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호랑이 이야기 속의 경주

호랑이와 함께한 민족, 한국 마지막 호랑이가 있었던 경주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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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마지막 호랑이 <사진= 산림청>

7월 29일은 세계 호랑이의 날이다. 멸종 위기에 처한 호랑이를 보호하고 개체수를 늘이기 위해 201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정되었다.

호랑이의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땅에서 멸종해버린 동물에 대한 무관심 탓일 수도 있겠지만 단군신화에 호랑이가 등장하듯 우리 민족은 늘 호랑이와 함께해 왔고 경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국「위서」‘동이전’에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며 제사 지내는 민족’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일년에 반은 조선사람이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반년은 호랑이가 조선사람을 잡으러 다닌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이만큼 호랑이가 많았다는 기록들이다. 육당 최남선은 범 이야기로 천일야화를 쓸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며 호담국(虎談國)이라 했다.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이집트의 사자처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물이 바로 호랑이다.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올림픽 마스코트도 호랑이였고, 축구대표팀 엠블럼 또한 백호이다.

호랑이는 두려운 존재이면서 가장 친숙한 동물이었다. 조상들은 호랑이로 인한 호환을 두려워하였으나 오히려 호랑이를 영물로 여겼다.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존재로 여기며 매년 정초가 되면 대문에 호랑이 그림을 붙이기도 했다. 각종 속담과 민화, 설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간송미술관 소장)

불교에서도 호랑이는 영물인 동시에 그 특유의 위엄과 용맹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이다.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동물로 중생들에게 지혜를 전하는 현장에 등장한다. 사찰의 산신각 탱화 속에 산신과 함께하는 호랑이의 모습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영물인 호랑이가 산신의 옆에 엎드리거나 뒤따르는 모습으로 신격화되고 있다. 산신각은 우리의 토속신앙과 불교가 합해진 독특한 형태의 신앙이다.

경주는 호랑이와 밀접한 도시이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는 이 땅의 공식적 마지막 호랑이로 기록되어 있다. 하동마을 김유근 씨는 추석을 앞두고 대덕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등 뒤에서 호랑이의 급습을 받았지만 지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후일담을 인터뷰로 남기기도 했다.

당시 신고를 받은 불국사 구정 지서 미야케 요조 순사는 도로 공사하던 인부들을 소집, 호랑이 몰이꾼으로 동원시켜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포수의 총을 맞은 호랑이는 길이 2.5m, 몸무게 153kg의 대호였다. 이 이야기는 일본 황실 구미에 맞게 미화 각색된 부분도 없지 않지만, 당시 소학교 일본어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슬프게도 이 땅의 마지막 호랑이는 일본 왕실에 받쳐지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 해로운 짐승을 박멸한다는 명목의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으로 이 땅의 호랑이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일본인 야마모토 다다사로부로는 조선 포수들을 끌어모아 호랑이 사냥부대인 정호군(征虎軍)을 만들어서 호랑이 씨를 말리는 데 앞장섰다. 그의 정호기(征虎記)에는 한반도 호랑이 사냥 이야기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일제의 호랑이 말살은 바로 민족 말살과 다름없었다.

↑↑ 황성공원 내 호원사지

일본 작가 엔도 키미오(1933~)는 2023년 2월에 출간된『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라는 저서에서 호랑이를 멸종시킨 일제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구체적으로 고발했다. 은폐와 침묵보다는 드러내놓고 사죄한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치고 싶다.

경주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신라 원성왕 시절 김현이라는 청년이 흥륜사(興輪寺)에서 탑돌이 할 때 호랑이 처녀와 정을 나눈 사랑 이야기가『삼국유사』「감현감호金現感虎」편에 나온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호랑이 처녀의 헌신으로 벼슬에 오른 김현이 은혜를 갚고자 세운 절이 호원사(虎願寺)이다.

김현은 이곳에서 주로 법망경(梵網經)을 경전을 읽으며 넋을 위로했다. 호랑이 처녀는 죽으면서 호랑이에게 다친 상처는 흥륜사 된장을 바르면 깨끗이 낫는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이야기는 왠지 낯설지 않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약 대신 상처에 된장을 발랐다. 치료제로 쓰인 된장의 유래가 신라시대 흥륜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호원사지(虎願寺址)는 현재 경주 황성공원 변두리에 폐사지로 남아 있다. 황성공원에 절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라벌여중과 국궁장인 호림정 사이에 기단석 몇 개만 겨우 잡초 속에 보일 뿐이다.

철책 울타리만 둘러쳐져 있는 이곳이 호원사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주변을 정비하여 안내 표지판이라도 세워두면 좋겠다. 전국 최고의 공원이자 쉼터에 스토리텔링 하나 더 하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호원사지 근처에 국궁장이 있는 것도, 이름도 호림정(虎林亭)이라는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경주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들이 여러 곳 있다. 토함산 석굴암 아래 동네 범곡(범실), 함월산 기림사가 있는 호암리(虎巖里), 감포읍 호동리(虎洞里), 강동면 호명리(虎鳴里) 등이 호랑이와 관련된 동네 이름들이다.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특히 필자는 대덕산 인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현재도 살고 있다. 대덕산 기슭으로 소풀 먹이로 가고, 산딸기 따러 가던 곳이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호랑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덕동의 포수 이야기, 암곡 산고개 넘어 다닌 던 고기 장사꾼들 이야기 등등 그런 영향인지는 몰라도 호랑이에 관한 시를 몇 편을 짓기도 했던 것은 필연에 가깝다.

호랑이와 관련된 삼국유사 속의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경주의 흥륜사와 호원사지 그리고 이 땅의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죽은 대덕산 등을 하나로 연결하면 좋은 관광 자원이 되지 않을까? 표범의 마지막 서식지 합천 오도산에 표지석이 있는 것처럼 경주 대덕산에도 표지석 하나 세웠으면 어떨까. 더군다나 대덕산은 보문관공단지와 불국사를 잇는 보불로를 접하고 있으니 접근성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사라진 호랑이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은 돌아올 것 같다. 최소한 우리는 100년 전까지 호랑이와 함께 살아왔다. 첨단 과학 시대의 오늘 왜 뜬금없이 호랑이가 그리울까? 호랑이는 바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자 경주의 상징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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