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암바위, 미역에도 경주최부자의 공이 서리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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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 선생님이 손수 가꾸고 최염 선생님이 다시 일구었던 과수원, 사진에서 월정교 앞쪽과 재매정 앞쪽까지가 모두 과수원이었다.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이 온갖 음식에 각별하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들로 짐작할 수 있지만 이와 함께 흥미를 끄는 또 하나의 산물이 있었다. 그것이 미역이었다. 경주최부자가 미역 생산에도 관계했다고 하면 이게 무슨 문어발식 경영이냐며 웃을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게 훨씬 더 관심이 갔다. 흔히 미역은 바다 근처 어민들이 대충 해안 바위에 들러붙은 해조류를 무작위로 따서 말리는 줄 안다.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는 미역도 꼼꼼한 관리 아래 양식 재배하지만 예전에는 미역이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해조류쯤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당당한 산업으로 자리잡았던 미역, 한 동네 백성의 삶을 좌우했던 귀중한 바위의 쓰임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미역을 제대로 관리했다는 것을 최부자댁을 취재하면서 알게 되었다. 특히 자연산 미역을 생산하는 ‘곽암(藿巖)’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곽암은 문자 그대로 미역바위라는 뜻의 한문용어다. 요즘은 이런 말을 쓰지 않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미역이 나는 바위를 ‘곽암’이라고 해서 이 바위 역시 농지처럼 바위마다 임자가 다 있었다고 한다. 최염 선생님은 이 곽암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당시 울산부터 감포에 이르는 곽암이 대부분 우리 소유였고 전답을 대신 경작하듯 이 바위를 전문적으로 돌봐주는 사람이 있었어. 곽암 관리인이 필요했던 것은 미역이 포자가 붙고 자라고 하는 사이에 일종의 잡초나 미역을 갉아 먹는 해충 같은 것이 생기는데 이런 것을 제때 없애고 관리하지 않으면 미역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미역은 특별히 약을 치거나 비료를 주지 않지만 태풍이 불면 세찬 파도에 포자가 다 쓸려가 버려요. 이때는 아무리 관리를 잘 해주어도 흉년이 될 수밖에 없었어!”

재미 있는 것은 이 곽암 역시 해방 후 농지개혁이 실시되면서 논처럼 경작권이 당시 소작하던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그때 이미 미역농사를 조직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게 당당한 임산업의 한 종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에 가장 많은 곽암을 관리하던 집이 후에 미역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는데 지금까지도 때만 되면 우리집에 햇미역을 보내오고 있다네. 미역 맛이 다른 미역과 다름은 물어보나 마나지. 몇 해 전에 하회 류씨 집안 종부로 간 큰 누님이 어릴 때 먹던 미역이 그립다고 해서 이 집에 연락을 취해 미역을 사겠다고 했더니 많은 양을 그냥 보내준 적도 있었어”

최염 선생님은 할아버지 문파 선생님이 살아계시고 직접 곽암 소작인들과 관계하실 때라면 모를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옛 정리를 잊지 않고 귀한 미역을 보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 책에 일부러 따로 기록해 달라고 하실 만큼 미역과 관련한 사연을 소중히 여기셨다.

나는 뒤에 곽암에 대해 따로 알아보고 싶어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마침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 앞 바다에 울산광역시가 기념물로 지정한 곽암이 한 곳 있었다. 이 곽암은 고려 때 태조 왕건이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운 지방 호족인 ‘박윤웅’에게 12개의 바위를 하사해 미역 독점권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래서 그 바윗돌을 박윤웅돌이라고 부른다는 설명도 되어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12개의 바위를 조선 영조 대의 유명한 어사 박문수가 ‘자신들도 미역을 딸 수 있게 해달라’는 이 지역 백성들의 서원을 받고 전부 국가에 환수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중에 그중 한 개는 다시 박씨 가문에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미역으로 한 동네의 백성들의 생계를 다툴 만큼 생산량이 많았고 그 역할도 큰 바위가 곽암, 미역바위였다는 사실이 짐작된다.


문파 선생님이 일구고 최염 선생님이 다시 가꾼 과수원, 동요 과수원길 추억으로만 남아...!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곳이 최부자댁 과수원이다. 이 과수원 이야기는 이 연재 10번째 단원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문파 선생님이 직접 가꾼 과수원이 전쟁통에 망가진 것을 최염 선생님이 다시 새 과수원으로 가꾸었다는 이야기며 내 어린 시절 볏단을 뽑아 떨어진 사과와 바꾸어 먹었다는 소개를 한 바 있다.

다시 언급하자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교촌 한옥마을 앞으로 흐르는 남천을 건너면 월정교 남단 지점부터 김유신 장군의 유택이라 알려진 재매정지 맞은 편까지 길이 300여 미터, 폭 6~70여 미터에 이르는 넓은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다. 주종은 사과였고 드문드문 자두도 일부 있었다.

