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마당, 흉년에 빛을 발한 최부자댁 또 다른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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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영 기자 / 2023년 0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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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나눈 교촌의 소통창구 큰마당.

교촌의 중심은 당연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경주최부자댁 종택이다. 경주최부자댁이 교촌으로 이사온 이후 대대손손 지키고 살고 있으니 달리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최부자댁을 진정으로 최부자댁 답게 하는 중요한 공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최부자댁 앞에 넓게 펼쳐진 공터다. 넓이가 15미터, 길이가 60미터 정도 되는 이 공터는 마을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곳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 이 공터를 왜 만들었는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이 공터는 최부자댁이 처음 생길 때부터 있었던 공터였음은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공터를 큰마당이라고 불렀는데 마당치고는 이름 그대로 정말 넓은 마당이었다. 큰 기와집이 많다는 것 이외에 한적한 시골이었던 이 교촌에 도대체 왜 이런 넓은 마당이 필요했을까?


큰마당은 소통의 장이었고 정보전달의 공간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누구 한 사람 뭐라 하지 않았다.

비록 만들어진 의도는 몰랐으나 큰마당은 마을 사람들이 크고 작은 일을 벌이는 중심지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마을에서 철마다 여는 풍물놀이의 시작과 끝도 큰마당이었고 마을 공동의 큰 행사를 열 때도 이곳에서 했다.

아주 가끔씩 경주시에서 시민들 대상으로 영사기를 돌렸다. 그때마다 동네 통장 아재가 ‘오늘 밤에 큰마당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며 반드시 나와보라고 집집마다 알리고 다녔는데 ‘영화’라는 말에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시간에 맞추어 큰마당으로 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럴 때 큰마당에는 응당 넓은 차양이 하나 쳐진 후 그 아래 영사기 놓을 책상이 설치되고 영사기 맞은 편 10여 미터에 하얀 스크린이 설치되었다. 스크린 앞으로는 멍석과 가마니가 깔리고 동네 주민들은 다투어 좋은 자리를 찾아 않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영화란 것이 ‘대한뉴스’ 수준도 안 되는 홍보성 흑백 영사물이어서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도 시골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영사기를 통해 사진과 동영상이 자막에 비춰진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좋은 구경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큰 역할을 하는 곳이 이 큰마당이었다. 이 큰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윗마을이라 했고 서쪽은 아랫마을이라 불렀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수시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패를 갈라 공차기도 하고 걸핏하면 전쟁놀이도 했다. 전쟁놀이라고 했지만 이때의 놀이는 고무줄 새총과 활까지 동원하는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아이들끼리의 전쟁이어서 간혹 돌맹이나 화살에 맞아 다치는 아이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긴 몽둥이와 대나무 장대를 들고 휘두르다 보면 머리가 터지고 손이 깨지는 일도 흔했지만 된장 한 덩이를 바르는 것으로 대부분 부상이 무마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마당에서 하루종일 욕설과 함성이 난무하고 악쓰는 소리, 우는 소리, 웃는 소리와 온갖 난리굿을 떨었는데도 최부자댁은 물론이려니와 그 근처의 어느 큰 기와집에서도 동네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못 놀게 하거나 야단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최부자댁이 바로 근처에 있다고 해서 조심하거나 망설이는 아이들도 없었다. 가끔씩 공을 차다 공이 근처 큰 집들의 담장을 넘어가면 누구랄 것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대문으로 달려가 공을 주워오기도 했다.

큰마당의 기능은 또 있었다. 6~70년대는 텔레비전은 거의 없고 라디오도 한 집 건너 한 대씩 있었던 시대였다. 신문이 있었지만 신문 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살만한 사람이고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야 했다. 그런 만큼 국민들이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국가에서 비행기로 삐라를 살포했다. 내 기억에 일 년에 서너 차례, 아마도 3개월에 한 번쯤 삐라를 뿌렸을 것이다. 삐라가 뿌려지는 날은 파란 하늘에서 비행기가 날아가고 그 꽁무니로 하얀 종이가 마치 반짝이 비닐 가루 떨어지듯 흩날리며 내려왔다. 그 종이의 대부분이 큰마당과 최부자댁으로 떨어졌다. 하늘에서 보면 최부자댁 사랑채가 불에 타 공터처럼 변했고 큰마당이 목표점으로 보였을 테니 교촌에 삐라를 뿌린다면 그 두 지점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삐라가 뿌려지면 동네 아이들은 벌떼처럼 큰마당과 최부자댁으로 달려 들었다. 아이들은 경쟁하듯 삐라를 주운 이유가 딱 하나, 딱지를 접기 위해서였다. 종이 자체가 귀한 시절, 삐라는 딱지 접기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재료였다. 그 내용은 대부분 대통령이 그려져 있었으니 보나마나 정부를 홍보하는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그런 내용은 볼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삐라는 딱지로 사용되다 종국에는 아궁이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로 사용되며 원래 목표보다 훨씬 다양한 기능을 하며 최후를 마쳤다.

