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왕실과 석당 선생 후기, 그리고 김범부 선생의 영향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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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영 작가
지난 40회에 석당 최남주 선생님과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와 관련한 글을 읽고 석당 선생의 둘째 아들이신 최정대 선생(코리아타임즈 칼럼리스트)이 중요한 제보를 해주셨다.

내가 쓴 원고에는 최염 선생이 할아버지이신 문파 선생님께 들은 회고담으로 구스타프 황태자가 최부자댁에서 묵고 가신 것으로 썼다. 그런데 최정대 선생은 최부자댁이 아니라 당시 불국사역 앞에 있던 ‘철도호텔’에 묵었다고 제보해 준 것이다. 이 내용은 최정대 선생의 형인 고고학자 최정필 교수도 들려준 바 있다. 최염 선생님의 회고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 주장을 기록해두는 것도 의미가 있어 굳이 언급해 둔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최염 선생님 주장에 더 신뢰를 두는 편이다. 철도 호텔에 예약해 두고 급격히 조선 사람들의 생활공간이 궁금해 최부자댁에서 묵었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다.

특히 최염 선생님이 회고에 더 비중을 두는 이유가 있다. 구스타프 황태자가 최부자댁 안채를 보고 싶어 했다가 당시의 법도로 인해 허락을 얻지 못하고 6.25 전쟁 당시 병원선에 근무하던 간호 장교들을 보내 안채 사진을 찍어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약 구스타프 황태자가 최부자댁에서 묵지 않았다면 굳이 안채를 궁금하게 여길 이유가 없고 간호장교들을 보낼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 훈장을 받은 최정대(맨 왼쪽) 선생, 최정필 교수와 스웨덴 한국대사 부부.


최남주 선생 스웨덴 왕실 최고 훈장 ‘바자’, 최정필 최정대 선생 ‘북극성’ 훈장 받아

구스타프 황태자가 어디에 묵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최부자댁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이 최부자댁 사랑채에 한동안 머물렀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머물렀다기보다 숨어 살았다는 표현이 더 어우릴 법하다.

최시형 선생은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을 때 과객으로 가장해 최부자댁에 숨어 지냈다고 추측된다. 최시형 선생은 문파 선생보다도 윗세대 어른이었으므로 문파 선생이 최시형 선생을 만난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일 것이다. 1884년생인 문파 선생이 최시형 선생을 기억할 만한 시간은 많아야 5~6년 정도 안팎일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와 관련해 제보해주신 최정대 선생은 최시형 선생의 후손으로 형제분들과 지금까지도 스웨덴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40회에서 언급한 대로 구스타프 황태자는 서봉총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만난 조선인 청년 최남주 선생을 기억하고 그 인연의 끈을 이어갔다.

구스타프 6세는 왕위에 오른 후 6.25 전쟁으로 한국에 파견됐던 스웨덴의료단들과 휴전 이후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스웨덴 대표단원들에게 ‘꼭 경주에 들러 최남주 선생을 만나고 서봉총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특히 구스타프 6세 왕은 1971년 최남주 선생에게 한-스웨덴의 문화교류 공로를 인정해 동양인에게는 최초로 스웨덴의 최고훈장인 ‘바자 훈장 기사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2010년 7월에는 한-스웨덴 문화교류에 다양하게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구스타프 16세 왕이 최정필 교수와 최정대 선생에게 ‘북극성’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서봉총을 발굴할 당시의 최남주 선생의 열의가 구스타프 황태자에게 각인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대단한 민간외교가 이렇게 후대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 범부 김정설 선생.


김범부 선생, 최부자댁 왕래하며 6.25때 계림 대학 만들어

해방 이후 최부자댁을 자주 드나들었던 분 중 유명한 분이 부사 동래 출신의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 1897년~1966년) 선생이다. 김범부 선생은 당대 최고의 동양 철학자이자 한학자였다. 16세에 경주남문에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격문을 써 붙인 것으로 유명하고 특히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이 세운 백산상회의 첫 장학생으로 일본 동양(東洋)대학에 유학하여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동경 외국어학교에서 영어와 독어를 독파한 뒤 이어 동경대학과 경도대학에서 수학한 천재적인 학자다.

귀국 후에는 다솔사에서 일본 천태종 계열의 승려와 학자들에게 불교를 강론했고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고승들에게 불교철학을 묻고 수행에 힘쓰는 한편 불교철학의 연구에 몰두했다. 김범부 선생은 신라 화랑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여 ‘화랑외사’를 남겼고 뒤에 부산 동래에서 피난정부 시절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3건 개헌 당시 자는 시늉을 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항의한 것은 김범부 선생의 꼿꼿한 지조를 보여주는 일화다.

