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 기운을 지켜온 보비림, 뒤솔밭

마을 곳곳서 펼쳐지는 자연의 경이로움

박근영 기자 / 2023년 0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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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댁 기운을 살리던 후원 보비림

“인자 집을 옮겨도 될 만큼 나무들이 자랐디라, 이사 함 해보자”

교촌을 둘러보고 온 최기영 공(1768~1834)의 한 마디가 집안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이 큰 집을 옮겨야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가복들은 일사불란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싼 짐은 우선 근처의 집들로 옮겨 두었다.

짐을 싸고 바로 이사할 수 없었다. 교촌에는 아직 집이 지어지지 않았고 이 큰 집을 교촌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큰 공사가 시작됐다. 우선 기와를 내리고 위에서부터 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해체된 집들의 기둥은 정확하게 두 자씩 잘라내 옮겨갈 준비를 시작했다. 높이 지어 올린 솟을대문도 작게 줄였다. 교촌으로 가려면 무엇이건 작게 낮춰야 했다.

한편 교촌에서는 더 큰 토목공사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집터를 전부 깎아내기 시작한 것은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수수께끼처럼 보였다.

사실은 바로 옆에 향교가 있어서 이 향교보다 정확하게 석 자 낮도록 땅을 깎아낸 것이다. 땅을 깎아내자 흙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인부들은 집터 뒤쪽으로 이 흙들을 쌓아 올렸다. 땅을 거의 깎아내고 보니 쌓아올린 흙더미가 마치 작은 산처럼 보였다.

이곳에 일제히 나무를 심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흙을 나르고 나무를 심던 인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피로를 호소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커다랗게 가지를 뻗은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아래 마련된 멍석으로 올라가 드러누웠다. 이미 공사 뒤쪽으로는 심은 지 수십 년 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울창한 괴목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 최부자댁 보비림


최부자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 보비림, 교촌 사람들에게는 삶의 휴식처이자 놀이터

교촌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최부자댁만 보고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요즘은 월정교가 재건되어 있고 교촌 한옥마을이 있어서 그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최부자댁을 답사하기 위해 방문한 사람에게는 정말 수박 겉핥기와 같은 일이다. 그러나 최부자댁을 일부러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다보니 오직 최부자댁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코스가 되고 말았다.

이미 독자들은 교촌에서 근래 새로 지은 현대식 한옥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기와집들이 최부자댁과 관련한 집들이라 한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집들만큼 귀한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 최부자댁 집 뒤로 넓게 펼쳐져 있는 보비림(補備林)이다.

이 보비림에 가면 수령(樹齡) 300년 이상, 둘레가 족히 3~4미터는 되고 높이가 30미터는 쉽게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져 있고 최근에 심은 감나무가 밭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들은 교촌 최부자댁의 출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이야기를 안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이 숲을 교촌 사람들은 ‘뒤솔밭’ 또는 ‘뒤송지’라고 부른 곳이다. 솔밭 혹은 송지(松地)라는 말을 보면 소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솔밭이 없어져 버렸다. 솔밭이 있던 자리는 오래 관리를 하지 않아 변이를 거쳐 아카시아나 잡목으로 뒤덮여 있다. 솔밭은 보비림으로 들어서다 왼쪽 9시 방향으로 보이는 곳에 10여 미터 높이의 둔덕이 있는 곳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족히 10여미터는 될 만한 높이의 소나무가 100여주는 넘게 심어져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뒤송지나 뒤솔밭이라 부른 이 숲 이름은 이렇듯 소나무가 있어서 불린 이름이었던 것이다.

소나무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 숲은 교촌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쉼터 같은 곳이었다. 특히 여름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들이 넓은 그늘을 드리운 덕분에 평상을 두거나 멍석이나 가마니를 깔고 마을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즐겼다.

↑↑ 소나무 있던 자리가 변이로 소나무보다 잡목들이 우거졌다.

나에게도 이 뒤솔밭은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먼저 이곳은 토끼풀과 염소를 위해 풀을 베던 곳이었다. 그 시절 시골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에 가축들을 키우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 역시 집에서 키우던 토끼와 염소 같은 가축들을 위해 이곳으로 자주 풀을 베러 다녔다. 뒤솔밭 둘레에 아카시아가 우거져 있어서 이 나뭇잎을 따서 먹이기도 했고 뒤솔밭 이곳저곳에 무더기로 나 있는 바랭이풀을 뜯어 가축들에게 주기도 했다. 큰 나무들이 많다 보니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 뛰놀던 아이들 누구 하나 이 숲이 왜 그곳에 있었고 누가 숲을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어른들도 그저 뒤솔밭이 있는 것만 알았지 왜 만들어 놓았는지 설명해주는 사람들의 없었다. 추측컨대 최부자댁 후손들은 당연히 내막을 알았을 테지만 그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해줄 필요도 기회도 없었을 성싶다.

그런 놀이터이자 쉼터였던 곳이 최부자댁과 명운을 함께 한 보비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최부자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10년 이후부터다. 그렇다면 보비림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위에 소개한 이사 현장에서 잠깐 소개했듯 최부자댁은 원래 지금의 내남면 이조리에 있었다. 흔히 경주최부자의 정신적인 시조로 알려진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명성에 비해 부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청백리로 공식인정될 만큼 청렴결백하였기에 나라로부터 받은 녹봉 정도로 사신 분이다. 그 셋째 아들인 최동량 공은 현감정도의 벼슬을 살았고 역시 녹봉 받은 만큼 살았던 분이다. 부자가 된 것은 그 뒤를 이은 최국선 공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이앙법을 도입하면서부터였는데 최의기 공과 그 후손들인 최승렬 - 최종률 -최언경 - 최기영 공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조에서 지냈다.


↑↑ 최부자댁 보비림


결정적으로 부족한 배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이사하기 두 세대 전부터 나무를 심은 최부자댁 선조들

최부자는 최기영(1768~1834) 공 대에 이르러 교촌으로 옮겨왔는데 이때는 경주 인근에 첫손 꼽히는 부자로서 완전히 입지를 굳혔을 때다. 이조에서 교촌으로 옮겨온 구체적인 사연은 이후에 다시 말하겠지만 교촌으로 이사하는 데는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오랜 계획과 꾸준한 준비를 거쳐야 했다.

기본적으로 교촌은 풍수학적으로 터가 아주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때는 요석공주가 살았던 곳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였으니 적어도 왕가의 기운을 품었던 터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부자댁에서 보면 경주의 성산(聖山) 남산이 정면으로 뚜렷이 보인다. 교촌 앞으로 흐르는 남천은 예로부터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젖줄로 배산임수에서 임수의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배산 즉, 집 뒤쪽으로 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착안한 것이 보비림이다. 보비란 말은 ‘모자란 것을 갖춘다’는 뜻이다. 즉 보비림은 모자라는 풍수학적 약점을 채우기 위해 조성한 숲이라는 말이다. 경주 최부자는 이런 풍수적 사실을 간파하고 이사하기 훨씬 이전부터 철저한 이사계획을 세운 후 미리 실현했다.

실제적인 이사는 최기영 공 대에 이루어졌지만 그 시작은 최기영 공의 할아버지인 최종률(1724~1773) 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최기영 공이 아주 어릴 때나 그 이전부터 미리 교촌의 땅을 사들이고 기운을 보충하는 보비림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보비림이 충분히 커서 넉넉히 산처럼 보이는 배산(背山)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사한 셈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곳이 또 다른 교촌의 명소 중 한 곳인 ‘숙연당’이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와 구체적인 보비림에 대한 긴 이야기는 다음 호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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