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학살 알려온 이남희 선생과 경주겨레하나

“통일운동은 이념 아닌, 나누어진 사람 잇자는 일이지요”

박근영 기자 / 2023년 07월 27일
공유 / URL복사
↑↑ 경주겨레하나를 오래 이끌어 온 이남희 선생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경주를 비롯한 남한 각지에는 국민들이 쉬쉬하는 끔찍한 살육이 자행됐다.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살육은 좌익세력을 뿌리 뽑는다는, 그 자체로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일어난 학살이면서 실제로는 좌익세력보다는 그 지역 보도연맹 색출을 맡은 우두머리의 비뚤어진 개인적 복수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활용됐을 뿐이다. 학살된 사람들은 총알도 아깝게 여겨져 죽창에 찔려 죽거나 생매장 당하는 등 당시의 정황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하는 정권들이 이어지며 보도연맹과 관련한 학살자들은 오히려 그 공으로 지역의 정치세력이 되거나 그때 착취한 부를 바탕으로 대를 이어가며 부유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특히 그들 중 상당수가 일제 강점기 친일 경찰이었거나 정부 기관에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친일파들이었기에 그들은 오히려 혈안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보도연맹으로 단정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주에서는 ‘이협우’라는 인물이 보도연맹 사건의 우두머리로 그가 학살한 사람이 몇 명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경주 내남면 이조리, 망성리, 메주골 등에서 희생이 컸고 경주 서남산 자락 틈수골, 건천과 산내 경계인 당고개는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한 현장으로 알려졌다.

그런 한편, 보도연맹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그 부당함을 호소하거나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하고 오히려 숨죽이고 살아야 했고 가족과 후세들은 ‘연좌제’라는 또 다른 허울에 묶여 공직에 나갈 수도 없었고 제대로 된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연좌제가 폐지된 것이 1980년이지만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신원이 회복되거나 그들의 혼령이나마 위로하는 일은 최근에 들어서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겨우 시행되고 있을 뿐이다.

↑↑ 지난 6월 건천읍과 산내면 사이 당고개에서 열린 위령제 장면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억울한 넋 찾고 위로, 생명 존중 동학사상 전파에도 열심


그런 역사의 현장을 찾아내고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온 사람들 중 한 명이 ‘경주겨레하나’를 이끌어 온 이남희 선생이다.

‘겨레하나’는 2004년 남북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시민단체로 현재 전국적으로 약 9000여명이 활동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 특히 참여정부 당시 대북화해 분위기에 편승해 다양한 대북활동을 전개하며 정치적 통일에 앞서 민간의 교류를 확대하고자 많은 활동을 했다.

이남희 선생은 ‘경주겨레하나’ 회장으로 2017년부터 2022년까지 6년간 활동하며 숨겨진 경주의 아픈 역사를 찾아왔다. 지금은 회장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삶을 추구하면서도 이런 사회 활동은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경주겨레하나와 관련, 자신이 회장을 맡은 시간이 좀 길었을 뿐 실제로 더 열심히 일해오신 분들이 많았다는 점,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서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경주 유족회' 김하종 회장과 조희덕 이사 등 제일 앞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힘이 컸음을 강조한다.

“이 활동을 자칫 이념적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분단이라는 역사로 인해 나누어져 싸워야 했던 민족사, 그로 인해 갈라진 사람들을 다시 어우러지게 하고 서로 죽이고 압박한 역사를 바로 잡자는 것이었지요”

이남희 선생이 경주겨레하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내남에 이주해 살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일이라 회고한다.

“이곳에 살면서 이협우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정상적인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의식을 떠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남희 선생은 오랜 시간이 흐른 일이어서 이 일을 진행하는 것이 마냥 쉽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더구나 이런 문제에 관한 한 섣부르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반의 시선들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공연한 일 한다’는 주위의 만류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이남희 선생의 생각은 오히려 다르다.

“이게 한편으로는 편한 것이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환경운동 하시는 분들은 그게 주민들과 부딪힐 수도 있고 기업이나 정부, 지자체와 갈등을 빚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럴 일은 별로 없거든요. 그때 참살당한 억울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자는 일일 뿐이니까요!”

