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을 방문한 200명 과객, 어떻게 치러 냈을까?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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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명의 과객들이 각각 반상을 들고 앉았을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모습.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을 취재하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최부자댁에는 많을 때는 100명의 과객이 묵었다는 이야기를 곧잘 들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최부자댁 사랑채가 별채까지 완전히 복원되었지만 그렇게 보아도 100명의 과객은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마음먹고 사람들을 들이면 사랑채 전체에 100명이 앉을 자리는 있겠지만 과객은 묵어가는 사람, 즉 잠까지 자고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텐데 100명은 아무래도 무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쳐도 하루 100명이면 어지간한 호텔 투숙객보다 많은데 그 시대 그 많은 과객들을 어떻게 다 대접할 수 있었을까?



하루 100명 과객이 묵어갈 수 있었던 최부자댁, 잠은 동네의 모든 집에서 잘 수 있어!

이런 의문을 최염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선생님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우리집에 과객은 내가 어릴 때도 하루에 족히 십 수인은 되었을 것이네. 그러나 할아버지가 젊었던 시절에는 족히 하루 100명은 우리 집을 찾아와 밥을 먹고 가든 잠을 자고 하든 했다고 하셨네”

매일 하루 100여명의 과객을 대접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잠자리부터 문제될 수 있다. 그러나 최부자댁 본채만 최부자댁이 아니라고 설명했듯 마을의 기와집이 전부 최부자댁 가솔들의 집이었으니 과객을 분산시켜서 묵게 할 수 있었다. 가솔이 모자라면 마을의 여념집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최부자댁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최부자댁에서 보내서 왔다고 하면 아무 의심 없이 재워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최부자댁 손님맞이는 어떤 손님이건 가리지 않고 무조건 따로 한 상씩 차려주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물론 어떤 손님이냐에 따라서 반찬의 종류가 달랐을 것은 당연하다. 9첩 반상, 7첩 반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반찬 가짓수에 따른 구분이다. 보통 상객들은 9첩 반상이 기본이고 중객은 7첩 반상쯤이라고 보면 된다. 손님에 대한 구분은 다시 상세히 말하겠지만 상객 중에서도 특별한 손님들은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각별한 음식들이 차려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맞이하는 손님의 비중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자리에서 다른 음식을 내주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똑같은 상을 받았다. 누구는 상객이니까 9첩 반상을 받고 누구는 중객이니까 7첩 반상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상객은 최부자댁 가주들이 함께 방을 쓰면서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과객들에게 일일이 한 상씩 차려줄 경우도 의문이 되었다. 과객이 한꺼번에 몰릴 경우 그 많은 상을 어떻게 다 마련할 것인가? 그러자 최염 선생님께서 빙긋 웃으시고는 짧은 일화 하나를 슬며시 말씀해 주셨다.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 집은 200명의 손님을 한꺼번에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네. 그것은 반상기가 최소한 200벌은 있었다는 뜻이지!”

그러면서 최염 선생님이 어렸을 때 실제로 200명의 손님을 한꺼번에 받은 일화를 들려주셨다. 요약하면 이렇다.

서울의 보성 중학에서 최린 선생이란 일가분이 교장을 지낼 때였다. 그분이 보성학원 학생 100명과 천도교 교도 100여명 등 200여명을 이끌고 경주로 왔다. 그렇게 많은 분들이 한꺼번에 경주로 온 것은 천도교 교조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보성 중학교가 한 때 동학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이 운영하셨기에 그 인연으로 묘소를 참배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경주에 도착해 수소문해보니 그 많은 인원이 묵어갈 만한 호텔이나 여관은 물론 밥을 먹을 만한 장소조차 없었다. 그 시절만 해도 숙박업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을 때이고 관광이란 개념 역시 없을 때였다. 경주 불국사역 부근에 철도호텔이라는 작은 호텔이 있었지만 그것을 쓸 계제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생각 끝에 최린 선생은 최부자댁에 연락을 취해 며칠 신세를 질 수 있겠느냐고 알려 왔다. 물론 문파 선생님은 반갑게 이들을 맞아 주셨다.

