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시어머니·가족 위해 희생한 열녀들의 전근대사 이야기

건천읍 소재 3개 열녀비에 담긴 열부·열녀의 거룩한 효·희생정신 전해 내려와

이상욱 기자 / 2024년 05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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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본지 151호에 실렸던 월성최씨지비
↑↑ 월성최씨지비


임진왜란 때 열부·열녀 도리지킨 월성최씨(月城崔氏) 기려

건천읍 대곡리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열녀비가 세워진 비각 2곳을 만날 수 있다.

그 중 한 곳이 효자훈속봉사손공봉선열부단인월성최씨지비(孝子訓鋉奉事孫公奉先烈婦端人月城崔氏之碑)다.

본지 제151호(1993년 1월 11일자)에 실린 함종혁 선생의 칼럼에는 임진왜란 당시 월성 최씨 부인에 대한 공적이 기록돼있다.

이에 따르면 최씨는 본관은 월성이며, 밀양손씨 봉선(奉先)의 처다.

최 씨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편과 시어머니를 봉양함에 깊은 부도(婦道. 며느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왜적이 침입했을 당시) 남편 봉선이 그 어머니와 함께 구미산 속에 피했다. 갑자기 왜적이 나타나 그 어머니를 찌르려 하는지라 봉선이 이르기를 “나를 죽이고 어머니를 살라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왜적들은 단칼에 모자를 죽였다.

↑↑ 월성최씨지비

이때 최씨 부인은 왜적들의 앞을 가로막고 남편과 시어머니를 살려보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몸으로 남편을 가리고 손으로 왜적의 칼날을 막다가 손가락이 끊기고 몸이 상해 피를 흘리며 거의 죽게 되니, 왜적들은 이들을 버리고 가버렸다.

최씨 부인은 곧 깨어나 직접 남편과 시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

최씨 부인은 그의 자녀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왜병들과 싸울 때 시어머님, 남편과 함께 죽지 아니한 것은 시어머님과 남편의 시신을 거두려 함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남편이 이미 어머니를 위하다 죽었는데 내 어찌 차마 혼자 살기를 원하겠는가”하고 목매어 자살했다. 이 같은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 임금은 정려를 명하니 작원(건천 2리)에 최씨의 열녀비를 세웠다. 이후 오랜 기간 비바람에 씻기고 수해에 밀려 붕괴 직전에 있는 것을 197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 본지156호에 실렸던 열부순흥안씨정려비각
↑↑ 열부순흥안씨정려비각


자신의 살을 베어 남편 살린 순흥안씨(順興安氏) 이야기

월성최씨지비와 70여m 떨어진 곳에 지금까지 잘 보존돼 온 비각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이 열부순흥안씨정려비(烈婦順興安氏旌閭碑)다.

본지 제156호(1993년 2월 22일자) 함종혁 선생 기고에 따르면 안씨의 본관은 순흥으로 경주이씨 유헌(裕憲)에게 출가했다.

효성이 지극해 30여년간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다가 남편 이씨가 병이 들어 30여년 동안 병석에 눕게 되자 정성으로 간호했다. 하지만 효험이 없어 애태우던 중 한 의원이 이르기를 “사람고기가 좋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서슴없이 자신의 허벅다리살을 베어 푹 달여 먹여 회생시켰다는 것이다. 그 후 안씨 부인은 살을 베
어낸 상처로 인해 앓기를 수개월을 보내다 그만 죽고 말았다.

안씨 부인이 행한 사실을 주민들이 알고 가상히 여겨 관아에 알려 상을 받게 했다. 또 열부 안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고종 33년(1896년) 성창(成昌)에서 포상을 받고 193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퇴락이 심한 것을 문중에서 재건해 잘 정돈했다.

↑↑ 본지 155호에 실렸던 절부안동권씨표려비.
↑↑ 절부안동권씨표려비


건천읍 금척리 소재 ‘절부안동권씨표려비(節婦安東權氏表閭碑)’

건천읍 금척리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한 주유소 옆에는 시멘트 철근 골조로 된 비각이 하나 세워져 있다.

본지 제155호(1993년 2월 15일자)에 따르면 이 비각은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인을 기리기 위해 1938년 세워졌다. 하지만 오랜 세월로 훼손이 심한 것을 1972년 현재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고 전한다.

동경통지(東京通誌)에 따르면 권씨 부인은 崔海南(일명 崔南逸)의 아내다.
오랫동안 큰 흉년이 들어 남편의 형제 세 집이 모두 기아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가족들을 모두 한 집안에 모으고 의식(衣食)을 함께 했다.

↑↑ 절부안동권씨표려비

그러던 중 권씨 부부가 함께 병을 얻어 4~5일이 지난 뒤 권씨 부인이 낙태를 하여 혼미 중에 있었다. 남편이 또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수혈시켜 회생하게 했다. 그러나 끝내 남편 최씨가 죽자, 4일 동안 단식을 하며 그를 따라 죽으려하다가 자식들의 호소로 마음을 돌렸다. 이후 기울어져 가는 가세를 다시 일으키고 자녀들을 잘 교육시켰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라에서는 권씨 부인을 절부로 정려하고 높이 160cm, 너비 45cm, 두께 27cm의 비석을 세워 권씨의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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