특히 이분이 6.25 당시 경주 이남으로 피난와 있던 학자들의 뜻이 꺾여 있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여겨 문파 선생을 설득한 끝에 계림 대학을 만들게 했고 학교가 만들어진 후에는 초대 학장을 맡기도 했다. 초기 계림 대학은 다른 곳이 아닌 최부자댁 사랑채와 경주 향교에 개설된 학교였다. 오랜 기간 향교의 기능을 잃었던 향교가 뜻밖에도 전쟁통에 학교의 기능, 그것도 대학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이한 인연을 맞았고 최부자댁이 참혹한 국란 중에 학문에 대한 한 줄기 빛이 된 것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다시 새겨볼 귀감이다.

김범부 선생이 우리나라 종묘 제례악에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있다. 이것은 김범부 선생의 뜻과는 다소 무관하지만 결과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1호가 종묘제례악이다. 그런데 이 문화재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의 악의적 훼손과 일제강점기 활동한 이왕직 아악부의 무지로 인해 심하게 왜곡되었다. 이왕직 아악부는 해방 후인 1946년 국립국악원으로 재편되었는데 그 핵심 인물들은 이왕직 아악부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이런 왜곡 사실을 간파하고 지금까지 올바른 개선을 주장한 장본인이 경주 출신의 국악 이론가인 김용(1932~ ) 선생이다. 김용 선생은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39호인 처용무 보유자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종묘제례악과 김용 선생의 외로운 싸움

김용 선생이 종묘제례악이 훼손된 것을 알게 된 결정적 계기는 김범부 선생으로부터 주역 해석을 배웠기 때문이다. 김용 선생은 조선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음악책인 악학궤범과 무보(舞譜)인 시용무보 등을 완벽히 해석함으로써 종묘제례악이 원래 만들어진 대로 거행되지 않고 잘못 일제에 의해 왜곡 전승되었음을 간파하고 이의 개선을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종묘제례악에 내재된 철학적 개념과 응용원리는 전혀 모른 채, 더구나 무보가 왜곡된 후, 정확한 운용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단순히 무용 독작만 배운 기존 국악인들의 벽에 막혀 아직도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용 선생의 주장에 대해서는 내가 서라벌 신문 서울취재 본부장으로 활동할 당시 종묘제례악의 잘못된 전승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또 경주고도보존회 모임에도 모셔서 강연도 들었고 이를 보도한 기사를 본 경주문화원에서 학술행사에 초대해 강연을 열리도 했다.

김용 선생님을 생각하면 매우 송구하고도 안타까운 일이 있다. 2018년, 김용 선생님으로부터 종묘제례악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제안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선생님이 너무 연로하셔서 말씀에 두서가 없어졌고 기억도 희미해지신 듯해 도저히 모시고 작업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이 제안을 고사(叩謝)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죄송하고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 여겨 무척 상심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당신 스스로 국립국악원 재직 시절부터 꾸준히 이 문제를 제기해 오셨기에 악(樂)과 무(舞)를 막론하고 올바른 전승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들은 모두 남겨놓으셨다. 다만 아직도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음률과 무용만 알았을 뿐 악학궤범이나 시용무보를 철학적으로 해석할 능력이 되지 않아 선생님의 지론이 실현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고 한스러울 뿐이다. 김범부 선생이 주역에 통달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다 보니 김용 선생의 종묘제례악까지 와버렸다.

김범부 선생은 그러나 최근 현대사에서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생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이분의 동생이 소설가 동리(東里) 김시종(金始終 : 1913~1995) 선생이다. 형님처럼 본명보다 호와 함께 붙여 부른 ‘김동리 선생’으로 더 알려진 선생은 형님 김범부 선생과 달리 경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경주의 다양한 역사문화적 자양분을 만끽하며 자랐다. 그런 인연으로 화랑의 후예, 무녀도, 황토기, 을화 등 경주를 기반으로 한 소설과 시 작품을 남겼다.

‘사반의 십자가’와 ‘무녀도’ 등의 작품은 노벨 문학상 후보작에 오를만하다는 언론의 평가를 받아 한때 마치 김동리 선생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처럼 들뜨기도 했다.

김동리 선생은 역시 경주 출신의 목월(木月) 박영종(朴泳鍾 1915~1978) 선생과 막역지우로 알려져 있다. 두 분 역시 최부자댁을 자주 다녀갔는데 지금 교촌의 ‘석등집’, 최부자댁에서는 한계댁으로 알려져 있는 집으로 자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한계댁은 최부자댁이 이조리에서 경주로 오기 전에 서당 건물을 먼저 옮겨온 증거로도 유명한데 상량문에 의하면 이 집이 1666년에 지어졌고 그때가 최국선 공 시대에 지어진 집일 만큼 오래되었다.

특히 이 집은 최부자댁에서 공식 객사로 쓸 만큼 집도 잘 지었고 풍광도 좋은 집이었다. 그러니 이조리에 이 집이 있을 때는 물론 교촌으로 옮겨온 조선시대 후기나 일제강점기, 현대사를 관통하며 최부자댁 사랑채와 함께 고명한 학자와 시인묵객, 정치인이나 고관대작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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