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포와 집장, 청어과메기와 전복포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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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댁 안채에 놓여 있는 큰 독들.

↑↑ 박근영 작가
앞에서 밝힌 최부자댁 전통 가양주는 최염 회장님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집안에서도 전통을 잇거나 특화시킬 생각을 하는 듯했지만 그 이외의 음식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내가 음식에 대해 상세하게 질문하기 시작하자 놀라운 사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남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먹거리야말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온 나로서는 최부자댁이 전승해온 먹거리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그 어떤 기막힌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더구나 그 깊이 있는 먹거리의 일부나마 취재 과정에서 맛보게 된 것은 최고의 경험이자 복이었다.


짚에 올려 말린 육포, 파와 무를 넣은 집장, 40개 넘는 큰 독으로 둘러싸인 경주최부자댁


경주최부자댁 전통 음식 중 내가 또 하나 맛보고 감탄한 것이 ‘육포’다. 이 육포 역시 서애 선생 종손 취임식에 참가했을 때 먹어본 것이며 고맙게도 15대 종부님께서 따로 포장까지 해 주셔서 가족들과도 나누어 먹었다. 아들이 육포를 맛보고는 이렇게 맛있는 육포가 왜 시중에 판매되지 않는가 하며 감탄하기도 했다. 시중에 파는 육포들이 맛이 강하거나 지나치게 달거나 짠 경우가 많아 쉬 질리는데 비해 최부자댁 육포는 은근한 향과 맛이 시중의 육포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굳이 맛을 설명하자면 고소하기도 하고 구수하기도 하고 적당히 간이 되어 있지만 짜지 않았다.

“육포는 귀한 손님들 주안상에 반드시 들어가는 필수품이라 한 번씩 만들 때는 넉넉히 만들었어요. 넓은 채반에 말리는데 한꺼번에 스무 개 이상의 채반을 사용했을 만큼 넉넉하게 만들었거든!”

최염 선생님은 육포 만드는 방법을 소상이 기억하고 계셨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댁에서도 평소 자주 육포를 만들어 드시기 때문이었다.

그 제작 과정을 잠깐 소개하면 이렇다. 육포는 기름기가 덜한 소고기 안심을 저며 참기름과 갖은 양념을 여러 번 덧칠하면서 채반에 올려 말린다. 이때 채반은 대나무 채반을 쓰는데 그 위에 언제나 황금빛 나는 볏짚을 깔아 그 볏짚 위에 다시 육포를 늘어 말렸다. 그러면 볏짚의 구수한 향이 육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훨씬 깊은 풍미를 낸다. 나는 특히 볏짚 위에 육포를 말린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전을 하거나 생선을 구우시면 반드시 채반에 잘 말린 짚을 올리고 그 위에 음식을 올려놓던 기억이 나서였다. 이것은 비단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 시대 어머니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하면 볏짚 사이로 통풍이 잘 되어 음식이 쉬 상하지 않고 볏짚에서 나는 구수한 향이 음식에 자연스럽게 베어 풍미까지 더해지는 것을 예전 어른들은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는 좋은 볏짚 구하기가 어려워서라도 최부자댁 육포를 흉내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이 육포는 문파 선생님께서 특히 즐겨 드시던 안주 겸 간식이었고 귀한 손님들이 오시면 잊지 않고 싸드리는 선물이 되기도 했다. 최부자댁 전통 가양주를 이 육포를 안주 삼아 마신다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최염 선생님은 가양주와 육포를 최부자댁 고유의 브랜드로 키우고자 가양주를 ‘교촌법주’로 육포를 ‘교촌육포’로 상표등록을 해 놓으셨다니 후손분들이 관심 가지고 양산할 날을 기다린다.

최부자댁은 장도 특별하게 만들어서 먹었다. 최염 선생님은 ‘집장’이라 이름 붙인 장을 담그는 법을 설명해주셨다. 이것은 파와 무를 된장과 버무려서 오래도록 숙성시킨 장인데 짜지 않고 구수하게 맛이 좋다고 하셨다. 파와 무는 따로 꺼내 짠지로 먹기에도 좋았다는 말씀이셨다. 일반적인 집에서 무는 보통 짠지로 박아 먹지만 파를 박아 먹는다는 것이 특이하게 여겨졌다.

간장도 다른 집들에 비해 특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부자댁은 간장을 달일 때 기존의 간장을 새 메주에 부어서 달였는데 이렇게 하면 맛이 깊어서 다른 집 간장과 확연히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과 간장을 중하게 여기는 데다 문파 선생님 당대에는 사람들의 내왕도 잦다 보니 최염 선생님이 어렸을 때만 해도 최부자댁 장독대는 줄잡아 마흔 개가 넘는 큰 독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모두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담는 독이었다는 것이다.

“한 번씩 장을 담그면 콩이 수십 가마니씩 들어갔지. 메주가 뜰 무렵이면 집안이 온통 메주 냄새가 나서 숨쉬기 싫었을 정도였어요!”