이 과수원은 아마 당시 경주에서 가장 넓은 사과 과수원이었을 것이다. 주변은 탱자나무로 울타리가 만들어져 있었고 철원동으로 들어가는 가는 좁은 길이 하나 나 있어서 이 길을 사이에 두고 과수원이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과수원에는 따로 관리인이 있었다. 물론 우리는 그냥 사과밭 주인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 과수원이 더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동요 ‘과수원길’ 때문이다. 과수원길은 1972년 발표된 노래다. 박화목 작시, 김공선 작곡이다. 아마 동요건 가요건 가곡이건 장르를 불문하고 과수원과 관련해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가 이 과수원길일 것이다.

놀랍게도 이 노래의 가사는 어릴 적 내가 본 최부자댁 과수원의 풍경을 그대로 빼닮았었다.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이 가사들은 내가 어릴 적 보았던 풍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당시 과수원 앞은 오릉에서 남천변을 따라 경주국립박물관으로 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닦여 있었다. 아카시아꽃이 피면 그 검은 포장도로를 따라 하얗게 핀 꽃들이 환상처럼 길게 펼쳐졌다.

돌이켜 보면 아카시아꽃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던 이유도 있었다. 그때 과수원은 둘레가 전부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탱자나무는 사시사철 녹색을 띠고 있고 특히 아카시아꽃이 필 무렵이면 새 가지가 쑥쑥 자라 울타리가 평소보다 더 높게 보일 때였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아카시아가 적절히 배치되어 심어져 있었으니 녹색의 탱자나무와 하얀 아카시아꽃, 까만 아스팔트 도로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던 셈이다.

아쉽게도 이 과수원은 내가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면서 한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사이 어영부영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조차 모를 만큼 무심했던 것이다. 지금 그 과수원은 월정교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공영주차장으로 변해 버렸다.

 가끔 그 주변을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어린 시절 추억이 통째로 사라진 듯해 가슴 한쪽이 썰렁하지만 나도 모르게 과수원길 노래가 읊조려진다. 그러면 마치 그림이나 사진처럼 그 넓었던 과수원이 머리 속에 환하게 그려진다.

경주 최고의 명문가 경주 최부자댁, 그 오랜 부를 독립운동과 대학설립에 걸쳐 두 번이나 아름답게 끝낸 문파선생님이 손수 일군 과수원, 그런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똥물까지 직접 퍼나르며 다시 일군 과수원.... 그 역사적인 현장이 사라진 것이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더구나 금쪽 같은 손자에게 과수원을 직접 일구게 한 문파 선생님의 가르침은 현대의 많은 부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보릿단으로 사과를 바꿔 먹던 시기는 최부자댁 모든 재산이 영남재단으로 넘어간 뒤였으니 최부자댁에서 그 과수원을 직접 관리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나로서는 사과로나 동요로나 최부자댁 과수원의 혜택을 적잖이 누린 셈이다.

최부자댁에서 사과 이외에 수확량이 많은 과실이 감이었다. 감나무는 사과처럼 따로 과수원을 만들어서 심는 것이 아니고 선산이나 경작지의 언덕배기 혹은 논과 논 사이나 밭과 밭 사이 그늘을 만들기 위해 밭 한 쪽에 심는 것만으로도 지천을 헤아렸다고 한다.

“과장을 좀 보태어 우리 집 토지를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만큼 넓은 토지와 농지, 임야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거기서 따온 감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얼마나 곳곳에 감나무가 많았던지 감이 나올 철이 되면 한 보름 동안 계속 감만 따러 다니기도 했지. 감을 따면 대소 일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집에 산 같이 쌓아놓고 홍시를 만들거나 곶감을 만들었어. 곶감이 얼마나 많았는지 처마에 널어 말리려 하다 다 널 수가 없어서 아예 지붕에 섶을 깔고 거기까지 감을 널어 말렸지. 한번은 할머니께서 밤에 지붕을 쳐다보다가 이상한 개들이 지붕을 타고 다닌다고 놀라신 적이 있었다네. 알고 보니 집안 아이들이 지붕에 올라가 반건조된 곳감들을 먹고 있었던 것이라”

이외에 배며 대추, 밤 같은 것들 역시 농경지 주변 혹은 선산에 자연스럽게 심어져 있어서 철마다 과일이 익는 시기가 되면 종류를 불문하고 가장 상품(上品)의 것들로만 수십 상자씩 최부자댁으로 날라져 왔다고 한다. 농경시대, 농지와 토지, 임야가 부의 수단이었던 시절 만석꾼 집안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일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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