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야만스럽게 본 존 무초 초대 주미대사의 방문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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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영 작가
“원더풀... 오~ 원더풀... 언빌리버벌...!”

최부자댁 사랑채 마당에 때 아닌 영어 감탄사가 울려 퍼졌다. 생전 처음 보는 파란 눈에 키 큰 미국인은 연신 놀란 얼굴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손뼉을 쳤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낯선 이방인이 더 신기한 듯, 뜻 모를 소리를 지르는 미국인을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당에는 한창 줄타기 광대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존 무초(John Joseph Muccio, 1900년~1989년) 초대 주한미국대사 일행, 그들이 최부자댁을 찾은 것은 존 무초 대사의 황당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최부자댁에 많은 명사들과 고관대작들이 다녀갔지만 해방 이후에는 그 수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이때는 경주에 신식 여관과 좋은 식당들이 생겨서 경주에 여행 오는 사람들도 최부자댁에 묵기보다는 여관으로 가는 것을 편하게 여겼을 때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손님만은 굳이 최부자댁에 머물렀던 이유가 있다.

존 무초 대사는 1949년 4월부터 1952년 9월 8일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그런 그의 방문은 당시 내무부 장관을 하던 신성모 장관의 부탁으로 시작되었다. 신성모 장관이 최부자댁과 인연을 최염 선생님 회고를 통해 들어보자.

↑↑ 존 무초 초대 주한 미국 대사.

“신성모 장관은 3대 내무장관을 지낸 김효석 씨와 함께 독립운동하다가 일본경찰을 피해 친구인 우리 셋째 할아버지 댁에 1년 동안 숨어 있던 분이었지요. 할아버지의 묵인하에 이분들을 숨겨 주었던 셋째 할아버지는 뒤에 당신의 300석 재산 중 무려 100석을 팔아 두 분을 국외로 탈출시켜 준 장본인이시기도 합니다. 이때 할아버지도 100석을 내어 아우의 친구들을 도왔어요”

여기서 셋째 할아버지는 뒤에 상해임시정부 재정부장을 역임한 최완 선생이다. 신성모 장관은 상해를 통해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한때 선장으로 활동하다가 뒤에 이승만 정권에서 탁월한 영어 실력과 영국 생활을 높이 평가 받아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이런 신성모 장관이니 최부자댁에 특별한 부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성모 장관은 왜 존 무초 대사를 최부자댁에 모셔 왔을까? 여기에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존 무초 미국 대사가 초가집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기 저 움막들이 모두 돼지 축사 아닌가요?”

한국에 부임한 존 무초 대사는 한국의 실정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무슨 행사가 있어서 부산에 갔다가 경부선 기차를 타고 신성모 장관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멀리 차창 밖을 내다보던 존 무초 대사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말했다.

“오, 한국에는 축산업이 굉장히 잘 발달 되었나 보군요?”

신 장관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묻느냐고 하니 존 무초 대사가 길 양옆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움막들이 모두 돼지 축사가 아닌가요? 저렇게 많은 돼지 축사가 있는 걸 보고 한국에 축산업이 발달했다고 한 겁니다”

무초 대사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그가 돼지 축사라고 가르친 것은 어이없게도 초가집들이었다. 순간 신 장관은 자존심이 확 상해버렸다. 비록 존 무초 대사가 그 초가집들을 사람 사는 집인 줄 모르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멀쩡한 집들이 돼지우리로 보일 만큼 우리의 시골 풍경이 낙후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신성모 장관은 무초 대사의 이 말에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신 장관은 지금 당장 전승국에 우리를 쥐고 흔드는 나라랍시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듯한 무초 대사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콧대를 꺾어놓고 싶어졌다. 생각 끝에 신 장관은 문파 선생님께 이런 사연을 편지로 알리면서 존 무초 대사를 최부자댁에서 며칠 머무르게 하며 경주 구경을 시켜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신성모 장관과는 각별한 사이인 터에 미국 대사에게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을 알려 달라는 청을 받았으니 문파 선생님이 가만히 계실 리 없었다. 다행히 이때는 최부자댁 재산이 대구대학으로 희사되기 전이라 당당한 부자일 때여서 대사 아니라 누구라도 쉽사리 치를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즉시 허락한 문파 선생님은 그때부터 무초 대사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특별히 준비할 것이 없었다. 잠이야 사랑채를 비워서 재우면 되었고 음식은 이전에 전통적으로 차려 먹던 것을 하나씩 재현해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경주 관광은 정부 외교부와 경주시 관계자들도 동행할 것이니 그쪽에 맡겨 두면 원만하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외교부 직원들이 지적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먼저 신변 보호. 그 무렵 경주에는 좌익들이 많은 시절이어서 무초대사에 대해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대두되었다. 그렇다고 경찰병력을 대거 집 주변에 포진시키려니 이것은 영 모양이 살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우리나라 양반가의 문화를 체험하게 해주려는데 경찰이 집 안팎을 지키는 모습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고 볼썽사납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대구 경찰서 소속 여자 경찰대 요원들을 대거 우리 집 가복으로 가장해서 들여놓는 방법이 동원되었어요. 물론 남자 경찰들도 사복을 입혀서 집 안팎에 배치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세밀한 경호는 여자 경찰대에게 맡긴 겁니다”

