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위해 희생한 경주 출신 독립유공자[2]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독립유공자들

엄태권 기자 / 2023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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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는 61명의 독립유공자들이 있지만 대부분 생소한 이름들이다. 이들은 건국훈장 애국장·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에 서훈된 인물들로 국내·외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며 젊은 시절을 조국을 위해 희생했다. 일부 독립유공자들은 그 후손들이 기념비나 추모비를 세워 뜻을 기리기도 하지만 다수의 유공자들은 잊혀가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현재 등록된 독립유공자들은 제출된 자료에 의해 출생지를 구분했지만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출생지 미상의 독립유공자들도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본보에서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출생지를 확정한 자료를 토대로 경주에서 출생한 독립 영웅들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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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 엄태권 기자 nic779@naver.com



최준(1884~1970)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최준 선생의 호는 문파이며, 교동 69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주 최부잣집’ 12대 장손으로 조선국권회복단 및 대한광복회에 관계하며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선생과는 사촌 처남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재무 담당을 맡았고 이로 인해,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붙잡혔다.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주주로 경영에 참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거액 전달했다. 1921년 9월 태평양회의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했다. 198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최수창(1893~1953) / 1992년 대통령표창

최수창 선생은 황오동 269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5일 경주읍 장날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혔다.







최성렬(1893~1938) / 1993년 대통령표창

최명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한 최성렬 선생은 성동동 290번지가 출생지다. 1919년 3월 15일 오후 3시 30분경 경주읍 장날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혔으며, 4월 15일 징역 6월형을 받았다.



최상제(1923~2008)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최상제 선생은 천군동 1092번지에서 태어났다.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해 활동했으며, 중국군 제5전구 소속 전시간부훈련단에 특설한 정공간부훈련반에서 정훈교육을 받았다. 이후, 제3공작반 제3분대장으로 활약했고 1977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최명표(1911~1981) / 2008년 건국포장

성동동 214번지에서 태어난 최명표 선생은 1934년 1월 경주적색농민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인부들 중심으로 일전회를 조직해 일제를 타파하고, 신 사회 실현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혀 1936년 5월 12일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채순봉(1928~2013) / 2006년 대통령표창

산내면 외칠리 912번지에서 태어난 채순봉 선생은 채주형·채병창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1944년경 9월 경, 경주중학교 재학 당시 항일학생결사인 명성회에 가입해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 1945년 3월 붙잡혔다.





조근만(미상~1908) /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

외동읍 구어리 출신인 조근만 선생은 1907년 정미7조약 이후 국권 침탈이 가속화 되자 마중군·탁영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경상북도 경주 후초동 등지에서 활약하다 일경에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조경규(1902~1988)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조경규 선생은 노동동 9번지에서 태어났다. 1926년 3월 광복단에 입단해 자금조달 활동하다 붙잡혀 징역 3년 6월형을 받았다.



정을기(1893~1964)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건천읍 신평리 1711번지에서 태어난 정을기 선생은 1926년 3월 17일 김창숙의 밀명으로 독립군 기지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입국한 동생 정수기를 도와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1927년 8월 22일 기소유예 됐지만 미결기간으로 1년 5개월여의 옥고를 겪었다.



정수기(1896~1936)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경주 건천읍 신평리 1711번지 출신인 정수기 선생은 1922년 8월 북경에서 의열단 고문 김창숙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했다. 이후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붙잡혀 김창숙과 함께 수감돼 1928년 10월 28일 징역 2년 6월형을 받았다. 1977년에는 건국포장에 추서됐었다.



정내영(1900~1961)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감포읍 팔조리 출신인 정내영 선생은 정죽교·정만출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1920년 4월 경북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해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일제 순사 카이의 사살사건에 연루돼 붙잡혀 1924년 11월 6일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1980년에는 건국포장에 추서됐었다.



장경탁(1923~1945)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현곡면 금장리 604번지에서 태어난 장경탁 선생은 1939년 북간도로 이주해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42년 함북 경흥 아오지탄광에서 광부들을 규합해 지하공작을 펴던 중 붙잡혔으며, 1944년 10월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이후 옥고 중 고문 여독으로 1945년 8월 10일 순국했고 1980년에는 건국포장에 추서되기도 했다.



이판득(1875~1908) /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판득 선생은 외동읍 괘릉리 출신으로 괘릉동에 거주하면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의병 활동하다 1908년 5월 28일 붙잡혀 5월 31일 경주로 호송 중 순국했다.



김철(1896~1978) / 1993년 대통령표창

김천근이라는 이명으로도 활동했던 김철 선생은 성건동 219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5일 경주읍 장날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붙잡혀 4월 15일 징역 4월형을 받았다.



김종철(1888~1941)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김종철 선생은 용당리 450번지에서 태어났다.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 의용단을 결성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하다 붙잡혔으나,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만주로 탈출했다. 이후 상해 의열단에 입단하고 활동했다. 1980년 건국포장에 추서됐었다.



김재호(1900~1969) / 1993년 대통령표창

부산 범어서 승려인 김재호 선생은 양북면 호암리 404번지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8일 범어사 승려들이 주도한 만세시위에 참여해 붙잡혀 4월 7일 징역 6월형을 받았다.





김일성(1898~1938) /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일본명 가네다 니로인 김일성 선생은 경주 출생으로만 기록돼 있다. 1928년 일본 가나가와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및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서 활동했다. 1932년에는 가나가와현에서 상남무산자소비조합을 결성하고, 격문을 배포하다가 붙잡혔다. 풀려난 후 1938년경까지 가나가와현에서 활동하다 다시 붙잡혀 고문 후유증으로 풀려났으나 같은 해 2월 경 순국했다.



이치용(1894~1950)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치용 선생은 이시우라는 이명으로도 활동했다. 출생지는 성동동 357번지. 1927년 2~3월 경 서울에서 항일운동과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직했다. 1929년 3월 경에는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개칭했으며 광주항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신간회 대구지회의 조직위원으로 활동했고 신간회 해소 이후에는 경주적색농민조합에 참여해 활동하다 붙잡혔다. 1936년 10월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다. 1982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이중근(1905~1932)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산내면 의곡리 991번지에서 태어난 이중근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청리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26년 산내청년회 조직 활동 중 유봉조에게 보낸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편지로 인해 붙잡혔다. 1927년 10월 25일 징역 1년형을 받았고 풀려난 후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서 경주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 신간회 경주지회 선전위원, 농민회 활동 중 다시 붙잡혀 1930년 7월 18일 징역 1년 6월형 받았다. 1982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이인석(1902~1929) / 2011년 대통령표창

이철이·이동천·이철 등의 이명으로 활동한 이인석 선생은 강동면 양동리 102번지 출신이다. 1921년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야경대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귀국했다. 1922년 조선총독부 경주경찰서 순사 재직 후 1923년 퇴직해 보천교에 입교했으며 독립운동 참여 군자금을 모금하다 붙잡혔다. 1924년 12월 15일 징역 8월형을 받았다.



이순구(1884~1983)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순구 선생은 강동면 안계리 65번지에서 태어났다. 1906년 4월 정환직·정용기 부자에 의해 산남의진이 조직되자 이에 입대해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8년 의성 구봉산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1912년 만주 반석현에서 광복회에 가입해 활약했다. 1968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이석채(1892~1948) /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

강동면 양동리 125번지에서 태어난 이석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원으로 1919년 12월 경 경남 동래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1920년 1월에 만주 유하현으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 요원인 노백린을 만나 모금한 군자금을 전달하고, 귀국해 임시정부원 모집활동하다 붙잡혔다. 1920년 4월 12일 징역 2년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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