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기행[6-1] 경주 황룡사 터(上)

태초의 풀밭으로 남은 삼국시대 국가사찰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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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터 중금당 터에 놓인 장륙삼존상 대좌(받침돌). 누가 걸어놓았는지 연등이 걸렸다.

밤은 고요와 침묵과 쓸쓸함과 적막을 함께 가르친다. 잠을 설치다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눈이 떠진 것은 어쩌면 그 황량한 터를 채운 어둠이 그리워서일지도 모른다. 그곳을 지나는 바람과 그 땅에 뿌리내린 풀들의 부름, 나는 언제부턴가 그들과의 교감에 중독돼 있었다.

대문을 열고 겁 없이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일, 어쩌면 태초부터 몸뚱이에 스민 본능일 것이다. 초지에 서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막힌 경험을 해 본 자로서 중독이라는 표현 외에는 딱히 가져다 붙일 말이 없다.

어둠이 걷히려면 아직 멀었다. 가라앉은 바람에게서 풀 내음이 짙다. 머잖아 비가 오겠다는 것을 직감해 내는 것도 본능이겠지. 그래, 비가 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황룡사 터는 어둠에 침잠하고 있다.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은 태초의 고요가, 그 고요를 함께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되뇌며 숨을 깊게 들이킨다. 나는 천천히 오래된 땅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사람인 냥,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길로 들어선다. 저 풀밭 어디에선가 새벽을 잘라먹은 황룡이 승천을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상상과 사라진 장륙삼존불의 조각조각들이 풀밭을 걸어 나와 나를 옛날로 이끌어줄 상상을 하며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풀밭을 서성인다.

삼국시대 가장 컸다는 왕실사찰 황룡사는, 법당도 부처도 탑도 모두 사라지고 법당을 지탱하던 주춧돌과 부처를 모셨던 석조대좌만 남아 풀밭에 몸을 누였다. 둘러보면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황량한 들판, 그래서 더없이 적막한 땅. 5월이 되고 풀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지만 채워진 듯 비워진 땅이고, 비워진 듯 채워진 땅이다.

짙은 어둠이 묽어지고 뭣하나 눈에 걸리는 것 없는 황량한 대지에 오늘따라 형형색색의 빛깔이 바람에 흔들린다. 연등이다. 석가탄신일을 기념하기 위해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했다던 이 땅에도 누가 저리도 정성스럽게 연등을 달아놓았다. 나는 천천히 풀들 사이로 걸어가 한때는 영화를 누렸던 땅의 이야기를 듣는다.


↑↑ 황룡사 강당 터에서 조각난 상태로 발견된 망새(바래기와). 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것으로 ‘치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던 땅, 황룡사

황룡사 터는 8800여평에 달한다고 한다. 불국사의 8배나 된다는데 내 안목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1976년부터 시작된 황룡사 터 발굴은 1983년 11월까지 8년간 진행되었다. 절터에 형성된 민가 100여호를 매입하여 철거한 뒤 본격 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도 연인원 7만8000명에 달했다. 그만큼 광대한 범위였다.

황룡사 이야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어렵기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이목을 끈다. 진흥왕 때부터 진평왕, 선덕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년에 걸쳐 완공된 대사찰이기도 했다. 신라 불교의 심장이자 자부심이었다. 백제나 고구려보다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이차돈 순교 후 불교를 공인했고, 어느 나라보다 성심을 다해 불교의 꽃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 왕경에는 가섭불이 임했던 일곱 땅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이 황룡사였다.

황룡사가 지어지고 훗날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는데,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에 이르자 문수보살(석가모니 왼쪽에 앉은 부처로 지혜를 맡은 보살)이 현신(現身)해서 말했다. “그대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는 땅이다” 하였다.

황룡사는 처음부터 사찰을 지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신라 제24대 왕) 14년(553, 계유년) 2월에 월성 동쪽에 궁(宮)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궁궐 짓는 것을 멈추고 절을 세우라 명했다.

《삼국사기》미추 이사금 원년(262) 봄 3월, 월성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용을 추앙하고 신봉하는 남다른 신앙심이 있었나 보다. 지금도 황룡사 터를 걷다 보면 시가지 쪽엔 습한 기운이 남아있다. 학자들은 습지를 메워 궁을 지으려 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라 사람들 사이에 이곳에 용이 산다는 전설이나 소문이 있었을 거고, 용이 사는 터전을 망가뜨리는 것에 화가 미칠까 우려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왕은 주저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용보다 더 초월적인 석가모니를 모시는 절을 세우라 했을 것이다. 17년 만인 569년(기축년) 두루 담장을 쌓고 불사를 마쳤다고 한다.