여자 경찰들이 미리 와서 가복들과 손발을 맞추고 그에 합당한 훈련(?)을 받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최부자댁에 경주 최초의 좌식 화장실이 만들어졌고 한 트럭 씩의 얼음과 탄산음료가 날라졌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최부자댁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측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의자식 근대 화장실을 사용해온 무초 대사에게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깟 용변을 몇 번이나 본다고 그렇게 야단이냐며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공무원들에게 은근히 불만을 내비치셨어요. 그러나 외무부는 미국대사를 ‘칙사대접’하는데 한 치도 소홀할 수 없는 모양이었지요”

하긴 미국대사라면 조선조 같으면 중국에서 온 황제의 칙사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해방이 되었어도 약소국이 강대국 대사-칙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임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외무부와 경주군 관계자들이 자재와 기술자들을 따로 보내 최부자댁 사랑채에 의자식 화장실을 만드는 것으로 일단락 맺었다. 뒤에 불에 타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이 덕분에 최부자댁 사랑채가 당시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자식 화장실을 갖춘 한옥이 된 셈이었다.

또 한 가지, 외무부에서 문제시 삼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혹시라도 음식들이 상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기우였다. 우리 전통의 여름철 음식 보관 방법은 우물에 담그거나 간을 좀 짜게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게 부족하다고 판단한 공무원들은 대구에 있는 얼음 공장에서 한 트럭분의 얼음을 가지고 와서 창고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쓸 수 있도록 조치했다. 미국인들이 즐겨 마시던 콜라 같은 탄산음료 역시 미리 한 트럭이나 가져와 얼음에 잰 채 창고에 넣어 두었다. 덕분에 최부자댁 가솔들도 탄산음료를 처음으로 마셔보게 되었다.

이렇게 한 후 문파 선생님은 좀 특별한 공연단을 초청하여 여흥을 선보이려 했다. 그때 불러온 공연단이 ‘줄타기 광대’다. 최부자댁 앞마당에는 줄 타는 광대들을 위한 탄탄하고 굵은 동아줄이 설치되었고 그들이 놀 무대를 만들기 위해 넓게 멍석이 깔렸다. 광대 역시 미리 와서 무초대사를 위한 공연을 준비한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한 만큼 무초 대사는 이틀 동안의 경주 나들이를 통해 우리 문화의 정수를 가슴 깊이 체험할 수 있었고 전통적인 우리나라 양반가의 융숭한 손님맞이 예법과 최부자댁 특유의 음식에 깊이 매료되었다. 경주의 유적지들을 찾은 존 무초 대사는 한국이 자신의 생각과 달리 매우 깊은 역사를 가졌고 중국이나 일본 못지않게 멋진 문화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한옥이 주는 평온함 속에서 창호지를 통해서 들려오는 아침 새 소리와 가볍게 스치는 바람소리 들으며 고아한 풍취를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또 최부자댁 법주를 비롯 조선시대 궁중요리의 비전을 간직한 음식들에 대해 연신 원더풀을 연발했다.

앞마당에서 벌어진 광대놀이에 대해서도 무초 대사는 깊은 관심을 드러내 보였다. 서양에서는 텀블링이 있고 장대를 들고 긴 외줄을 타는 공중서커스가 있지만 우리처럼 부채 하나만 들고 자유자재로 줄을 뛰는 모습이 훨씬 신비롭게 여겨졌을 것이다. 맑은 하늘이 마당 가운데 내려와 있었고 존 무초 대사와 문파 선생님을 비롯한 집안의 권속들과 가복들, 예의 분장한 여자 경찰대들과 외무부와 경주군의 공무원들이 빙 둘러앉은 가운데 광대놀이가 펼쳐졌다. 꽹과리, 장고, 징, 북, 태평소와 해금이 어우러진 사물을 비롯한 민속 연주단의 신명나는 연주가 이어졌다. 무초 대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고 그의 손은 연신 박수 치기에 바빴다.

ㅜ따지고 보면 신성모 장관이 존 무초 대사의 오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줄 수도 있었는데 자존심상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굳이 최부자댁까지 무초 대사를 보낸 이유였을 것이다. 다행히 최부자댁과 경주 방문은 외교부와 경주군의 깊은 배려를 통해 존 무초 대사에게 우리나라와 우리 문화를 다시 보게 했고 이후 한미 양국 간 우호와 협력을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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