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사돈댁들, “종가댁 음식은 방송용 대본!”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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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댁과 사돈인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가 서애 류성룡 선생 종택 충효당 모습.

↑↑ 박근영 작가
경주최부자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는 가훈으로 유명하다. 양반가로서 입신양명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시대에 이런 파격적인 가훈을 가지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런 가훈의 배경이 몹시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 최부자댁은 명문가와 사돈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시대적인 잣대로 보면 최부자댁은 혼인 관계로 보았을 때 사돈 쪽이 대체로 훨씬 명문으로 인식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부자댁은 정무공 이외에는 벼슬살이를 한 적이 거의 없으며 정무공만 해도 당시로선 아주 드물게 무반출신으로 공조참판에 제수된 바 있고 사후(死後) 불천위(不遷位-나라에서 자손 대대로 제사를 지내도록 한 위패)를 받았지만 제수된 공조참판을 스스로 사양했을 만큼 당대에도 문반 명문가와 차별받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무공 이후 벼슬을 산 후손은 아들인 최동량 공이 용궁현감, 최국선 공이 사옹원 참봉이라는 말직을 지냈을 뿐이다. 이후의 후손들은 중간중간에 진사나 생원에 합격과에 급제, 양반의 기본적인 품위만을 유지했으니 조선 중후기, 문반 중심의 양반가들 사이에서는 온전한 대접을 못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변치 않은 내력에도 불구하고 명문가들이 최부자댁과 선뜻 혼약을 맺었던 근간에는 정무공의 충절과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원에 사액된 특별한 가문이었음을 명문가들이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전통적인 명문가들이 유명세와는 달리 겨우 이름값만 유지하는 가난하고 팍팍한 삶을 살아온 곳이 대부분이어서 딸들이라도 부유한 집안에 출가시켜 고생을 면하게 하고 부자 사돈의 경제력에 편승하려고 한 계획도 있었을 것이다.



명문가 종손들 의외로 힘든 삶 살아, 일 년 열두 달 제사며 집안일... 한양에서 멀 경우 과거도 못 봐!

여기서 잠깐, 조선시대 명문가의 종가들이 힘겨운 삶을 살았다는 것은 상당히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른바 명문가의 종갓집 종손들은 집안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예우를 받기는 하지만 종손 자신이 당당히 벼슬을 살았거나 재화를 얻는 특별한 능력이 없었다면 그 삶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종가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많다. 그중 종가의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시대 조혼 풍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조선시대 맏이들은 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나이에 비해 일찍 결혼해야 했다. 그래서 지나치게 어렸을 때 자식을 낳다 보니 그 자식들이 덜 야물고 처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왕가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조선시대 왕 중 적장자로 왕이 된 왕이 몇 명 없었고 그나마 왕이 되어서도 단명한 경우가 많았다. 집안의 대를 잇는답시고 어릴 때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온전할 리 없다.

현실적인 문제로 보면 종가는 일이 지나치게 많았다. 당장 제사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지내야 한다. 명문가일수록 조상에 대한 예절을 중시한 것은 당연하고 세도가 높았던 집안일수록 챙겨야 할 제사가 많아진다. 여기서 잠깐 경주최부자댁의 제사를 들어보자. 최염 선생님의 회고!

“우리 집안은 기본 4대조를 기본으로 모셨는데 할아버지 가계보다 할머니 쪽 제사가 더 많았어. 왜냐하면 도중에 재취 온 할머니까지 있어서 일 년 열두 달 빠짐없이 제사를 지내야 했거든. 여기에 불천위이신 정무공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해마다 이조리 종가에 참사했지요”

그러나 최부자댁은 엄청난 부를 가졌으므로 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사돈 맺은 집안은 최부자댁과 사정이 달랐다.

최염 선생님은 최부자댁과 사돈을 맺은 서애 선생 종가, 한강 선생 종가 등 명문들의 제사나 잔치를 자주 봐오셨는데 제사 한 번 지내는 것이 어지간한 잔칫집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 회고하시면서 ‘종가의 부담은 이루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표현하셨다. 여기에 종가로서 참례하고 간섭해야 하는 일의 종류도 많고 절기마다 챙겨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가문에서 내려온 전답이 어지간히 많아도 늘 모자랄밖에 없다는 말씀이었다.

특히 종손은 얽매인 일이 많다 보니 과거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신세였다. 운이 나빠 과거가 열리는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책임지고 3년 상을 마쳐야 했으니 이 시기에 과거를 볼 수도 없었다. 기껏 쌓아온 공부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도 아쉬운 판에 3년 상을 마치고도 과거가 열리는 시기에 제사가 끼면 역시 과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않고 더군다나 길마저 꼬부랑 산길이 대부분이던 시절, 집이 한양에 있다면 또 모를까 지방에 있다면 더더욱 과거 보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경주에서 과거가 열리는 한양까지 가려면 최소한 한 달, 왕복 두 달이 좋게 걸리는 먼 길이었다. 일 년 열두 달 모두 제사를 지내는 달인데 과거 본다고 두 달 이상 집을 비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할 일은 많고 재산은 대를 내려갈수록 줄어들고 과거마저 볼 수 없으니 종갓집이란 그저 종택만 덩그러니 있을 뿐 사실은 빈 껍질에 불과한 곳이 대부분이다.

