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객 중의 상객, 치마양반 경주최부자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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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염 선생님 둘째 누님이 종부로 시집간 서애 종가 충효당의 모습.

↑↑ 박근영 작가
이제 경주최부자댁 과객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일전의 원고에서 최부자댁 손님 중 가장 중요한 손님이 사돈이라는 말을 했다. 최부자댁을 일컬어 부잣집이라는 소리는 많이들 하지만 양반으로서 명문가이냐는 말에는 꼭 토를 다는 사람이 있다. 명문 양반가의 기준이 여럿 있지만 그중 중요한 기준은 뛰어난 학자나 이름난 명신(名臣)을 배출했느냐의 여부이다. 그러나 경주최부자댁에는 바로 이 중요한 벼슬을 산 분이나 학자가 없었다.

그 반면 경주최부자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경주최부자댁을 향해 ‘치마양반’이라 부르는 말을 알고 있다. 치마양반은 양반으로서 매우 불명예스럽게 들릴 수 있다. 치마양반이란 자신의 집에서 벼슬을 내지 못하고 결혼 정책을 통해 사돈을 잘 맺음으로써 그 후광으로 양반행세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부자댁은 대대로 치마양반이라는 말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굳이 그 말에 대해 반박하려 들지 않는다. 최부자댁 나름의 오랜 전통의 결과이기도 할 뿐 아니라 벼슬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아서일 것이다. 특히 최부자댁의 오랜 가훈인 육훈(六訓) 중의 하나를 떠올린다면 벼슬살이에 대한 조상님들의 담백한 심경을 알 수 있다.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이유가 어떠하건 최부자댁은 진사 이상은 더 나가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진사는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 부르는 국가시험에 합격한 유생을 부르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진사시와 생원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사시는 지방에서 치는 향시에 붙은 사람들에 한해 예조에서 관장하는 복시로 최종 합격을 결정짓는다.
 진사시는 사장(辭章), 즉 문장과 논술을 다루는 것을 주 시험과목으로 취급하고 생원시는 경학(經學), 즉 유학의 경전을 다루는 학문을 주 시험과목으로 취급했다. 진사나 생원은 모두 성균관 유생의 자격을 얻은 사람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대과에 응시할 기회를 얻게 된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대과에 급제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벼슬살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댁 조상들은 복시에 합격하고도 굳이 성균관 유생으로 등록하지 않거나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난 뒤에도 곧바로 낙향하여 가업을 이어가는 것으로 만족해 왔다. 진사임을 증명하는 백패(白牌)만 지닌 채 만족하며 살아 온 것이다.

최부자댁 조상님들이 벼슬살이에 초연했던 반면 조선시대 양반사회는 3대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면 양반의 자격이 사라진다고 보는 기준이 있었다. 다만 진사나 생원이 되면 양반으로서 소양을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최부자댁은 꾸준히 진사를 배출했으니 그로써 양반으로서의 명맥을 지킬 수 있었지만 그 정도로 명문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퇴계, 학봉, 서애의 후손, 명문가와 사돈을 맺으며 품격을 유지한 경주최부자

때문에 최부자댁은 다양한 명문가와 혼인을 맺는 것으로 품격을 유지해 왔다. 대표적으로 정무공으로부터 6대 최부자인 최종률(1724~1773) 공은 생원시 급제자로 안동 권씨 가문과 혼인을 맺었다. 안동 권씨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권근 이후 세조~예종대의 권람, 임진왜란의 명장이자 명신인 권율(1537~1599) 등으로 대표되는 명문가다. 7대 최부자 최언경(1743~1804) 공은 의성김씨 가문과 결혼했다.

 의성김씨는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가문이다. 김성일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를 돌며 장병들을 위무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분으로 후대가 더 번창한 가문이다. 8대 최부자 최기영(1768~1834) 공은 진사시에 급세했고 안동의 진성이씨 집안과 결혼했다. 

진성이씨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분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거봉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1502~1571) 선생이다. 이 집안 역시 자손들의 출세가 근래까지 지속되어 왔다. 진사시에 급제한 10대 최만희(1832~1879) 공도 진성이씨 집안과 혼인했다. 역시 진사시에 급제한 11대 최부자 최현식(1854~1928) 공은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선생의 후손과 혼인했다.

문파 선생님 역시 안동을 기반으로 한 풍산 김씨 가문과 혼인했다. 풍산 김씨는 유연당 김대현(1553~1602) 공과 그의 아들들의 벼슬살이로 유명한 집안이다. 8형제 중 5형제가 대과, 3형제는 소과로 모두 급제했고 이후 끊임없이 크고 작은 벼슬을 산 집안이다. 특히 5형제의 벼슬살이를 기려 동네 이름이 오미동 또는 오릉동으로 불리게도 되었다.

이런 혼인 문화는 근현대에도 이어져 최염 선생님 아버지이신 최식 선생은 선조~광해군 대의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강(寒岡) 정구(1543~1620) 선생 후손인 부인과 혼인했다. 성주에서 명문가로 알려진 가문이다. 최염 선생님의 숙부 역시 성주의 명문가로 독립운동으로 이름 높은 한계(韓溪) 이승희(1847~1916) 선생의 후손이다.

