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늠비봉, 벼랑 위 오층탑 앞에 서면…서라벌이 한눈에

금오봉과 고위봉을 잇는 남산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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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 아래 늠비봉 오층석탑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다.

경주시가지 남쪽에 있는 남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북쪽의 금오봉(466m)과 남쪽의 고위봉(494m) 두 봉우리를 잇는 산과 계곡 전체를 남산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150곳의 절터와 4곳의 산성터, 120여구의 석불, 90여기의 석탑 등이 산재해 일찍부터 ‘노천 박물관’이란 별칭을 얻었다.

남산엔 큰 울림을 주는 석탑 두 기가 있다. 금오봉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거대한 바위를 하층기단으로 삼은 삼층석탑과 그 주변 풍경과의 조화는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많은 이들이 용장사지 삼층석탑을 남산 답사의 ‘절정’으로 꼽는 이유다.

금오봉 북쪽에도 용장사지 삼층석탑에 버금가는 탑이 하나 있다. 늠비봉 정상 끄트머리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늠비봉 오층석탑이다. 이 탑 또한 산위 자연석에 맞춰 기단을 만들어 세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남산에서 유일한 오층탑이자 경주에서 보기 드문 백제계 석탑 양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

늠비봉 오층석탑을 보기 위한 여정은 포석정에서 시작한다.

포석정에서 남산 국립공원 안내소를 지나 500여m를 더 가면 ‘윤을곡 마애불좌상 70m’라고 적힌 팻말을 만난다. 왼편 산비탈로 이어진 좁은 오솔길을 지나면 큰 바위 2개가 ‘ㄱ’자형으로 맞물려 있다.

삼신바위라고도 불리는 이 바위엔 불상 3구가 새겨져 있다. ‘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이다.

보통의 마애불은 한 바위 면에 삼존불을 새긴다. 여기는 바위 정면 바위에 두 불상, 측면 바위에 한 불상을 새겨놓았다. 이런 특이한 불상 배치로 인해 삼존불이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라보는 이의 시점에서 정면 바위 두 불상 중 오른쪽 불상을 기준으로, 양쪽 끝에 있는 두 불상은 왼손에 크고 둥근 약그릇을 들고 있어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불이다. 가운데 불상은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기법 면에선 왼쪽 약사불은 불상을 바깥 테두리를 깊게 파서 입체적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해 부조에 가까운 반면, 나머지 두 불상은 주변을 얕게 파내고 불상을 넓고 평평하게 표현해 선각에 가깝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세 불상은 전체적인 비례나 조각의 세부 기법이 유사해 같은 시기에 만든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예전엔 이 마애불을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봤다. 그러나 가운데 불상 왼편에 ‘태화 9년 을묘(太和 九年 乙卯)’라고 새긴 명문이 확인되면서, 학계는 신라 42대 흥덕왕 때인 835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계의 추정대로 835년 제작된 게 맞다면 이 마애불은 현재 남아 있는 삼불형식 마애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 된다. 불상 삼존으로 구성된 삼불형식은 통일신라 이전의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불상을 새긴 835년은 흥덕왕 재위 10년, 그가 병들어 죽기 1년 전이다. 그는 형님인 41대 헌덕왕과 쿠데타에 가담해 조카 애장왕을 죽였다. 형님이 왕위에 오른 뒤 죽자 왕이 되었는데 2개월 만에 장화왕비가 죽었다. 재위 6년에는 아들 김능유가 중국에 갔다 돌아오다 풍랑을 만나 죽는 불운을 겪는다. 그해에 또 지진, 다음 해는 심하고 오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곳곳에 도적 떼가 습격하던 시절이었다. 재위 8년에는 온 나라가 기근에 시달려 굶어 죽는 민중이 속출한다. 삶이 죽음보다 고통인 이 시기에 헐벗고 병들고 가난한 아픔을 달래줄 역할로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무슨 아름답고 세련된 불상이 필요하겠는가. 세 부처의 모습에서 힘든 시절을 살았던 신라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

윤을곡 마애불좌상을 보고 내려와 길을 따라 1㎞ 정도 오르면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 이정표를 만난다. 안내판을 따라 마애여래좌상을 만나러 가는 오른쪽 산길은 ‘부흥골’, ‘부엉골’ 등으로 불린다. 낮에도 부엉이가 우는 깊은 산골이라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이마에 땀이 맺힐 무렵이면 불상이 새겨져 있을 법한 넓고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예상대로 바위 중간에 얕은 선각으로 표현한 마애불이 고요히 앉아 있다.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이다.

부처가 바라보고 있는 부흥골은 이름처럼 대낮에도 부엉새 우짖는 소리가 들릴 법한, 골짜기의 깊이가 느껴진다.

바위에 새긴 불상 높이는 1m쯤 되는데 온통 황금색이다. 바위의 붉은 면에 불상을 새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마애여래좌상은 ‘황금마애불’, ‘황금부처’ 등으로도 불린다. 특히 해가 질 무렵 석양이 이곳을 비추면 불상의 얼굴과 어깨 부분이 황금으로 덧칠한 것처럼 보여 보는 이를 황홀경에 빠뜨린다고 한다.

불상을 새긴 바위 형태가 감실 모습을 하고 있는 점도 독특하다. 불상에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바위 윗부분이 거대한 처마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

다시 원래 산길로 돌아온 뒤 늠비봉 오층석탑을 향해 조금 오르면 부흥사(富興寺)가 있다.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로 돼있는 이 절은 1971년 세워졌다고 하는데, 주변에 큰 석탑 옥개석 한 개가 놓여 있는 걸로 미뤄 옛 절터에다 새로 지은 절로 추정된다.

‘大雄殿’(대웅전)이라고 적힌 현판 글씨는 유명한 학승 탄허(呑虛) 스님(1913~1983)이 쓴 것이라고 한다. 검은 판에 흰색으로 쓴 글자는 빛이 바랬지만, 탄허 스님을 닮은 듯 힘차고 꼿꼿하다.


↑↑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


늠비봉 오층석탑

부흥사 앞 나직하게 솟은 봉우리가 늠비봉이다. 늠비봉 끄트머리 바위 위에 늠비봉 오층석탑이 외롭게 서 있다. 주변에 흩어져있던 석탑 부재를 모아 2002년 복원했다고 한다. 높이는 6~7m 정도 된다.

금오봉 남쪽으로는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북쪽으로는 늠비봉 오층석탑이 극적인 울림을 준다.

사실 신라엔 삼층탑이 대다수다. 오층탑은 나원리와 장항리에서 간혹 보이지만 남산에서는 늠비봉 오층석탑이 유일하다.

늠비봉 오층석탑은 옥개석 지붕돌이 얕아 백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런 이유에서 일부 사람들은 이 탑을 백제 장인의 작품으로 본다. 어쩌면 백제가 망하고 그 주민들이 이주해 와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망국의 한을 담아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선지 이 탑을 보고 있으면 백제를 바라보는 망향의 탑 같다는 생각이 들어 쓸쓸함이 인다.

탑에서 내려다보는 주변 경관은 멀리 경주 시내와 배반들이 함께 펼쳐지면서 시원하고 아름답다. ‘경주 남산 10경’을 꼽는다면 그 중 하나라고 극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풍경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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