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김상옥 시조 속의 경주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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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정(草汀) 김상옥(金相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시조에 관심이 없더라도 학창시절 교과서에 수록된 그의 시조 한두 편은 만나보았을 것이다. 그는 예술의 고장 경남 통영 출생으로 경주와 특별한 연고가 없지만, 어느 작가보다 많은 경주에 관한 시편들을 남겼다. 한편 한편이 모두 빛나는 걸작들이다.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봉선화」, 「백자부」, 「사향」을 들기도 하지만 경주를 소재로 한 「옥적」과 「다보탑」, 「십일면관음」, 「대불」도 빼놓지 않는다.

↑↑ 진평왕릉에서 바라본 일몰.


첫 시집 「초적(草笛)」 속의 경주

초적은 풀피리를 말한다. 누구나 불 수 있는 풀피리는 경주의 상징인 옥적 또는 만파식적의 원형과 다름없다. 그가 시집 제목으로 택한 이유는 시를 읽어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경주를 소재로 한 시들이 그의 첫 시집 『초적』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1947년 수향서헌에서 출간하면서 편집, 장정, 조판, 인쇄, 제본 등 전 과정을 손수 혼자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정을 문단에 추천한 가람 이병기가 첫 시집 추천사를 썼다. 10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 그의 시집은 현재 가격은 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시집에 수록된 경주에 관한 시들은 「옥적」, 「십일면관음」, 「대불」, 「다보탑」, 「무열왕릉」, 「포석정」, 「재매정」 등 수록된 40편 가운데 경주의 유적지를 노래한 시가 7편이나 된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시 「다보탑」은 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현장에 있는 듯 생동감 넘친다. 완성미보다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불꽃이 이리 튀고 돌조각이 저리 튀고,
밤을 낮을삼아 정 소리가 요란터니,
불국사 백운교 위에 탑이 솟아오르다.

꽃쟁반 팔모 난간 층층이 고운 모양,
임이 손 간 데마다 돌옷은 새로 피고,
머리엔 푸른 하늘을 받쳐 이고 있도다.
- 시 「다보탑」 전문 (全文)


두 번째 시집 『고원의 곡』(성문사 1949)에도 「돌탑」과 「박물관」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돌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두 탑을 화랑과 짝사랑한 신라 처녀로 비유하여 노래했다. 시 「박물관」 속에는 박물관에 소장된 금관, 옥적, 에밀레종, 돌칼과 돌도끼, 구리로 만든 열세층 꼬마탑 등 다양한 유물이 등장한다. 시인은 경주 박물관 홍보대사가 된 듯 박물관으로 가보라며 안내한다.

꿈 얘기도 옛 얘기도 아닙니다
경주 박물관으로 가보세요
내 말이 믿어지지 아니하거든
- 시 「박물관」의 일부


시집 『목석의 노래』 (청우 1956) 에는 「일모(日暮)」, 「승화(昇化)」는 시조라기보다는 긴 분량의 자유시 또는 산문시 형태로 경주의 해질녁과 불국사를 꿈의 나라, 신라로 승화하여 표현하기도 했다. 시 「일모(日暮)」 속 한 문장을 읽으면 언젠가 진평왕릉에서 보았던 선도산과 옥녀봉 두 아름다운 곡선의 봉우리 사이로 넘어가는 해넘이가 떠오른다. 초정도 이곳에서 일몰을 보았을까 아니면 어디서 아름다운 고도의 저물 무렵을 보았을까? 왕릉 위로 번지는 붉은 빛은 경주에서만 느낄 수 있으리라. 정양모 교수가 제자 유홍준에게 왜 가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물 무렵 선덕여왕 길을 맨발로 걷다 보면 운수 좋은 날엔 붉은 홍옥 속 경주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 「일모(日暮)」 일부를 인용해 본다.

지금도 각각(刻刻)으로 굳어가는 우리의 영혼! 그 두려운 여백 위에 차라리 아픈 칼자국을 내라. 언제나 비극은 지극히 아름다운 대사로 막을 내리니 오늘 우리의 슬픈 언어로 낙인으로 찍으련다.
- 시 「일모(日暮)」 일부


그런가 하면 동시에도 경주를 빼놓지 않았다. 동시집 『꽃 속에 묻힌 집』(청우 1958)에는 「석굴암에서」라는 동시가 한편 자리하고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내 불상.


경주는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나라의 수도


『삼행시 육십오편』(아자방 1973) 시집에는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나라의 수도」 라는 재미있는 시가 있다. 신라 천년 서라벌을 한 왕조의 서울이 아니라, 인간의 서울, 오직 인간 나라의 서울이다 라고 시작해서 생불(生佛) 나라 생불(生佛)의 수도라고 끝을 맺는다. 경주사람이 읽으면 좋아할 것 같다.



신라 일천년 서라벌은 한 왕조 아니라 한 왕조의 서울이 아니라, 진실로 인간의 서울, 오직 인간 나라 서울이니라
한가락 젓대의 울림으로 만이랑 사나운 물결도 잠재운 나라, 모란빛 진한 피바람도 새하얀 젖줄로 용솟음 치운 나라 첫새벽 홀어미 사연도 여울물에 헹궈서 준 나라, 그 나라에 또 소 몰던 백발도 행차에 나선 젊으나 젊은 남의 아내도, 서로 죄 없는 눈짓 마주쳤느니
꽃벼랑 드높은 언덕을 단숨에 뛰어올라, 기어올라, 천지는 보오얀 봄 안개로 덮이던 생불 나라 생불의 수도이니라
- 「인간 나라 생불 나라의 수도」 전문(全文)

이 시는 만파식적, 이차돈의 순교, 효녀 지은, 헌화가의 수로부인 등 신라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시 제목 또한 멋지게 지었다. 시인이 꼭 신라 사람 같다.
아사녀의 노래라는 부제가 달린 연작시 「아가(雅歌) 1」,「아가(雅歌) 2」에서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영지(影池)로 나오라고 우리를 못가로 불러내고 있다. 같은 시집 속 또 다른 시 「신록(新祿)」도 마찬가지로 다시 아사녀를 불러내고 있다.