↑↑ 장륙삼존상 대좌 좌우로 제자 상을 세워 놓았던 받침돌이 일렬로 놓여있다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은 어떻게 주조되었나

중금당 터에 오르니 커다란 돌덩이가 일렬로 놓여있다. 부처를 떠받들던 불상 받침돌 대좌다. 정 중앙엔 더 큰 돌덩이가 3개 있다. 장육상과 좌우 2구의 협시불, 즉 금동장육삼존불상이 서있던 받침돌이다. 받침돌만 봐도 얼마나 큰 불상이 서 있었을지 궁금하다. 삼존불상 대좌 양쪽 옆으로는 제자 상을 떠받들던 16개의 대좌가 남았다. 중금당 내부에는 19구의 불상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겨진 대좌는 17구가 전부다.

삼국유사에는 남해에 큰 배가 하곡현 사포(현 울주 곡포)에 와 닿았고 배에 문서가 있었다. 서축(西竺, 인도) 아육왕은 황 철 5만7000근과 황금 3만7000근을 모아서 석가 삼존(三尊)을 주조하려다 성공하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여섯 길의 존용(尊容)을 이루
소서’하는 축원문과 불상 한 개와 보살상 두 개를 실어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현리가 사연을 상세히 왕에게 보고했다. 왕이 듣고 칙사를 보내 그 현의 동쪽에 높고 깨끗한 땅을 가려 동축사를 세우고 세존 상을 모시도록 하였다. 금과 철은 서울(월성)로 실어와 태건(太建) 6년 갑오년(574)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하였는데 한 번에 완성하였다. 중량이 3만5007근이요, 황금은 1만198푼이 들었다. 두 보살상에는 철 1만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이 들었다. 황룡사에 봉안하였다고 기록했다. 장륙삼존불상은 매우 거대하고 웅장했다고 한다. 보는 이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육상의 높이는 1장 5척으로, 5m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 최대 금동불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238년 고려 (고종 16년) 몽골의 침입으로 왕경이 쑥대밭이 되었고 수많은 절과 신라불교의 자부심을 보여주던 황룡사도, 탑과 전각, 장육삼존불상도 화마에 사라졌다.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린 솔거를 아시나요?

황룡사 벽에는 신비로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삼국사기》<열전>에는 한 인물을 소개해 놓았다. 한국 역사에 기록된 인물 중 가장 오래된 화가 ‘솔거’다. 그는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린 인물로 유명하다. 소나무 줄기는 비늘처럼 주름졌고, 가지와 잎이 얼기설기 서리어 흡사 진짜 소나무 같았다. 제비, 솔개, 까마귀, 참새들이 제 집인 양 서슴없이 날아들었다가 머리를 부딪고 떨어져 죽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그림의 색이 바랬으나 새들은 계속 날아들어 부딪고 죽었다. 보다 못한 어느 승려가 솔거의 그림에 새로 색을 입혔는데 그 후로는 새들이 날아오지 않았다.

솔거가 그린 벽화 ‘노송도(老松圖)’의 일화다. 조선 역사서 《동국통감》에도 진흥왕 27년(566년)에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안타깝게도 솔거의 그림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신비롭고 궁금하다.

미천한 신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 솔거라는 인물에 대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천한 신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그가 최고의 화가임을 보여주는 일화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분황사의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와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維磨像)’과 ‘단군초상(檀君肖像)’, ‘진흥왕대렵도팔폭(眞興王大獵圖八幅)’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관음보살 삼상(三像)’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솔거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활약시기 등으로 볼 때 논란이 있다. 단속사와 분황사는 진흥왕 사후에 불사했기 때문이다.

신문왕 시절, 당나라 사람 승요(僧瑤)가 신라로 와서 활약했고, 왕이 명하여 솔거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나, 이 또한 분명치 않다. 그리하여 나는 솔거가 신라인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바람이 분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풀들이 흔들린다. 나는 좀 더 깊숙이 걸어간다. 머지않은 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황룡사구층탑과 대종 등에 관한 이야기는 경주 황룡사 터(下)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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