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8] 경주 천관사 터

이루지 못한 사랑도 사랑이어라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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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관사 터 팔각삼층석탑] 2020년에 복원한 석탑이다. 사각의 2중 기단에 팔각 몸돌과 지붕돌을 얹었다. 옥개석 받침엔 작은 연꽃을 조각했는데 팔각의 형태와 함께 무척 여성스럽다.

남산을 맞잡고 자리 잡은 도당산 아래로 간다. 신라시대 귀족은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령지라는 신령스러운 장소를 정해두고 돌아가며 했다. 도당산은 사려지 중 한곳으로 보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도당산 아래 일대는 논이었다. 어느 해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옛 절터 천관사 터(사적 제340호)라 했다. 지금은 논을 메우고 탑을 세워 절터를 복원해 놓았다.



천관사(天官寺)

寺號天官昔有緣
(사호천관석유연)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홀문경시일처연)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다정공자유화하)
술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함원가인읍마전)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홍렵유정환식로)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창두하죄만가편)
종놈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유여일곡가사묘)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섬토동면만고전)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파한집》, 이공승(李公升, 1099년(숙종 4)~1183년(명종 13), 
고려 문신, 직한림원, 어사중승, 한림학사, 중서시랑평장사)



김유신과 천관의 이야기가 서린 천관사 터

천관사는 신라 김유신과 관련 있는 절이기도 하다. 천관사 터는 김유신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재매정과는 불과 500m 거리로 문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젊은 시절 김유신은 기녀 천관과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둘의 신분이 달랐다.

김유신은 옛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증손자로, 가야가 법흥왕에 항복하며 신라 진골 신분으로 편입된 왕족 가문이었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은 관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이끌며 신라에 충성한 장군이었고, 어머니 만명부인은 신라왕족의 딸이었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왕족 가문이니 김유신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하지만 유신은 기녀 천관과 가까이 지냈다. 이를 알게 된 만명부인이 늦은 밤 귀가하는 유신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너는 왕족의 핏줄이다. 장차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 공명을 세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랐는데, 술과 미천한 기생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귀함을 버리니 웬일이냐”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자 유신은 크게 뉘우치며 무릎을 꿇고 다시는 기방 출입을 하지 않겠노라, 다시는 천관을 만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관은 오지 않는 유신을 날마다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근신하던 유신은 아주 오랜만에 벗과 술을 나누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유신은 집으로 가기 위해 말에 올랐다. 술기운 때문인지 말 위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유신을 태운 말은 매일 향하던 곳으로 갔다. 천관이 있는 기방이었다. 천관이 반갑게 달려 나와 유신을 부축했다. 인기척에 정신을 차린 유신은 자신이 천관의 집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유신은 천관을 거칠게 밀쳐내고는 가차 없이 말의 목을 벴다. 천관은 냉기서린 유신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하고 마당에 쓰러졌다.

“다시는 기다리지 마시오”

유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어머니와의 약속이다. 내 어찌 대장부로 태어나 약속을 어기겠는가. 단 한 번의 결심이라도 헛되이 하는 것은 대장부로써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유신은 다시는 천관을 찾지 않았다. 유신의 냉정하고 섬뜩한 모습을 본 천관은 날마다 눈물로 보내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변심한 유신을 원망하며 향가 《원사(怨詞)》를 지었다고 알려졌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훗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이 천관을 다시 찾았을 때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유신은 그녀가 살던 곳에 ‘천관사’라는 절을 짓고 넋을 위로했다.


↑↑ [천관사 터 사라진 석등] 발굴조사 후 원상태로 흙에 묻어 두었으나 상대석과 하대석 모두 사라졌다.


복원된 팔각삼층석탑과 사라진 석등

도당산 기슭 풀밭에 세워진 탑은, 소녀처럼 새하얗게 빛난다. 어찌 여기에 있소, 물으면 머뭇머뭇한 모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누가 여기에 세웠소, 물으면 여전히 머뭇머뭇한 모습으로 얼굴을 돌리는 듯하다. 그래,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한 사내가 사랑하던 여인을 잊지 못해 세웠다는 말. 첫 정을 잊지 못해 평생 여인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는 그 사내는 어디로 갔을까. 사내를 기다리며 수 억만 밤을 지새우다 사라져갔을 탑을, 누가 다시 우두커니 세워 놓았을까.

천관사는 고려시대까지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폐사된 후 절터는 자연스레 잊혀 갔을 테고, 사람들에 의해 치워지고 버려졌을 것이다. 팔각삼층석탑은 2020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기단부와 팔각 탑신석으로 구성된 석탑이 남아 있었지만 상층 부재가 없어 원형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때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작성한 <고고자료>를 토대로 팔각 옥개석받침에 연화문이 새겨진 석탑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흩어져 있던 몇 안 되는 탑재를 모았지만 탑을 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탑의 대부분을 새로 만들어 복원한 터라 상당히 이질적이다.

신라 석탑들은 대부분 사각 석탑이다. 천관사 터 석탑은 사각의 2중 기단에 팔각 몸돌과 지붕돌을 얹었다. 옥개석 받침엔 작은 연꽃을 조각했는데 팔각의 형태와 함께 무척 여성스럽다. 석굴암 삼층석탑과 함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탑신부 외에도 건물터, 문터, 석등 터, 석조시설과 우물 터가 확인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릉 동쪽에 있다(在五陵東)’는 기록이 있고, 금동불상과 ‘천(天)’ 자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수습되면서 천관사의 위치가 확실해졌다.

천관사 터에는 석등유물이 있었다. 발굴조사 후 원상태로 묻어 두었으나 상대석과 하대석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각 솜씨가 상당히 뛰어난 연화무늬 대석이다.


↑↑ 우물터로 확인된 곳.


원성대왕 꿈과 천관사

《삼국유사》 원성대왕(元聖大王) 편엔 천관사에 관련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찬 김주원이 처음에 상재(上梓)가 되고, 훗날 원성왕이 되는 경신은 각간으로서 차석의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경신의 꿈에 자신이 복두를 벗고 하얀 삿갓을 쓰고는 12줄의 가야금을 잡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깬 뒤 사람을 시켜 풀이를 하니 복두를 벗은 것은 실직한 징조이고, 가야금을 잡은 것은 목에 칼 씌우는 형을 받을 징조요,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 했다. 경신은 그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며 출입을 삼갔다.

그때 아찬 여삼이 뵙자 청하고는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 더 높은 사람이 없는 것이요,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고, 12줄 가야금을 잡은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하였다.

“위로 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이오?” 경신이 묻자 아찬이 답했다. “청컨대 몰래 북천신에게 제사하면 가능하리이다” 얼마 후 신덕왕이 죽으니, 나라에서는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북천 물이 불어 북천 북쪽에 살던 주원이 건너지 못하게 되었고, 경신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니 상재의 무리들이 모두 따라와 절하며 하례하였다. 그가 곧 신라 30대 원성대왕이다.

논을 메워 복원한 천관사 터 지천에 뿌리내린 토끼풀이 한창 꽃을 피웠다. 토끼풀 꽃으로 화관을 만들고, 꽃반지를 엮어 탑 위에 얹어본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탑은, 님을 그리워 하듯 처연하게 서있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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