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사 터-절터는 물에 잠기고 탑만 쓸쓸히 남았네

1975 덕동댐 지어지면서 절터 물에 잠겨
남은 석탑과 사찰 부재는 경주박물관으로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6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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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 전경. <제공: 문화재청>

국립경주박물관 뒷마당 한 구석엔 잘 생긴 석탑 한 기가 서 있다. 탑은 마을을 지키는 아름드리 당산나무처럼 든든하고 당당하게 관람자를 맞는다. 육중한 무게감과 경쾌한 상승감이 조화를 이룬 이 탑은 아는 사람만 안다는 명작,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이다.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사찰 고선사

고선사 탑을 이야기할 때면 늘 감은사 쌍탑도 함께 언급된다.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전형은 감은사 탑과 고선사 탑에서 시작해 석가탑으로 완성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선사 탑은 감은사지 석탑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탑이 원래 있던 자리를 떠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탑이 있던 고선사(高仙寺)는 감은사가 있는 동해로 향하는 길목, 토함산 북쪽 자락에 있었다. 신라 신문왕(681~692) 때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사찰이다.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라 29대 무열왕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원효의 일대기가 새겨진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의 깨어진 아랫부분이 절터에서 수습돼 고선사의 내력이 밝혀지게 됐다. 원효는 어릴 적 이름이 서당(誓幢)이어서 서당화상으로 불렸다.

원효는 신라 출신의 위대한 승려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현재 경산시에 해당하는 압량군 남쪽 불지촌에서 태어나 15세 무렵에 출가했다. 그는 의상대사와 함께 중국 유학을 가던 도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어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 이후 수행과 저술에 힘쓰는 한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하층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교화를 위해 노력했다.

서당화상비는 9세기 초 애장왕 때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후 어느 시점에 파손된 이후 1914년 고선사 터에서 아랫부분이, 1960년대에 경주시내 민가에서 윗부분 일부가 발견됐다.

이 비석을 받쳤던 귀부는 고선사지 삼층석탑 옆에 전시돼 있다. 비문은 33줄이며 한 줄에 61개의 글자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십문화쟁론’을 비롯한 대표적인 저술서의 성격, 수학과정과 행적, 입적한 장소와 시기, 비석의 건립과 추모사업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원효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고선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사’에 따르면 현종 12년(1021년) 고선사의 금란가사와 불정골 등을 내전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절의 법등이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덕동댐 건설 이전 경주시 암곡동 고선사터에 있던 석탑 모습. <제공: 문화재청>


감은사지탑 잇는 통일신라 초기 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된 높이 9m 규모의 탑이다. 건립 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제작 양식이 통일신라 초기 석탑 형태라는 점과 서당화상비에 드러난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신라 신문왕 6년) 쯤 탑이 세워졌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이 탑은 조형적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데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잇는 가장 초기 석탑 중 하나라는 점 등의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오래 전인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처음 본 이들 상당수는 “압도하는 힘을 지녔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건 규모가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힘의 원천은 크기와 더불어 돌의 힘에 있다. 만약 같은 크기의 목조건물이었다면 이러한 힘은 쉽게 얻지 못했을 것이다.

예부터 돌은 영원성과 신성성으로 사람을 휘어잡곤 해 기념비적인 건축물에서 자주 사용됐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을 비롯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선바위까지 무척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 석탑을 많이 만든 건 화강암이 풍부해서이기도 하지만 돌 특유의 영원성과 신성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큰 덩치가 주는 힘을 감동으로 바꾸기 위해선 성공적인 안정감과 상승감이 필요했다. 보는 이들이 안정감을 느끼면서 부처가 있는 하늘로 오르는 듯한 상승감을 얻기 위해선 무엇보다 뛰어난 비례와 균형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탑의 기단부는 너무 넓어 퍼져 보이거나 너무 높아 위태롭게 보이지 않도록 적당한 넓이와 높이로 만들어졌다. 기단부 아랫부분부터 1층 지붕돌을 지나 3층 지붕돌에 이르기까지 탑은 일정한 비율로 줄어들어 이등변 삼각형을 그어보면 탑이 그 안에 쏙 들어간다. 치밀하게 계산된 비례와 균형을 통해 탑을 본 사람들은 땅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면서도 경쾌하게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은 사라진, 하늘을 향한 찰주까지 남아있었다면 그 느낌은 더욱 강했을 지도 모르겠다.



물에 잠긴 고선사 만나는 덕동호 둘레길

이곳 탑이 제자리를 떠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경주 일원에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덕동댐이 지어지면서 절터는 물에 잠겼다. 앞서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석탑은 절에 남아있던 주춧돌·장대석 등 여러 사찰 부재와 함께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석탑이 고향을 잃었을 때 암곡동 골짜기 아랫마을 주민도 고향을 잃었다. 댐 건설을 위해 많은 주민이 고향을 내어 준 것이었다. 이후 일부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일부는 마을 인근 산기슭으로 올라와 다시 터를 잡았다고 한다.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봤다면, 차량으로 둘러볼 수 있는 덕동호 둘레길 방문을 권한다. 이 길은 물에 잠긴 고선사를 상상하며 한적한 시골 마을 풍경을 즐기기에 그만인 곳이다. 보문관광단지를 기점으로 15㎞ 정도 이어지는 길 가운데 호수 동쪽을 감싸고 도는 6㎞ 구간이 특히 아름답다.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터를 잡은 집들이 운치를 더한다.
운이 좋다면 시골 촌로가 펼쳐놓는 옛 마을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다. 오래오래 숨겨두고 혼자 즐기고픈 길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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