최린 선생이 문파 선생님께 스스럼없이 이런 부탁을 한 것은 문파 선생님이 최제우 선생과 정무공 이래 한 집안이고 문파 선생 역시 천도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파 선생님에게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은 집안의 고조부 뻘 되는 분이다. 2대 교주 최시형 선생 역시 경주 사람으로 그 분의 집이 최부자댁과는 5리(2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경주 황오리였다. 천도교라 이름을 바꾼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은 그 최시형 선생의 세 번째 부인의 처남이었다. 문파 선생님은 특히 손병희 선생과는 나이를 떠나 깊은 친교를 나누었고 한때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보성전문을 맡아 달라는 제안까지 받았을 만큼 막역한 분이었다.



200명의 학생과 관계자들이 각기 상 하나씩을 마주하고 최부자댁 사랑채에 앉은 모습은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염 선생님은 이 이야기는 할아버지이신 문파 선생님께 들은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게 더 놀라웠다. 이런 중요한 일을 문파 선생님이 아닌 누구에게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최염 선생님의 회고담!

“내가 대구대학 상무이사로 있을 때 영천 출신 국회의원이던 이활 씨가 사무국장이던 정모씨를 보내 나를 좀 보자고 했어요. 이활 씨는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데 다른 국회의원들 10여명과 함께 대구 지역 상공업계를 시찰차 들렀다가 나를 보고 싶어 한 것이라. 그러나 심부름 온 사무국장은 이활 의원이 나를 만나고자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는 것 같더구만...”

그들 일행은 당시 대구 동인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경주 최부잣집 주손이 왔다는 말을 듣자 이활 씨는 최염 선생님을 정중하게 국회의원들에게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런 추억담을 펼쳐냈다.

“여러 의원님들 제가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제가 어릴 때 보성전문 학생이었는데 200여명의 학생과 교사, 천도교 교도들이 어울려 경주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꺼번에 200명이 경주 최부자댁에 들어가 먹고 자고 했는데 전부 각각의 상에 맛있는 진수성찬으로 극진한 대접을 해주셨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장관이던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자로 치면 저희집도 당대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이 경주 최부자댁 못지않았는데 반상 200개가 동시에 나온 모습을 보고는 ‘이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진풍경이다’고 감탄하며 한껏 기가 죽어버렸습니다”

이활 씨는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하도 기억에 남아 마침 대구에 온 걸음에 최염 선생님을 만나 각별한 우의를 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최염 선생님의 확인 작업이 또 재미있었다. 돌아와서 할아버지 문파 선생님께 그 일을 여쭈어 보았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그 일을 기억해 내셨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 모두 7첩 반상이 나갔다고 하는 겁니다. 이활 씨 집은 영천이고 그곳에서 부자로 소문난 집인데 마침 보성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이활 씨가 200명 손님들 속에 학생으로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라는 말씀이셨지요!”

이 일화를 굳이 소개하는 것은 최부자댁은 언제든지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준비만 되어있었던 것이 아니고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손님들을 한꺼번에 치러 낼 기동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지금의 어지간한 호텔이나 음식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최염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후 최부자댁에 갈 때마다 그 꿈 같은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곤 했다. 당연히 그때는 최부자댁 사랑채가 전부 그 200여명 인사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제각기 7첩 반상기를 마주하고 앉았을 것이니 아무리 넓은 사랑채라도 본채와 별채 자체로는 모자랐을 것이고 어쩌면 마루까지 사람들이 나앉거나 마당에 넓은 멍석이라도 깔렸을 것이다. 그들이 각각 상 하나에 7첩 반찬을 놓고 밥과 국을 먹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壯觀)이었을 것이다. 7첩 반상이라면 반찬만 7종류, 밥과 국까지 모두 9개의 그릇이 상위에 올라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00개 상위에는 모두 1800개의 그릇이 동원되었다는 말이고 만약에 술병과 술잔까지 있었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상상이 안되는 엄청난 상차림 모습인 것이다. 최부자댁 아니면 어떤 집에서 이런 대단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을까?

그런 한편 그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과객들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라 할 것이다.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최부자댁이 과객맞이에 각별하다는 소문이 나 있지 않았다면 그 많은 인원이 그렇게 쉽게 방문할 엄두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님을 맞는 입장에서도 아무리 부자라고 한들 선뜻 그 많은 손님들을, 그것도 전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맞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손이건 주인이건 이런 일이 거리낌 없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우리의 의식수준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나눔과 상생의 정신이 공유되고 있었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형편 되는 사람에게는 떳떳하게 얻어먹을 수 있고 형편이 되면 언제든지 내놓을 줄 아는 기본적인 미덕이 있었던 시대, 반상기 200개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선대의 훌륭한 정신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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