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7] 경주 미탄사 터

삼국유사 딱 한 번의 기록, 최치원의 옛집은 어디에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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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인가 싶다가도 아침, 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은 꼭 늦가을을 떠올리게 한다.
긴 겨울을 지나 봄이 온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또 여름이 온다고 지레 폭염을 걱정하는 것도 풀밭에 서면 다 부질없는 것 아닌가. 

봄비 추지게 내린 후에도 시드는 꽃이 있고, 폭염에도 냉해를 입는 식물이 있으니 어찌 계절을 탓할까. 오고 감이 뭣이든 간에 우리는 맞추어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그러고 보니 지천에 앞다투어 피고 지던 꽃도 어느 정도 정연해진듯하다.
나무는 어느새 그늘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여름은 달리 오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나부대며 제 그늘을 키우는 나무로부터 그렇게 오는 거다.

↑↑ [미탄사 터 삼층석탑] 미탄사 터에서 단연 으뜸은 석탑이고, 탑 옆으로 펼쳐진 물웅덩이가 두 번째다. 웅덩이에 물이 가득 들어차면 하늘도 탑도 모두 물속에 내려와 잠긴다.


최치원의 옛집 독서당은 어디일까

미명과 섞여 푸르스름하게 기지개를 켜는 풀밭에 섰다. 미명을 지나 서서히 묽어지는 어둠을 위로 삼아 마치 태초의 종족처럼 풀밭으로 덥석 발을 들이는 일은, 어쩌면 무모한 용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어둠을 가르며 달려왔느냐 물으면, 무언가에 홀린 채 ‘그냥’이라는 말뿐, 허울 좋은 대답은 거짓말 같아 차마 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저 탑 하나만 삐쭉 선 풀밭, 그것이 목적이었다고 하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것이 분명한 일이다. 
딱히 궁금했던 것은 아니다. 광활한 황룡사 터를 걸으며 사야에 얼핏 걸렸던 탑일뿐이었다.

당연히 황룡사 터의 일부일 거라 여겼던 탑은, 황룡사 터를 구분 짓는 울타리 그 너머에 존재했다. 아직 발굴이 덜 된 구역이라서 울타리를 쳐 놓았을 거라 여기며 한 번도 울타리 너머의 영역에 관해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마음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 맞겠다. 경주를 기행하다 보면 흔한 것이 탑이다. 굳이 울타리를 넘어가면서까지 마주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존재감 없이 풀밭에 허허롭게 서 있던 탑은, 어쩌면 나를 비롯해 황룡사 터를 찾는 수많은 이들을 훔쳐보았을 지도 모른다. 곁눈질하며 수줍은 듯, 언젠가는 자신을 찾아와주겠지, 아니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며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참 오래도 걸렸다, 스치며 지나간 탑과 조우하는 일.

‘미탄사 터’란다. 이름에서 전해져오는 느낌부터 낯설지 않은가. ‘황룡사’나 ‘감은사’처럼 자주 들어 귀에 익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입에 착 붙는 이름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낯섦에서 오는 묘한 신비감이 있다. 한자를 풀이하면 맛 ‘미(味)’ 삼킬 ‘탄(呑)’, ‘맛을 삼키다’는 의미인데, 부처를 모시는 거룩한 사찰 이름을 맛에 견준다는 것도 뭔가 어색하다. 그렇다면 한자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께 가장 훌륭한 음식(맛있는)을 공양하여 드시도록 하는 거룩한 장소’로 이해해 볼까. 아니 아니, ‘부처님이 훌륭한 음식을 드시고 기뻐하시는 복된 장소’로 이해해 볼까.

미탄사는 어느 시기 어디에 어떻게 세워졌으며 어떻게 운영되다 사라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80년에 ‘味呑(미탄)’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여러 점 나와 ‘미탄사 터’라 불리게 되었다는 게 전부다. 학계에서는 미탄사가 8세기에 조성돼 13세기까지 존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 기이편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 편에는 미탄사에 관해 짧게 기록돼 있다. ‘진한 땅에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 그중 네 번째 자산 진지촌 촌장 지백호(智伯虎)는 삼한시대 진한의 사로국 6촌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 씨(鄭氏)의 도시조(都始祖)다. 처음 화산(花山)에서 내려왔으니, 이 사람이 신라시대 육두부 중 하나인 본피부(本彼部) 최 씨(崔氏)의 조상이 된다. 최치원은 이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도 황룡사 남쪽과 미탄사 남쪽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후(崔候, 최 문창후-최치원)의 옛집이 분명하다’

명문 기와의 발견은 ‘여기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 ~ ?,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의 고택 독서당(讀書堂)이라오.’ 외치며 세상에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탄사 터에는 삼층석탑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금당지와 여러 동의 건물과 원지(園池), 담장, 우물, 배수시설의 흔적도 나왔다. 금당이 탑과 일직선을 이루지 못하고 중심축에서 벗어났다는 것, 신라왕경의 전형적인 사찰과는 다른 형태를 띤다는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8세기 이후 왕경에 자리 잡은 귀족층의 개인 사찰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야기다.


