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중·하객과 누구나 퍼갈 수 있는 쌀뒤주와 과메기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7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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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댁 곳간 앞에 전시된 쌀뒤주. 원래 사랑채 뒤쪽에는 누구나 퍼갈 수 있는 쌀 뒤주가 있었고 과메기 두름이 걸려 있었다.

↑↑ 박근영 작가
경주최부자댁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깊은 관심사가 있었다.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는 가훈이 있었는데 이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앞의 장들에서 밝힌 유명한 인사들은 실상 과객(過客),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아니고 매우 귀한 손님, 즉 빈객(賓客)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최부자댁이 행세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빈객맞이에 매우 적합한 명가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과객맞이에 정성을 기울인다고 해도 찾아가는 사람이 최부자댁에 요즘말로 명함이라도 내밀만한 신분이 아니면 선뜻 최부자댁 대문을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최부자댁의 과객맞이 역시 상류층들의 품앗이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이런 의문을 제기하자 최염 선생님도 매우 타당한 지적이라고 공감하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상객과 중객, 하객에 대한 나눔이었다. 다시 말해 최부자댁 과객에는 대단히 귀한 대접을 받을 상객이 있고 대체로 구색을 갖춰드릴 만한 중객도 있고 스스로 밥술이나 얻어 먹고 잠이나 자면 그만인 하객이 있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부자댁이 과객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과객으로 찾아오는 나그네들이 스스로 자신의 격을 정해서 왔다는 것이다. 즉, 과객이 자신을 상객의 신분으로 찾아오면 상객으로 예우하고 중객의 신분으로 찾아오면 중객으로, 하객으로 찾아오면 하객으로 맞았다는 말이다.



상객·중객·하객은 과객들 스스로 정하는 기준일 뿐, 과객의 신분을 묻지도 사람을 차별해서 대접하지도 않아

“정확하게 말한다면 상객, 중객, 하객 하며 나누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어요. 조상님들은 딱히 상중하를 나누지 않으셨고 이런 말 자체가 우리 집안에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구분은 과객들을 대접하던 방식, 예를 들어 구첩 반상이니 칠첩 반상 등에서 구분된 것일 뿐, 우리 집에 들르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양식으로 상중하를 구분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중하의 구분들은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 되었을까? 최염 선생님의 상중하객 구분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상객들은 그들만의 행동양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먼저 최부자댁에 들르기 전에는 반드시 연통부터 해왔다. 인편으로 미리 ‘언제쯤 몇 사람이 귀댁을 방문하여 신세를 지고 싶다’는 내용의 기별을 넣는다. 혹은 경주에 도착해서라도 미리 아랫사람을 보내 이런저런 이유로 귀댁에 머물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이 정도의 격식을 갖출 만한 사람이면 대체로 자신들을 스스로 상객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중앙이나 지방의 중요 관료이거나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학자들 혹은 유명한 집안의 자손이거나 자기 스스로 자부심을 가진 인사들이어서 최부자댁에서도 그 격에 맞게 예우했다는 것이다.

중객은 최부자댁과 이런저런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거나 비록 큰 행세를 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최부자댁에서 누구 집 자손이라거나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밝힐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최부자댁을 아무 때고 스스럼없이 드나드는 사람들이었고 특별히 다른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묵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개는 최부자댁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중객으로 쳐도 최부자댁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객의 예로 대접받았다. 겸제 정선처럼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악기를 잘 타고 소리를 잘 내는 사람, 혹은 신돌석 장군처럼 용력이 출중한 사람 등 자신의 일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신분을 떠나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최부자댁에는 예로부터 시인묵객들과 가객, 장인들이 쉼 없이 드나들었다. 덕분에 그들이 남긴 귀한 서책과 작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뒤에 대구대학교를 창립한 문파 선생님은 시간이 흘러 골동품이 된 이들 작품들을 전부 대구대학교에 기증했고 대구대학교가 우여곡절 끝에 영남대학교로 전환되면서 그 대학박물관에 귀속되어 아직도 귀중한 대우를 받고 있다.

최염 선생님의 설명 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누구건 자신의 분야에서 빼어난 사람이면 대접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부자댁은 어떤 연유로 이런 가풍이 이어져 왔을까?

따지고 보면 최부자댁은 신분에 대한 벽이 이상하리만치 낮았다. 그것은 어쩌면 경주최씨의 본격적인 시조(始祖) 격인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으로부터 내려온 가문의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라의 골품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고운 선생의 사상이 결정적으로 이어진 사례가 정무공 최진립 장군과 충노들 사이의 일화와 최부자댁 후손 중 한 분인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의 행동강령으로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적서 간 혹은 남녀 간의 차별을 금한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최부자댁 족보에는 서자들을 서자로 표시하지 않을 만큼 조선시대 당시로는 파격적인 실제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중객은 최부자댁과 관련된 사람들, 집안에는 누구나 퍼갈 수 있는 쌀뒤주와 과메기 두름이 있어!

