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황태자의 방문과 서봉총 비사, 그리고 최남주 선생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6월 06일
공유 / URL복사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은 해방전후를 막론하고 외국인들도 다녀간 특별한 곳이다. 더구나 이런 방문은 당순한 방문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매력적인 기록들을 남겨 더 의미가 깊다. 최부자댁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 사람은 뒤에 스웨덴의 황제가 된 구스타프 아돌프 6세(1892~1973 / 재위 1950~1973)였다. 방문 당시에는 황태자 신분이었다.





서봉총의 이름이 지어진 최부자댁 사랑채, 구스타프 6세 황제의 궁금을 풀어준 문파 선생

1926년 10월, 구스타프 황태자가 일본으로 신혼여행차 와 있었다. 마침 당시 경주에서 신라시대 무덤을 발굴하던 조선총독부 소속 고이즈미 박물관장이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황태자를 초청했다. 부산을 통해 경주로 온 구스타프 황태자는 역사적인 서봉총 발굴작업에 참여했고 그의 이름을 이 무덤에 영구히 남기게 된다.

‘고분발굴’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발굴이 거의 끝나 있었고 결정적으로 왕관과 주요 유물들을 드러내는 마지막 작업만 남겨놓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 고분발굴에 굳이 구스타프 황태자를 초청한 것은 발굴의 성과를 세계에 알리고 그로써 내선일체 된 조선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구스타프 황태자 일행은 1926년 10월 9일에 경주에 도착하여 지금의 경주 불국사역 앞에 있던 ‘철도호텔’에서 묵고 난 뒤 이튿날 노서리에서 진행 중이던 고분 발굴에 참여한다. 황태자는 당시 발굴된 금관을 자신의 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주여, 저에게 이 영광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 무덤의 이름을 스웨덴의 한문식 가차 표현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금관장식에 있는 봉황의 ‘봉(鳳)’자를 합쳐서 서봉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지간한 경주 사람들이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서봉총’이란 이름이 지어진 곳이 다름 아닌 경주 최부자댁 사랑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 구스타프 아돌프 6세 황제.

발굴이 끝난 후 구스타프 황태자 일행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최부자댁 사랑채에 머물게 된다. 아마도 호텔까지 가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이 어떤지 경험해보고 싶었던 황태자의 각별한 청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황태자를 모시던 수행원들은 즉시 최부자댁으로 달려와 문파 선생과 상의했고 선생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때 문파 선생은 귀한 손님들과 함께 침식하던 전례를 처음으로 깨고 황태자 부부에게 사랑채를 통째 내주었다고 한다. 황태자 일행은 일국의 황태자일 뿐만 아니라 부부가 함께 내방하였기에 그에 대한 예우로서 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날 밤 우리나라 고고학사에 기념비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문파 선생님을 통한 최염 선생님의 회고담!

이날 밤,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스웨덴 즉 서전국 황태자가 무덤을 발굴한 것을 기념하여 ‘서전총’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황태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깊은 생각에 잠긴 구스타프 황태자가 “찬란했던 동양의 고대 왕릉에 서양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불가하다. 발굴하면서 보니 금관 정수리에 봉황 같은 새가 세 마리 붙어 있었는데 ‘봉황총’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봉황대’라는 이름의 고분이 발굴된 고분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의 끝에 스웨덴의 ‘서’와 봉황의 ‘봉’자를 하나씩 따서 서봉총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 일행이 최부자댁에 머문 것은 단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하루 동안 황태자는 전통 한옥의 매력과 최부자댁의 진귀한 음식에 심취해서 돌아갔다. 이때 구스타프 황태자는 최부자댁 안채를 보고 싶어 했는데 외국인에게 안채를 보여주는 것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여긴 문파 선생이 만류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뜻을 이루지 못한 구스타프 황태자의 소원은 6·25전쟁의 와중에 결국 이루어지게 된다. 다시 최염 선생님 말씀!

“6·25가 터지고 1년쯤 경과한 때, 일단의 머리 노랗고 눈이 파란 여인들이 갑자기 우리집을 방문했어요. 그들은 스웨덴 병원선의 여군 간호장교들이었어”

6·25가 터진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 세계 유엔 회원국들을 독려하여 한국으로 파병(派兵)하도록 촉구하는데 이 조치에 응해 스웨덴에서도 의료진과 함께 병원선(病院船)을 보내 한국을 지원하게 된다. 최부자댁을 찾아온 간호 장교들이 바로 그 병원선에 근무하던 여군 간호장교들이었다.