가끔 지금의 최부자댁에 들러 안채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장독대다. 지금도 어지간한 곳에서 볼 수 없는 큰 독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지만 이것은 예전의 독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양이라는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금보다 더 크고 많은 독들이 휘감고 있을 최부자댁을 상상해보면 과객이 사라지고 사람조차 살지 않게 된 지금의 최부자댁이 그렇게 허허로울 수 없다.



구호식품이 된 청어과메기, 호사스러움을 내재한 전복포... “그러고 보면 호화 음식이 많았어요...!”

최부자댁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전통 음식이 과메기다. ‘과메기’하면 요즘 포항에서 나오는 꽁치 과메기를 떠올리겠지만 이 과메기의 원류이자 가장 큰 소비처가 최부자댁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단, 전통적인 최부자댁 과메기는 꽁치가 아니고 청어일 뿐이다. 청어과메기는 최부자댁에서 특별히 주문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먹던 특산물이었다. 아쉽게도 한류성 어종인 청어는 해방 후 우리나라 바다가 이상기온으로 따뜻해지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이유로 과메기가 난데없이 꽁치 과메기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청어과메기는 비리지 않고 담백하여 꽁치 과메기와 비교할 수 없는 풍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최근 러시아 쪽에서 수입된 청어로 만든 과메기도 일부 유통되는데 일부러 사서 먹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과메기를 만드는 방법이 나빠서인지 꽁치 과메기에 비해 특별히 더 맛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꽁치에 비해 확실히 덜 비리고 기름기도 꽁치 과메기에 비해서는 덜했다.

경주나 포항 근처에서 어느 순간부터 꽁치 과메기가 유행했던 것은 청어가 사라진 반면 꽁치가 이 근처 바다에서 집중적으로 많이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꽁치는 정어리와 함께 경주에서 가장 흔한 생선이었다. 가격도 아주 싸서 시장에 가면 꽁치 한 채반, 30여마리를 지금 돈 가치로 몇천 원이면 넉넉히 살 정도로 흔했다. 어머니께서 꽁치 사오시는 날에는 연탄불 화덕에 꽁치 기름이 떨어져 끓어 넘치곤 했다. 기름이 잘잘 끓는 꽁치를 연탄화덕에 구우면 뼈까지 바싹하게 구워져 통째로 꽁치를 씹어 먹기도 좋았다. 정어리는 이보다 더해 아예 머리째 튀게 먹을 정도였다.

최부자댁 과메기는 특히 다른 용도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청어과메기는 최부자댁 과객 맞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일종의 구호식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뒤에 나올 최부자댁 과객맞이에서 보다 상세하게 밝히겠지만 적어도 과메기에 관한 한 최부자댁이 가장 중요한 생산처이자 가장 왕성한 소비처였던 셈이다.
그러나 최염 선생님 말씀을 따르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전복이었던 듯싶다.

“뭐니뭐니해도 전복만큼 특별한 음식은 없었어요. 전복은 자연 상태의 생복과 말린 전복 모두를 귀하게 취급했어요”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생복은 조개 껍질을 벗겨낸 다음 내장으로 젓갈을 담아 먹었는데 이게 일품이었던 모양이다. 전복 살은 열십자로 칼집을 낸 다음 갖은 양념을 곁들여서 구워내면 최상급 요리가 되었다. 껍질과 내장을 제거한 전복을 고추장에 절여서 만든 전복장도 특별한 맛을 내는 별미였다고 한다.

“전복살 말린 것도 안주로는 단연 최고지. 전복 살을 열 개씩 대꼬챙이에 꿰어서 말리면 마른 빛깔이 금빛이 난다고 하여 이것을 ‘금복’이라 불렀는데 다 마르고 나면 너무 딱딱해서 이가 들어가지 않고 씹히지도 않을 지경이었어요. 이것을 칼로 잘 쪼갠 다음 겉을 도려내고 속을 먹으면 아주 쫄깃쫄깃하고 맛이 좋았지!”

이렇게 설명하시던 최염 선생님은 ‘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에 호사스러운 음식이 꽤 많이 있었던 셈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최염 선생님 어린 시절에는 이미 최부자댁이 파산한 상태였어도 그 명맥을 유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염 선생님이 태어나서 자랄 시기에는 최부자댁 모든 재산이 독립자금으로 상해로 건너간 뒤였고 그로 인해 전재산이 일제에 차압 당한 시절이었는데도 이런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만약에 부를 잃지 않았다면 어떤 귀한 음식들을 더 기억하고 계실지 모를 일이다.

최부자댁에서는 제수용품으로 굴비도 매우 중하게 쳤고 다량으로 구입하던 생선이었다고 한다. 다만 굴비는 일상의 밥상에 오른 적은 별로 없었고 주로 제수로나 손님들을 위한 찬으로 사용되었다. 굴비는 서해안에서 주로 잡혔으니 당시의 유통체계나 보관 방법에서는 쉽게 관리하기 어려운 품목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부자댁이라도 시대적인 특성은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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