이남희 선생은 겨레하나의 원래 목표인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이게 이념적인 일이 아니라 단순한 사람의 일이라고 강조한다.

“나누어진 민족이, 가족이 다시 모여 살자는 것이지요. 거기에 무슨 이념이 필요하겠습니까? 특히 요즘처럼 다문화 사회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시대에 겨레나 민족 같은 말은 오히려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말은 겨레를 내세우고 있지만 내용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가고 회복하자는 것뿐이지요”

이남희 선생은 이것을 보다 근원적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뿐 아니라 생명 모두를 가치 있게 여기는 의식과 연결한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경주에서 발흥한 동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용담정을 찾아 수련하며 동학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이 자체가 어떤 심오함을 떠나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킨 힘이지요. 저는 용담정에 갈 때마다 깨달은 이후의 수운 선생보다 깨닫기 전, 민중들의 피폐한 삶, 그 속의 고통과 아픔을 보고 느꼈던 수운을 더 자주 떠올립니다”

이남희 선생은 특히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삶을 통해 이해되는 동학이 좀 더 쉽게 전달된다는 측면에서 해월의 사상과 동학이 가진 생명사상이 새로운 언어로 현대 사회에 전파되기를 바란다며 이 부분에 대한 공감을 역설했다.


↑↑ 당고개 위령제에서 억울한 영령들을 위해 진혼무를 추는 박소산 선생


20대 중후반에 출가 사미계까지 받아. 명상과 춤 결합한 몸짓 치유 가르치며 평화사상 전파해

이남희 선생의 이런 통찰은 알고 보면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이남희 선생은 20대 중후반 무렵에 출가해 곡성 성륜사에서 조실스님으로 청화 큰스님 모시고 용타 스님으로부터 사미계까지 받은 범상치 않은 종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환속하면서 내남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결혼하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마음공부와 삶의 근본적인 탐구에 관심이 많았던 선생은 용타스님이 창안한 현대적 마음공부 프로그램인 ‘동사습’ 프로그램을 익힌 후 일본에서 유래한 공동체 심성수련 프로그램인 ‘야마기시’ 프로그램, 미국의 해리 팔머가 창안한 의식개발 프로그램, 불교와 다른 측면에서 장기간 심취했던 기독교의 수련법 등을 섭렵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을 추구했다. 특히 다양한 수련을 통해 체득한 ‘명상과 춤을 통한 치유’, 더 정확하게는 ‘몸짓치유’를 생업의 일부로 가지게 되었다.

“일상을 살다 보면 몸짓이 자유롭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규제된 몸짓을 하게 됩니다. 이런 몸짓에서 자유롭게 헤어 나와 내 몸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며 내 감정, 내 몸에 쌓인 부정적인 감정들을 풀어내는 것이지요. 주로 느린 명상음악을 틀어놓고 수련하는데 궁극적으로는 명상과 자유로운 몸짓을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명상치유에 무슨 자격증이 있는 게 아니어서 부족한 대로 춤과 관련한 간단한 자격증을 따 두기도 했고 생업을 보강하기 위해 중장비 기사로 활동하기도 한다.
이남희 선생은 경주 SNS 활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마음을 울리는 글을 자주 쓰면서 시사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도 특유의 ‘할~’로 풀어낸다. 당연히 경주겨레하나 활동가답게 경주의 현황에 대한 비판도 자주 쏟아낸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반대집회도 꾸준히 이끌었다. 경주 진보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당무와 관련한 행사도 올린다.

이남희 선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6월 8일 올린 ‘당고개 헌시’는 심금을 울린다. 그날 열린 경주자주평화선언 및 위령제에서 읊은 이남희 선생의 시로 그 현장의 아픔을 되새기는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 무관심했거나 애써 외면해온 사람들의 뒤늦은 사죄의 마음일 수도 있다.

까닭도 없이 죽어간 그 숱한 혼령들은 또 어찌할까요 / 그 설움 그 원통함을 어찌할까요. 차마 여길 훌훌 뜨지 못하고 골골에서 흐느껴온 넋들이여 / 우소서 우소서 못다 운 울음을 / 오늘 여기 목놓아 다 우소서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