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살 베어 남편 살린 열부 김씨 일화 전해

슬픔 딛고 시아버지 정성으로 모신 열부도…

이상욱 기자 / 2024년 08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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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 내남면 박달리 괘전마을 입구에 세워진 ‘영일정공시홍지처 열부김해김씨정려비’ 전경.


자신의 살 도려내 남편 살린 열부 이야기, 영일정공시홍지처 열부김해김씨정려비

경주시 내남면 박달리 괘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을 도려낸 열부 이야기가 담긴 비(碑)가 있다.

영일정공시홍지처 열부김해김씨정려비(迎日鄭公時洪之妻 烈婦金海金氏旌閭碑)다.

이 비에는 열부 김해김씨 신기(新基) 부인의 남편에 대한 존경과 희생이 새겨져 오늘날의 교훈으로 전해오고 있다.

김씨 부인은 광무제(고종) 때 판임관 정시홍의 아내다. 김씨 부인은 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정에서 마음 착하게 자랐다. 특히 효심이 강해 착한 어린이라는 말이 이웃을 통해 관청에까지 널리 알려져 주위 모든 사람들이 크게 탄복했다고 한다.

김씨 부인이 17세 되던 해 영일정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이후 시부모님을 정성을 다해 봉양해왔다. 그러던 중 남편이 뜻밖에 당시의 유행병이던 학질에 걸려 몸져 눕게 됐다.

그러자 김씨 부인은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늘과 같은 내 남편의 목숨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허벅다리 깊은 살을 칼로 잘라 푹 달여 먹였다. 남편에게는 학질에 특효약이라고 속이고 자신의 살을 달여 먹게 한 것이다. 그렇게 먹인 것이 효험이 있었고, 남편은 오랜 병석을 털고 일어나게 됐다.

이 같은 소문은 입소문을 타고 이웃으로 번져 관이 알게 됐다. 당시 내남면의 관리(내남면장)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이 같은 훌륭한 효행은 포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감은 자신의 살을 베어 달여 남편에게 보약이라고 먹여 사경을 헤매는 남편을 되살아나게 한 사실을 적은 상소를 조정에 올렸다.

상소를 보게 된 황제는 김씨 부인을 열부로 판정하고, 극진히 치하했다. 광무 8년(1904년)에 나라에서 청동과 고기를 하사했다. 또 교지를 내려 남편인 정시홍을 판임관(判任官, 고종 시절 7품~9품)으로 승진시키고, 열부 김씨는 숙부인(淑夫人)으로 교시했다.


↑↑ 지난 1992년 8월 10일 제막식을 가진 ‘열부김해김씨정려비’.

-고종 정려 후 90여년만에 정려비 세워
이 정려비는 지난 1992년 8월 10일 비가 세워진 이 자리에서 제막식이 열렸다. 당시 김재완 경주군수를 비롯해 군향조사연구회장 김석호 씨 등 1000여명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개최하고, 김씨 부인의 열행을 기리는 추모식도 가졌다고 한다.
정려비가 당시 고종의 열부 판정 이후에도 90여년이 지난 뒤 세워진 이유는 이렇다.

기록에는 김 숙부인이 돌아가신지 4대 100여년이 지나는 동안 대동아전쟁, 10·1폭동, 6·25전쟁과 화재 사건 등 파란곡절을 많아 열부비 건립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다 1987년 경주군 향토사연구회장 김석호 씨가 군사(郡史) 편찬을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차에 광무 5년(1901년) 국왕이 내린 열부정려에 대한
 교지를 발견하면서 비 건립에 원동력을 찾았다.

당시 경주군과 열녀 후손, 향토문화연구회 등은 현 사회상이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윤리도덕이 퇴보할 뿐 아니라 인도에 위배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해 부부간 윤리도덕과 청소년들의 생활지도 자료로서 교훈이 될 것으로 의견을 같이했다. 이에 따라 경주군의 유적보존비 285만원을 지원 받아 3층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5척, 너비 2척의 오석으로 된 정려비를 세우게 됐다고 전한다.

↑↑ 건천읍 화천리 소재 효열부증숙부인월성이씨지비.


남편 잃은 슬픔 딛고 시아버지 정성으로 모신 열부, 효열부증숙부인월성이씨지비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 백석암 입구를 지나 내남면 부지리 방향 200여m 지점 도로 우측에 한옥 구조의 아담한 비각이 나온다.

이 비각 속 비는 남편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서도 시아버지를 위로하고 지극정성으로 모신 효부 이야기가 담긴 효열부증숙부인월성이씨지비(孝烈婦贈淑夫人月城李氏之碑)다.

이씨 부인은 월성인으로 유교인 엄격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품은 곧고 유순하며 하는 일이 자상한데다 예법을 존중하는 부덕(婦德)을 익힌 현숙한 부인이었다.

월성인 최상악(崔尙岳) 씨와 결혼했다. 두 부부는 정성을 모아 늙으신 시아버지를 성의를 다해 봉양해왔다.

그러다 남편이 괴질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씨 부인은 남편의 죽음에 너무나 어이가 없어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소생한 이씨 부인은 자신의 슬픔을 삼킨 채 오히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시아버지의 아픔을 위로했다. 이씨 부인은 시아버지에게 “이미 죽은 사람은 다시 생각하지 마시고 억지로라도 음식을 드시어 저로 하여금 의지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했고, 시아버지를 오랫동안 지성으로 받들어 모셨다.

이 같은 이씨 부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45년 8.15 해방 다음해인 1946년 효열부비(孝烈婦碑)를 세웠다고 전한다.


↑↑ 효열부증숙부인월성이씨지비 비각 내부 모습.

-효자 있는 집안에 효자 난다
이씨 부인의 효행은 이를 보고 배운 아들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효열부 이씨 부인의 아들 최덕수 또한 어머니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아 공부도 열심히 해 종2품에 올랐다. 특히 부모를 모시는 효성은 어머니 못지않게 지극했다. 이 때문에 아들 또한 효자로 이름났다고 전해진다.

1992년 12월 14일자 본지 147호에서 함종혁 선생은 이씨 부인과 아들 최씨에 대한 후기를 덧붙였다. 함 선생은 이씨 부인의 효행에 대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평범한 진리는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다.

‘효자 있는 집안에 효자 나고 열녀 있는 집안에 열녀 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바꿔말하면 핵가족제와 산업사회로 이기주의가 팽배한 요즘 청소년들의 각종 범죄 증가와 탈선행위는 삼강오륜 등 윤리관이 퇴폐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가정이나 사회나 공동책임의식을 갖고 백년대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윤리교육에 치중해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지키며 평화로운 사회건설을 이룩하는데 다 함께 노력해야 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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