최염 선생님과 이 부분에 대해 말씀 나누던 중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 있었다. 가끔 TV에서 명문 종가댁을 취재하며 ‘종가의 음식’이 굉장한 듯 방영하는데 이건 매우 의아스럽다는 말씀이었다. 최염 선생님은 그 이유로 명문가로 시집가신 누님들을 예로 들었다.

“안동의 서애 종가와 성주의 한강 선생 댁이 모두 내 누이들이 시집간 집안인데 그 집 종가의 음식이란 것이 실상은 모두 우리 집안 음식이었어. 법주와 육포를 비롯해서 좀 특별하다 싶은 음식은 무엇 하나 우리 집안 음식 아닌 것이 없었지. 그러다 보니 중요한 집안 행사가 있거나 간혹 종가댁을 취재하는 방송이라도 할라치면 누님들이 대놓고 이 음식은 본래 친정인 경주 최부잣집 음식이라고 밝히는 바람에 생질들의 역성을 적지 않게 듣곤 했지!”

최염 선생님 회고에 따르면 최부자댁은 안동을 위주로 성주, 봉화쪽 집안과 혼인을 맺어왔다. 안동은 차치하고 성주 봉화만 해도 오백 리 길인데 일 년 내내 가복들이 이 먼 길을 쉴 새 없이 다녔다고 한다. 그 이유가 대체로 봉송(封送) 때문이었는데 제수 음식을 보낸다는 핑계로 가난한 여식들을 위해 음식도 보내고 피륙이나 돈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돈지간이란 것이 아주 어려운 관계라 내놓고 돕는 것은 예법이나 기분상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라 사돈 집안을 돕는 것도 그럴싸한 명분을 반드시 갖춘 후에라야 도울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얼핏 든 의문 한 가지. 그렇다면 최부자댁은 왜 하필 그렇게 먼 곳으로 혼처를 잡았을까? 그것은 오랜 풍습에 따른 것으로 집안이 멀수록 후손이 번창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는 가계가 멀수록 우수한 유전자를 얻을 수 있다는 과학적 의미를 이미 그 옛날 조상님들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 한 번 어느 지역과 혼사를 트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형편을 잘 알게 되어 또 다른 혼인 관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혼처 멀었던 것은 우수한 유전자 얻기 위한 지혜! 시집간 여인 입장에서는 ‘출가외인’ 말 그대로

따지고 보면 그 먼 곳에 혼처를 잡는 것도 최부자댁 정도 되는 가세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안동까지만 해도 그 옛날 육백 리 넘는 길을 오가며 혼례를 치르자면 어지간히 넉넉한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엄두조차 못 내었을 것이다. 당장 시집가는 딸이나 맞아오는 며느리만 해도 새색시에게 걸리거나 말을 태울 수 없으니 가마를 사야 했다. 가마를 사면 자연히 가마를 질 가마꾼도 있어야 했다. 여기에 혼례에 쓸 예물, 음식, 혼례에 참가할 집안사람들, 예물을 옮기고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할 짐꾼들과 호송원들 등 충분한 인력과 노자가 들었다. 그러니 여간 넉넉한 가세가 아니라면 먼 곳의 집안과 사돈 맺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먼 곳에 혼처를 정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애처로운 일들도 생겼다. 한 번 시집가면 평생 친정 나들이 한 번 못해 보고 늙어 죽는 일이 왕왕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 증조모님은 하회 출신으로 동생과 함께 두 분이 모두 경주로 시집을 오셨는데 증조모님은 우리 집으로, 동생분은 양동의 회제 이언적 선생 종부로 가셨어요. 그런데 우리 증조모님은 몇 번이나 친정을 다녀오셨는데 동생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끝내 친정을 가보지 못하셨다는 거라. 친정 못 가는 대신 우리 집으로 언니를 찾아와 친정 나들이 못 간 회포를 푸셨다고 하지”

심지어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있던 시대였다. 한 번 시집가면 거의 평생 친정 나들이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남녀의 차별이 심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데릴사위 제도가 남아 있어서 결혼한 남자가 처가살이하는 경우가 흔했지만 임진왜란 후 성리학을 핑계로 그릇된 규제들이 만들어지면서 남존여비 혹은 여필종부의 개념이 짙어졌다.

최부자댁으로 시집온 명문가 출신 며느리들도 그래서 친정 나들이가 쉽지는 않았다. 대신 친정 오라비나 남동생, 숙부 같은 사람들이 내왕하는 편에 친정소식을 듣는 것은 다소 쉬웠다. 명문가지만 가난한 친정에서 꿈에 그리던 피붙이들이 자기를 보러 온 마당이니 산해진미를 아까워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부잣집 며느리답게 돌아가는 식구 편에 이것저것 보내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최부자댁은 사돈들을 상객(上客) 중의 상객으로 여기는데 그 내막에는 이런 혼인 정책이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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