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증의 서막. 교촌과 주변에는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마을 곳곳서 펼쳐지는 자연의 경이로움

박근영 기자 / 2023년 0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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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져 있는 경주 최부자댁 후원

내가 처음 본 교촌마을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우선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무슨 기와집들이 그렇게 많은지 어린 내게는 무척 낯설고 신기했다. 교촌으로 이사 오기 전 황남동 고분 아래 초가집에서 좁은 방에 육남매가 뒤엉켜 살았는데 이사 온 집은 반듯한 기와집이었고 방이 무지무지 넓었고 방앞에 길게 가로 놓인 쪽마루와 큰 대청도 있었다. 뒤에 아버지께서 큰아버지와 함께 경주최부자댁의 권속인 ‘구새댁’을 사서 안채는 큰아버지가, 사랑채는 아버지가 각각 나눠 살게 된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그냥 넓은 마당이 딸린 기와집에 사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우리집과 큰집은 원래 한 집이었던 만큼 담이 없어 좋았다. 그런데 이 집 뒤쪽에 작은 쪽문이 하나 있었다. 쪽문의 크기는 겨우 어른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높이와 넓이였다. 나는 단순히 이 쪽문이 문 뒤쪽을 통해 그 뒤의 숲으로 가는 문쯤으로만 알았는데 뒤에 이 문의 쓰임을 제대로 알고 나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부자댁 뒤쪽 뒤솔밭은 최부자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놀라운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하간 쪽문을 나서서 골목길을 조금만 걸어 약간의 경사가 진 언덕길을 올라가면 최부자댁을 앞으로 둔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 숲에는 나 같은 아이들이 서너 명은 손을 잡고 둘러야 할 만큼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이 숲 역시 내가 어릴 때는 그냥 단순한 숲일 뿐이었고 우리는 이곳을 ‘뒤송지’ 혹은 ‘뒤솔밭’이라 대충 불렀다. 그런데 이 숲 역시 경주최부자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놀라운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경주최부자댁 책을 쓰면서 알 수 있었다.

그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넓은 밭이 있었는데 그게 딸기밭이었다. 그 딸기밭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솔밭이 나오고 그 솔밭 가운데는 능이 있었다. 이게 내물왕릉이란 사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뒤에 안 일이지만 이 능은 동네 아이들에게는 좋은 놀이터였다. 그 능 앞에 크고 반듯한 돌을 깎아 제단을 만들어 놓았고 그 제단에 붙여 어른 엉덩이가 들어가도 될 만큼의 돌의자도 놓여 있었다. 이게 제단이건 아니건을 떠나 아이들에게는 이른바 ‘임금놀이’하는 놀이기구일 뿐이었다.

그 내물왕릉을 지나면 녹슨 철조망이 가로쳐져 있었고 그 철조망을 지나면 동네 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밭뙈기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 밭을 지나면 다시 철조망이 나오고 그 철조망 안쪽에 거대한 숲이 펼쳐졌다. 그게 바로 계림(鷄林)이다. 이 계림도 앞의 뒤솔밭과 연관되어 매우 감동적인 사연을 가지게 되는데 이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 안 일이다.

뒤솔밭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 아주 얕은, 산이라기보다 얕은 언덕에 가까운, 어찌 보면 큰 무덤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곳에 소나무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었다. 이 숲이 뒤솔밭이라 불린 것은 바로 그 소나무 구릉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구릉을 넘어가면 넓은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포도밭 맞은편에 놋전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포도밭 아래로는 아주 작은 샘이 하나 솟아나고 있었는데 샘의 크기보다 수량이 많아 그 아래쪽 논과 미나리꽝에 농사지을 물을 대고도 남았다.

우리 집 앞쪽으로 약 120~130미터쯤 걸어 나오면 남천이다. 남천은 그야말로 보물단지 같은 곳이었다. 맑은 물에는 올챙이와 개구리가 지천으로 살고 있었고 붕어, 송사리, 버들치, 돌고기, 미꾸라지, 갈겨니, 종개, 모래무지 같은 물고기들이 쉴 새 없이 헤엄치고 있었다. 남천은 물이 깊지 않아 깊어봤자 어른들 허벅지까지 물이 흘렀고 보통은 무릎 아래쪽 정도로 흘렀다. 그러나 교촌에서 좀 위로 3~400미터쯤 올라가면 ‘문디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물이 회돌이하면서 어른들 가슴께까지 물이 찼다. 거기서 더 올라가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아래쪽으로 남천 물길을 빼는 보막이 공사를 해놓았는데 이곳도 보막이 탓에 물이 깊었다. 아이들 키로는 한 길이 넘을 만큼 깊어 물 색깔이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남천은 사시사철 인근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놀았으니 천렵은 당연한 사시사철 놀이고 여름에는 천연 수영장이었고 겨울에는 얼음 썰매장이었다.

