 파보니 큰 돌이 나왔고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어 그곳에 절을 세웠는데 굴불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2022년 태풍 힌남노 때 큰 피해를 입고 자칫하면 다시 땅속으로 들어갈 뻔 했지만 다행히 최근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청마는 이곳에서 「사면불」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백률사 뒷편 소금강산 정상 부근에는 동천동 마애삼존불이 있다. 이른 새벽 운동삼아 오르면 누군가 늘 빗자루로 깨끗히 쓸어 놓고 있다. 비질 덕분에 정갈한 마음으로 희미해져가는 마애불 앞에 두손 모으게 한다. 어느 분일까 궁금도 하다. 빗자루질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마음 아닐까.

그리고 소금강산 정상 근처에는 십년 가까이 매일 올라와 솔방울 달력을 만들어 날짜를 알려주는 분이 계신다. 퇴직 교장선생님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와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올라오는 마음 또한 부처님 마음이 아닐까. 세상 구석구석에는 드러나지 않게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참 많다.

소금강산 너머 마을 이름이 부처가 많다는 뜻의 다불(多佛) 마을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 청년이 큰 뜻을 위해 목숨을 바꾸었듯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에서는 모두가 부처이다.



 











전인식 시인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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