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남산 답사의 절정’ 눈앞에

금오신화 쓰며 머문 용장사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7월 06일
공유 / URL복사
↑↑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용장골은 남산을 대표하는 두 봉우리 고위봉(494m)과 금오봉(466m) 사이에 난 계곡답게 가장 깊고 크다. 금오봉 남동쪽 용장골 방향으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용장사지는 조선시대 생육신으로 널리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 있었던 용장사에서 은둔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했다. 지금은 바위 절벽에 기묘하게 터를 잡은 삼층석탑과 삼륜대좌불, 마애불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


조선팔도 떠돌던 김시습 멈춰 세운 곳

세종이 감탄한 천재소년 김시습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에 매료돼 설잠(雪岑)이란 법명을 짓고 출가했다.

세조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읽던 책을 불태우고 승려가 된 그는 10년간 전국을 떠돌다 31세에 이곳 용장사에 자리를 잡았다. 토굴을 짓고 그 앞에 매화를 심었다. 아마 남쪽 지방을 떠돌며 매화를 만나 매력에 빠진 듯하다. 그의 대표적인 호 또한 ‘매월당’(梅月堂)이다.

용장사에서 그는 이런 시를 지었다. 그의 시문집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권12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실려 있는 ‘용장사의 장경실에서 지내며 감회가 일어나다’(居茸長寺經室有懷)란 작품이다.


용장산 골짜기 그윽하여
(茸長山洞窈)
찾아오는 사람 보이지 않네
(不見有人來)
가는 비는 시내 대나무를 흔들고
(細雨移溪竹)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감싸네
(斜風護野梅)
작은 창 아래에서 사슴과 졸고
(小窓眠共鹿)
마른 의자에 재처럼 앉았네
(枯椅坐同灰)
어느새 초가 처마 가에선
(不覺茅簷畔)
뜰 꽃이 떨어졌다 또 피었네
(庭花落又開)


‘동경잡기’엔 “매월당의 사당은 금오산의 남쪽 동구(東邱)에 있다. 그곳은 용장사의 옛터로 김시습이 노닐던 곳이다. 김시습은 국내의 명산을 두루 편력하여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나라 안의 모든 곳을 답사한 김시습이 가장 살만한 곳으로 여기고 사랑했던 곳이 경주의 금오산, 다시 말해 경주 남산이다.

짐작처럼 ‘금오신화’는 남산에서 씌어졌다. 그는 이 금오산에서 서른한 살부터 서른일곱에 이르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썼다. 그리고 ‘유금오록’을 남겼다. 유금오록은 경주 일대의 고적을 돌아본 감회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기행시집이다.

물론 김시습이 7년 동안 머물렀다는 용장사의 금오산실(金鰲山室)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매월당의 체취를 느끼려는 탐방객의 발길은 꼬리를 문다.


↑↑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석탑과 불상…자연과 어우러진 명작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대 유가종(瑜伽宗)의 덕이 높은 승려 대현(大賢)이 남산 용장사에 기거했는데, 거기에 있던 미륵석조장육상 둘레를 돌면 불상이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학계는 용장사가 경덕왕대 이전부터 있던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용장’(茸長)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면서 이곳이 용장사 터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고 한다.

현재 용장사 터엔 옛날 절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석재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삼층석탑(보물 제186호)이 남아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삼층석탑형 대좌 위에 안치돼 있는데, 머리 부분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다. 1923년에 대좌에서 굴러 떨어진 것을 복구하였다고 하며, 1932년 다시 굴러 떨어진 것을 그해 11월에 제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이 석조여래좌상을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석조장육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여래좌상은 석조여래좌상 옆 암벽에 새겨져 있다. 연화대 위에 책상다리를 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 좌상 왼쪽에 10여 자 정도 글이 새겨져 있으나 알아보기가 어렵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어느 시점에 절이 폐쇄됐고 1922년에 무너진 석탑을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이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922년 복원한 삼층석탑의 기단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 뒤 2001년 북쪽 기단석을 남쪽으로, 동쪽 기단석을 서쪽으로 각각 위치를 조정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곳곳에 스민 매월당의 자취

산 중턱 벼랑 끝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모습을 하고 있다. 거대한 바위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이층기단을 쌓은 뒤 삼층의 탑신과 옥계석을 얹어 놓았다. 4.5m 높이의 석탑 바로 아래는 아찔한 절벽이고 깊은 계곡이다. 마치 수미산 꼭대기에 탑을 세운 듯한데, 계곡 아래서 보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남산 답사의 감흥이 절정에 이를 만한 풍경이다.

석탑이 하늘로 오르고자 했던 신라인의 마음이라면 그 아래쪽 석조여래좌상은 하늘의 부처님이 땅 위로 내려오는 인상을 준다. 원반 모양의 세 돌받침(삼륜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얹혀 있는 형상이 인상적이다.

몸체만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의 왼쪽 바위벽에는 8세기 중엽의 사실주의 불상의 형태를 보여주는 마애여래좌상이 연꽃 위에 앉아 있다. 마애여래좌상은 용장골 너머의 들녘을 향해 있는데 양어깨에서 가지런하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느낌으로 촘촘히 주름져 있다.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을 지나 조금 더 내려서면 자연 암반의 석등대석과 김시습의 발자취가 서린 용장사 법당 터를 만난다. 석등대석 지점에서 올려다보면 울창한 나무 사이로 하늘을 받치고 서 있는 듯한 삼층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숲과 솔숲을 따라 하산하다 설잠교를 지나 만나는 반석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삼층석탑이 까마득하다. 천하를 떠돌다 금오산에 정착해 시를 벗하며 살다, 부여 무량사에서 열반한 매월당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김운 역사여행가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