“그들이 우리집에 들러 할아버지께 안채를 보여 달라고 청했어요. 무슨 이유로 안채를 보려 하느냐고 묻자 자신들이 파병될 때 구스타프 황제께 신고하러 갔더니 경주에 가면 최부자댁에 들러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반드시 안채를 보고 와서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하라고 했다는 거라요. 물론 할아버지는 이들에게 안채를 열어 보여주었고 후하게 대접해서 보냈지. 이로써 구스타프 황제의 궁금증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간접적으로나마 해결될 수 있었지요!”

구스타프 황태자는 서봉총 발굴 이후 경성과 평양을 방문하며 유서 깊은 우리나라의 모습을 가슴속 깊이 담아 간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경주와 최부자댁에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역사적인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고 서봉총과 최부자댁을 통해 신라와 조선, 우리 고유의 문화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 김유신 장군묘 가는 길목에 만들어진 석당 최남주 선생을 기리는 공원과 추모비.


서봉총의 조선인 최남주 선생과 최정필 교수, 최정대 선생 등 후손들의 오랜 스웨덴 교류

구스타프 황태자와의 관련한 미담이 또 있다. 당시 고이즈미 관장과 구스타프 황태자를 도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왕릉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경주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1905~1980) 선생인데 이 최남주 선생과의 교류를 통해 구스타프 황태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발굴한 무덤의 주인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의 고대인 ‘신라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만약 최남주 선생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구스타프 황태자는 서봉총을 일본의 한 고분으로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젊은 조선인이 고분 발굴에 참여함으로써 이 고분이 조선의 고대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 사실을 알았기에 귀국 후에도 최남주 선생과의 인연을 이어갔을 것이다.

더구나 석당 선생의 아들인 역사학자 최정필 세종대학교 명예교수와 최정대 코리아 타임스 칼럼리스트 등 아드님 형제분들이 지금도 선대의 인연을 이어 한국과 스웨덴 간 민간우호 사절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최정표 선생, 차문화 연구가인 최정간 선생도 경주와 우리나라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최정필 교수는 한국박물관재단이사장을 맡을 만큼 역사학계의 권위자로 활동하며 경주를 위한 각종 연구에도 활발히 참여해 아버님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고 최정대 선생은 국제학술지에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소개하며 동학의 인본평등주의를 세계에 알리며 역시 경주 출신의 명예를 빛내고 있다.

기왕 최남주 선생 이야기가 나온 걸음에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가면 최남주 선생은 문무대왕 수중릉, 임신서기석, 남산신성비, 황복사지 발굴 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분이다. 그러나 이런 공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박물관장과 관계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한다. 더구나 해방 후 정식으로 공부한 학자들 위주로 박물관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또다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선생의 공을 익히 알아온 경주의 향
토 사학자들, 경주 시민들의 노력으로 일부나마 공로를 인정 받았을 뿐이다.

이런 무시와 상관없이 선생은 해방후 경주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조직해 경주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재보존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심지어 자신의 재산을 팔아가며 경주 문화재 보존에 앞장서 무열왕릉 비각과 석탈해왕릉 비석을 세우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를 학계에 소개하고 서봉총 금관이 기생에게 쒸어진 비사, 석굴암 일본 우체부 발견 왜곡에 대한 비사, 일제의 성덕대왕신종으로 탄환을 만들고자 한 비사를 낱낱이 증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다 2006년 9월 2일 한국박물관협회에서 선생의 공헌을 인정해 김유신 장군 묘
 아래 석당공원을 만들고 기념비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선생의 공로가 비로소 우리나라 발굴사의 귀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최남주 선생과 동시대 경주에서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사이토 타다시 선생이 한국 고분발굴 100주년 기념식 차 한국으로 와 최남주 선생에 대해 언급했고 석당공원을 방문해 선생과의 교분을 추억함으로써 선생의 역할이 다시 한번 조명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에게는 분명하게 굴욕의 시간이었고 분노의 시간이었고 회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문화유산과 유물조차 우리 것으로 말하지 못하던 시기였고 해외에서는 우리를 일본으로 알고 찾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경주최부자가 있어 우리의 주거 문화와 예법을 알릴 수 있었고 석당 선생이 있어 서봉총을 제대로 알릴 수 있었다. 나라를 빼앗겼다고 혼까지 빼앗기지 않았음을 이로써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