아사녀! 아사녀!
예서 조금만 더 쉬고 있으면, 가진 것보다 더 반가운 것, 절실한 것들이 차츰 비치기도 하고, 또 어디서 옷자락 가벼이 스쳐 지나기도 할 것이다
- 「신록(新祿)」 일부

회갑기념 시집 『묵을 갈다가』(창작과 비평사1980)에는 어느 날 경주 박물관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부처님 돌이(乭伊)가 막일꾼 이차돌(次乭伊)에게 1」과 「부처님 돌이(乭伊)가 막일꾼 이차돌(次乭伊)에게 2」는 박물관 뜰과 경주 남산 목 없는 불상을 막일꾼 이차돌을 끌어들여 불교의 인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돌이와 이차돌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고 만다.


나는 석씨 출가세자 석돌이, 너는 경주의 막일꾼 차돌이, 한뜨락 감은 비바람을 함께 맞은 인연이 얼마나 지중턴가
돌 속을 흐르던 나의 피. 돌 속에서 뛰던 나의 숨결, 묘하여라 차돌이 일자무식 차돌이 네가 짚어 알았어라
- 「부처님 돌이가 막일꾼 이차돌에게 2」일부

남산을 불국토로 만든 사람도 보통사람이었고, 깨진 불상을 찾아낸 것도, 돌 속의 흐르는 피를 찾아내고 호흡한 것도 막일꾼인 이차돌을 부처와 동일시한다. 민중적 시각으로 민족의 숨결을 더듬은 시이다.

미간행 유고 시 가운데에는 「효불효교(孝不孝橋)」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1957년 《현대문학》 8월호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홀어머니의 연애를 돕기 위해 아들이 돌다리를 놓아주는 효도 되고 불효도 되는 다리에 얽힌 설화를 시로 표현했다. 경주 박물관 근처 남천에 다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혼자된 아버지의 길고 길었던 시간에 다리는커녕 돌 하나 놓아드리지 못한 사람도 있다.


신라 유물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첫 시집부터 유고 작품에 이르기까지 초정 김상옥은 신라 유물들을 매개로 절창의 시를 완성했다.

2005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김상옥 시전집』을 기준으로 대략 제목만으로 파악한 것이 스무 편 정도 된다. 미처 살펴보지 못한 시 속의 내용까지 더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왜 경주에 천착했을까? 경주가 시의 대상이 된 것은 그의 삶의 행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사상범으로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다. 윤이상과 같이 일경을 피해 도망을 다녔으며, 두만강 국경 근처에 가서 살기도 했다. 특히 첫 시조집 『초적』에는 우리의 역사적 유물을 통해 나라 잃은 슬픔을 대신하였으며, 민족 고유의 정신과 정서 회복을 노래했다. 특히 석굴암 다보탑 옥적 등에서 우리 민족이 가졌던 종교적 믿음, 예술적 미의식을 찾고자 했다. 그가 찾고자 했던 민족정신은 바로 신라 정신이었다.

서정주 시인은 초정을 모든 사물을 볼 때마다 거기 살다가 죽어간 옛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넋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우리 시인들 중 가장 뛰어난 눈을 가진 선수라고 칭송을 했다.


↑↑ 김상옥의 시집 초적(고려대도서관 소장).


6일 만에 아내를 따라간 시인

시조와 서예 서화, 수필, 전각 디자인 등 다방면에 다재다능했다. (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인쇄소에서 일을 했고,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백자를 좋아해서 수집하며, 「백자부」라는 명시도 남겼다. 서울 인사동에서 표구점이자 골동품 가게 ‘아자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고향 통영을 비롯한 경남지역에서 20여 년 교편을 잡았으며 박재삼, 이제하, 김병총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시조’라는 단어보다 ‘삼행시(三行詩)’라는 용어를 썼다. 시조를 자유시 영역에 두었으며 언어, 이미지, 리듬 등 기존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의 방식으로 시조 시인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또 T.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와 같은 현대 시인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다. 고향 통영에는 봉선화 시비, 초정 김상옥 거리, 초정 좌상 등이 있고 매년 초정 김상옥 시조 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부부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던 시인은 부인이 사망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엿새 만에 부인을 따라갔다. 2004년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애틋한 부부애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동치미>, <내 생愛 마지막 비가(悲歌>라는 연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시의 배경이 된 경주 곳곳을 둘러보며 시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을 찾아내는 일은 경주를 제대로 아는 일이다. 불국사, 석굴암, 포석정, 재매정, 무열왕릉, 경주 박물관과 남산에 산재한 불교 유적들, 꼭 실화일 것만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영지와 효불효교까지 둘러보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풍성해질 것이다.

유난히 경주에 관한 시를 많이 썼던 시인에게는 배울 점이 참 많다. 섬세한 시는 물론이거니와 부부애까지도.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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