↑↑ 미탄사 터 도기파편: 풀숲에 숨어 몸을 가린 가련한 도기 파편들은 천년을 침묵하며 절터를 지켜왔다.


간결미 돋보이는 보물, 미탄사 터 삼층석탑

미탄사 터에서 단연 으뜸은 석탑이고, 탑 옆으로 펼쳐진 물웅덩이가 두 번째다. 웅덩이에 물이 가득 들어차면 하늘도 탑도 모두 물속에 내려와 잠긴다. 인적이 없고 해가 저물 무렵이면 노을과 함께 장관을 이루는데 더 신비롭기까지 하다.

미탄사 삼층석탑은 신라 왕경 내에 조성된 탑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석탑이다. 도굴로 기단부와 탑신(몸돌) 일부가 사라진 채 방치되다가 1980년 복원되었고, 보물(제1928호)로 지정되었다.

전형적인 신라 탑의 모습이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있지만 마치 새로 조성한 탑처럼 아주 정갈하고 깔끔한 모습이다. 조각이나 치장조차 없어 간결하며, 차분하면서도 정연하고, 담백하면서도 절제된 세련미가 돋보인다. 약 6m 높이로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168호)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인 석가탑과도 많이 닮았다.

기단부 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적심) 부분에서는 금동불상, 곱돌로 깎아 만든 새, 각종 수정 등 국가의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 땅의 기운을 누르고 땅의 신에게 빌기 위해 매납(埋納)하는 물건이나 제기(지진구)가 출토되었다.


↑↑ 미탄사 터 석축: 쓰임을 알 수 없는 석축들이 풀밭에 일렬로 누워있다. 벌거벗은 석축을 숨기느라 풀들이 바삐 키를 키운다.


미탄사는 여몽전쟁을 견뎠을

고려와 몽골 간의 전쟁(여몽전쟁)은 잔인했다. 몽골은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까지 28년 동안 무려 9차례나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군은 고려 국토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결국 1238년(고종 25년) 황룡사마저 타격을 입었다. 아흐레 동안 불에 탔다고 전해지는 황룡사를 미탄사 석탑은 모두 보았을 테다. 처마와 처마를 맞대고 한 세월을 함께한 황룡사가 무너질 때, 미탄사와 석탑은 통곡하며 치욕의 순간을 버텨냈을 것이다. 주변이 사라지고 인적마저 끊어질 때, 혼자 남은 미탄사 석탑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불타 쓰러지는 황룡사 구층목탑과 화마의 열기에 녹아내리는 장륙존상을 목도했을 미탄사 석탑은 홀로 천년을 통곡하며 버텨왔을 것이다. 최치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당나라로 유학 간 최치원이 돌아왔을 땐 얼마나 기뻐하며 맞이했을까.

미탄사 이야기를 단 한 줄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인가. 풀밭을 헤매며 무슨 단서라도 찾겠다는 마음이 일다가 이내 누그러뜨리고 만다. 풀숲에 숨어 몸을 가린 가련한 도기 파편들이 무슨 말이라도 할 것만 같지만 나는 그들의 침묵을 존중하기로 한다. 파편들을 잇고 이어, 살아보지 않은 한 시대를 마치 살아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내게 어울리지 않다.

바람이 부니 보문들판을 가득 채운 초록의 풀들이 한 방향으로 흔들리며 쓰러졌다 일어난다.

미탄사 터에서의 사색은 여기까지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도 세월에 조금씩 흐려지다가 지워지고 또 다른 미래를 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숨 쉬는 지금을 또렷하게 기억해 두는 것, 사라지고 나면 그땐 그랬었지 하며 회상하는 것도 내 몫이겠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나는 옛것이 되고, 또 다른 지금이 나를 살게 하겠지. 순간을 명징하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 삶에 충실한 태도일 것이다.

구름은 저 혼자 분주하고, 황룡사 터에서 미탄사 터에 이르기까지 이 광활한 대지에 개망초 꽃만 수억만 송이 피어 하늘거린다. 탑을 남겨두고 풀밭을 빠져나오니 저 멀리 당간(幢竿)도 지주(支柱)도 없는 퇴락한 절터엔 혼자 선 탑도 야생초 같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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