이런 대략의 일로 미루어 큰마당은 동네 주민들의 소통의 장이었고 정보전달의 공간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최부자댁이 교촌에 들어오면서부터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나눔의 공간, ‘사방백리에 굶어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 그 역사적인 장소

이 큰마당에 대해 어린 시절 내가 들은 아주 특별한 쓰임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 할매’가 해주신 말씀이었다.

“한 번은 억수로 큰 숭년이 져가 사람들이 마케다 굶어 죽을라 캤디라. 그때 이 마다(마당)서 가마솥을 질다랗게 걸어놓고 죽을 쏘가 농갈라 줬디라”

우리 할매는 돌아가실 때 연세가 여든넷이셨는데 그때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역산하면 1891년생이시니 경주의 근현대사를 다 보고 살아오신 셈이다. 그런 할매가 당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할매의 말씀은 내가 본격적으로 최염 선생님을 통해 최부자댁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떠올랐다.

큰마당을 왜 만들었느냐는 내 질문에 최염 선생님은 풍수적으로 대문 앞이 탁 틔어야 복이 들어온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내가 할매께 들은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당신도 무릎을 치셨다.

“맞아, 내가 어릴 때는 일제 강점기고 가산이 다 일본놈들에게 빼앗겼을 때라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흉년 들면 거기서 구휼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 보통 죽을 쒀서 나눠주었는데 그걸 알려주신 분이 계셨구만!”

최염 선생님 당대에는 백성들에게 무얼 나누어 주지 못했지만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휼 이야기를 오히려 우리 할매의 증언을 통해 들으신 최염 선생님은 무척 감회롭게 생각하셨다. 그때 문득 내가 경주의, 교촌에 살게 된 것에 대한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방백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큰마당은 바로 경주최부자댁의 가장 큰 가르침인 이 가훈을 실현한 역사적인 자리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큰마당이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또 다른 쓰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큰마당이 본격적으로 ‘요석궁’의 주차장으로 쓰인 것이다. 요석궁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있었지만 초등학교 들어간 후 일본인 관광객들이 밀어닥치면서 그들을 실어나르는 대형 버스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점심시간이나 저녁 시간이 되면 연이어 몰려드는 관광버스들로 인해 우리들의 놀이터는 중요한 하나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아이들이 사라진 큰마당에는 동네 아지매들이 기념품을 들고 나타났다. 요석궁에 관광버스가 들어오고 버스 문이 열리면 동네 아지매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파는 물건은 자수정 목걸이, 조개나 복숭아 또는 살구씨로 만든 목걸이, 페넌트, 석가탑이나 다보탑 모형, 기타 경주 인근에서 파는 관광기념품들이었다. 그게 시중 상점과 품질은 비슷하면서 가격은 반 이하였다. 성가셔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내밀어 보이는 아지매들의 호객 소리와 짧은 일본어들은 큰마당의 새롭고 오랜 변화였다.

대형 관광버스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교촌을 둘러싸고 있던 길에도 변화가 생겼다. 계림을 지나 들어오던 작은 길이 어느 날 두 배 이상 넓어졌고 남천교 쪽에서 오던 길도 두 배 이상 넓어졌다. 취로사업을 통해 동네 주민들 상당수가 이 공사에 투입되었고 일요일에는 동네 학생들이 동원되어 크고 작은 돌을 골라내 길을 고르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길로 하루에 수십대씩의 관광버스들이 드나들었다. 요컨대 지금 교촌을 드나드는 길의 기본적인 형태가 이때 만들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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