중객에는 최부자댁 전답과 임야를 관리하는 소작인들도 포함되었다. 말이 소작인이고 산지기이지 누대에 걸쳐 대물림하며 최부자댁 전답과 임야를 가꾸는 사람들을 최부자댁은 매우 중요하게 대우했다. 요즘 말하는 갑을 관계나 수직 관계가 아닌 공생과 수평관계에서 소작인들을 대한 것이다.

“나만 해도 우리 집안 소작인들을 많이 알았고 서로 간에 집안 길흉 대소사도 오래도록 함께 나누었으니 거의 친인척 같은 관계였지요. 물론 그분들은 스스로 우리 집안에 큰 은혜를 입고 있다고 여기지만 우리 집안 입장에서는 누대에 걸쳐 마음 편하도록 우리의 전답이나 임야을 관리해주었으니 오히려 고맙지요. 그런데 이분들은 우리 집안 어른들과 담소 나눈 후 알아서 작은 사랑채에 머물렀어요. 물론 큰 사랑채가 비어 있을 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기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지간히 배짱이나 구변 좋은 사람이 아니면 큰 사랑채에 머무는 것을 어색해하고 스스로 낮추어 작은 사랑채에서 머물렀어요”

이렇게 보면 상객은 최부자댁의 사랑채 본채에서 최부자댁 가주와 침식을 같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중객은 사랑채 별채에 머물거나 별채가 붐비면 교촌의 다른 최부자댁 가솔의 집에서 머문 것을 알 수 있다.

하객은 최부자댁에 문안 인사만 드리거나 최부자댁에 인사드리는 것조차도 어렵고 어색해 집안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혹은 그냥 슬며시 와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고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행세하는 사람들은 아니어도 가장 일반적인 손님들이라고 할 수 있었고 가장 많은 손님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연히 최부자댁 사랑채에 기거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알아서 행랑채나 교촌의 다른 집으로 찾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자신들이 지내기에 편하다고 스스로 단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중하의 구분은 매우 인위적인 것이고 식객들 중 상당수는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누가 누군지 모르고 지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때문 이런 식객들을 맞을 때 조상 대대로 지켜 온 금기도 있었다.

첫째는 스스로 말하기 이전에는 억지로 신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것은 자칫 신분을 알게 되면 서로 처신이 불편해질 수도 있고 혹여라도 죄를 지은 사람이 숨어들어왔을 때는 연좌되어 죄를 뒤집어 쓸 수 있으므로 서로 모른 채 지나가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여긴 탓이다. 

둘째, 절대로 대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부자댁뿐 아니라 과거의 대가나 부잣집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던 사항이었다. 누가 되었건 일단 내 집에 들게 되면 그때부터는 손님이라는 의식이 우리 조상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었다. 

셋째, 스스로 나가기 전에는 절대로 내쫓지 않았다. 최부자댁에 들어오는 과객이나 식객은 스스로 들어가고 나가고를 결정하는 것이지 최부자댁에서 나가라 들어오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최부자댁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최대한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줌으로써 그들과의 공존을 기할 수 있었고 뜻밖에 그들의 도움까지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과객 스스로 자신의 격을 상중하로 매기지 않은 이상 최부자댁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과객맞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객 중객 하객보다 더 중요한 과객맞이가 있었다.

 최부자댁에서 마련해 놓은 쌀뒤주에서 쌀을 퍼내고 뒤주 위에 걸어둔 과메기를 뽑아 동네의 다른 집으로 가 밥을 차려 달라고 해서 먹는 사람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이런 사람들도 나름대로는 행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최부자댁 대문을 거침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흉년이 지거나 춘궁기가 되면 과객맞이와 상관없이 백성들에 대한 구휼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럴 때 최부자댁 앞 ‘큰마당’에 큰 솥이 서너 개 걸리고 그 솥에는 하루 종일 죽이 끓여졌다. 죽을 끓인 것은 밥으로는 그 많은 사람을 감당하기 힘들어서인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또 한 가지는 며칠씩이나 비어 있던 배에 갑자기 찰진 밥이 들어가면 위가 밥을 감당하지 못해 탈 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 부잣집에서 솥을 걸었다고 하면 경주 일대의 굶주린 사람들이 죄다 교촌 큰마당으로 모여들어서 죽을 먹었다.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전국에서 사람들이 다 몰려들면 집안이 거덜 날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아무리 죽을 준다는 소문이 나도 못 오는 사람들은 못 오는 법이지요. 우리 집안 교훈에 사방백리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했는데, 대충 백리를 따져서 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오다가 지치거나 너무 굶은 탓에 힘이 없어서 못 올 사람들이라… 그러니 올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백리가 한계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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