남천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지금 교촌 앞 남천에는 그 모습이 대거 사라지고 말았지만 3~40년 전만 해도 남천에는 빛깔 고운 황금 모래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남천은 원래 모기내라는 의미의 문천(蚊川)으로도 불렸는데 이 문천의 모래가 어찌나 곱던지 물길을 거슬러 거꾸로 흐른다는 뜻의 문천도사(蚊川倒沙)라는 유명한 고사가 있을 정도다. 경주에 대해 조금만 공부해본 사람이면 모두 알만한 ‘삼기팔괴(三奇八怪)’ 중의 하나가 바로 남천에서 비롯된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뒤에 안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남천에는 빛깔 좋은 모래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 때문에 남천에는 소달구지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모래를 퍼날랐다. 황금색 모래들을 가득 실어 나르는 아저씨들이 모래 무게에 눌린 소와 뒤엉켜 용쓰는 모습은 굉장한 구경거리였다. 기운 없는 소에게 매질하면서 억지로 힘을 쓰게 하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한 번은 매질에 못이긴 소가 용을 쓰는 바람에 소달구지가 부숴지고 멍에에서 벗어난 소가 미친 듯 날뛰며 동네로 들어와 우리집 대문을 들이받는 사고가 생겼다. 다행히 그때 우리집 대문이 철문이었는데 그 문이 안쪽으로 휘어진 것은 물론 콘크리트로 세워놓은 문설주가 와짝 금이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었다. 만약 철문이 아니었다면 폭주하던 소가 집으로 들어와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남천에서 모래를 퍼나르는 일은 뒤에 경운기가 보급되면서 소 대신 경운기가 퍼나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계속되다가 ‘자연보호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단속이 강화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남천 너머에는 과수원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주로 사과를 심어놓았는데 한창 사과가 열리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근처 아무 볏단이나 가지고 가서 사과와 바꿔 먹었다. 볏단을 가지고 가면 사과밭 주인 ‘아재’나 ‘아지매’가 떨어져 상한 낙과를 골라서 내주었다. 비록 상하고 멍든 사과일망정 아이들에게는 그런 사과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나중에 알았지만 이 과수원들에도 최부자댁 이야기가 깊숙이 녹아 있었다.



남천 너머 사과밭과 마을에 심어진 닥나무의 사연을 알았을 때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사과밭을 지나면 도당산이었다. 여기부터는 내가 갈 수 없는 구역이었다. 뒤에 나무하러 가는 어른들을 따라 가거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전쟁놀이 한답시고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어린 나에게는 도당산은 ‘꼼지’가 나오는 무서운 산이었다.

교촌마을 서쪽으로는 향교를 지나면서 작은 개울이 흘렀고 그 개울 너머로 미나리꽝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 미나리꽝을 넘어가면 반월성이 펼쳐졌다. 반월성도 무궁무진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 반월성에는 쥐똥나무가 많아 이 가지를 잘라 고무줄 새총을 만들어 놀았다. 당시의 반월성 안에는 석탈해왕을 모시는 사당인 숭신전이 있었는데 그 주변에 대나무를 많이 심어놓아 아이들은 그것을 잘라 활을 만들며 놀았다. 반월성 안쪽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서 이곳에 활쏘기 과녁이 놓여 있고 수시로 활 쏘는 궁사들이 드나들었다. 남천과 면한 성터 주변에는 삼, 대마(大麻)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삼이 마르면 ‘재랍’이라고 해서 속이 빈 채 쪽쪽 곧은 마른 삼대들이 만들어지는데 이 나무들은 중요한 불쏘시개로 사용되었다. 아이들은 그 재랍을 잘라 한쪽 끝에 못을 박아 화살을 만들어 쏘며 놀았다. 재랍 화살은 쪽쪽 곧은 자태만큼 바람에 대한 저항력도 좋아 쏘면 멀리까지 날아갔다. 반월성의 비스듬한 성벽에는 봄이면 참새들이 새끼를 부화하는데 새집을 찾아 참새를 꺼내면서 놀기도 했다.

마을 안에는 곳곳에 닥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보막이 공사 해둔 곳에도 닥나무가 많았고 골목 어귀 빈 공터들에도 닥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다. 닥나무는 목질이 가볍고 부드러운 반면 잘 부러져 목재로는 아무 쓸모가 없었는데 희한하게 닥나무가 많았다. 대신 닥나무는 나무에 칼집을 내고 껍질을 살살 벗겨 내면 쉽게 나무껍질을 벗길 수 있었다. 이걸 가지고 아이들은 장난감 칼을 만들어 놀거나 쌍절곤을 만들어서 놀았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교촌에 왜 이렇게 닥나무가 많았는지 아는 어른들은 한 명도 없이 그냥 으레 이전부터 심어 오던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닥나무 역시 교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내가 밝히려는 경주최부자댁 이야기의 중요성에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교촌을 이야기하면 절대 빼놓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이 있다. 그게 바로 교촌 사람들에게 ‘큰마당’이라고 불리던 경주최부자댁 앞 넓은 공터다. 이 공터는 지금은 경주 최부자댁과 한정식집 ‘요석궁’을 방문하는 차들을 대는 주차장으로 쓰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아주 큰 쓰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 쓰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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