최부자댁에 시집 오는 며느리들이 명문가의 여식인 것처럼 최부자댁 여식들도 명문가로 출가했다. 최염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자.

“윗대로는 고모할머니들 중 6대조 고모할머니가 한강 정구 선생의 종부로 가신 것을 필두로 가문의 많은 여식들이 명문가의 며느리로 시집가셨습니다. 5대조 할아버지의 무남독녀가 해저에 있는 의성 김씨 댁에 출가하여 가문을 번창시켰는데 이전에 고려 사이버 대학 총장을 지내고 있는 김중순 씨가 그 증손자이지요!”

최염 선생님의 고모들과 누이분들도 명문가의 종부로 출가하여 그 험하고 어렵다는 ‘종부살이’의 전통을 이었다. 선생님의 큰 누님이신 최희 여사가 동계 정온 선생 종부로 시집가셨고 둘째 누님 최소희 여사는 서예 유성룡 선생의 14대 종부로 가셨다. 특히 유성룡 선생님 종부로 가신 둘째 누님 최소희 여사님은 내가 직접 뵙고 말씀도 나누었기에 그 기억이 더 소중하다. 2015년 10월 30일, 서애 선생 15대 종손 류창해 선생 취임식 당시 최염 선생님과 함께 뵙고 여사님께 최부자댁 비전 법주와 육포를 대접받는 기연을 얻었다.

이런 혼인 관계들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최부자댁이 이렇게 명문가와 혼인관계를 맺을 때, 며느리로 들어오는 입장에서는 풍족한 부잣댁에 시집오니 나쁠 게 없지만 거꾸로 명문가에 시집간 따님들은 그 어려운 종부살이가 힘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최염 선생님께 그로 인해 종부살이 가신 누님들께 어려움은 없었는지 여쭈어보았다.

“아무래도 시집간 딸들은 대체로 우리 집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요. 재산 많은 것을 천하게 여기던 시절, 양반가의 며느리들은 안빈낙도의 허울 속에 팍팍한 삶을 살아야 했어요. 그래서 다른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 딸들의 입장에서 보면 썩 내키지는 않았을 법도 하지. 그러나 집안 간의 중대한 혼사에 딸들의 개인적인 호불호를 따질 여지가 없던 시절이었지요!”



“전국에서 유명한 종부들을 모았는데 우리 집안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치마양반의 위세가 드러났지요!”

그러면서 또 다른 일화 하나를 말씀해 주셨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흥준 교수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던 시기, KBS 방송과 함께 전국의 유명한 집안 종부들을 모아 행사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이때 최염 선생님에게도 연락이 와 사모님을 출연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선생님은 “우리 집안은 종부라고 불릴 처지가 아니다”며 사양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

“종손이니 종부니 하는 명칭들을 만만히 알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아요. 종손 혹은 종부는 큰 벼슬을 하거나 아주 유명한 학자들의 제사를 받드는 직계 후손들에게만 부여하는 아주 귀한 존칭입니다”

종손·종부의 개념이 생긴 것은 우리나라 성리학이 전성기를 이룬 성종 이후, 퇴계니 율곡이니 하는 성현들에서 비롯되었고 그런 성현들에게 불천위(不遷位-후대에 제사를 끊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정한 성현들의 위폐)로 봉하는 사례가 성해지면서부터다. 때문에 보통 종손들은 그 후손의 나이가 많을 경우 14대가 대부분이고 젊을 경우는 세대교체가 되어 15대가 대부분이다. 지금은 16대손도 더러 있지만 이 경우는 정말 젊은 종손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따질 경우 최염 선생님은 최부자댁 정신적 지주인 정무공으로부터 14대 후손이 된다. 그러나 선생님 스스로는 정무공께서 퇴계니 율곡이니 서애니 하는 분들에 비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아 종손이라는 존칭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어디에 가셔서나 당신을 최부자댁 ‘종손’이 아닌 ‘주손(胄孫)’이라 불러 달라고 겸양하셨다. 더구나 최부자댁이 정무공의 손자인 최국선 공으로부터 시작되는 점을 고려해 언제나 정무공 종손을 우선하는 말씀을 들려주시곤 했다. 

당시 KBS 제안에도 이점을 들어 출연을 사양하셨다고 한다. 그러자 KBS 담당자는 최부자댁을 우리나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라 여겨 끝내 출연을 당부했고 더하여 정무공 종부님도 함께 출연하게 되어 최부자댁에서만 두 분의 종부가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반전이 또 생긴다.

“이렇게 전국의 내로라하는 집 종부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 중 단연 주목을 받은 집안이 우리 집안이 되어 버렸어요. 전국의 여러 종부 중 우리 누이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우리와 인척지간인 종부들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지요. 상객 중의 상객, 사돈을 중요시한 치마양반의 위세 아닌 위세가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드러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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