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보는 경주 과거 ‘추억과 향수 소환’[3]

이상욱 기자 / 2023년 04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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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경주 읍성

과거 경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은 오늘과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다. 1900년대 초 경주지역 곳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본지를 통해 소개됐다. 1992년과 1994년에 걸쳐 본지에 화보로 실렸던 사진은 독자들이 제공했고, 사진에 대한 해석도 달았다. 이들 사진은 창간 34주년을 맞은 경주신문과 독자, 그리고 시민들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에 당시 보도됐던 신문 속 과거 사진과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지면을 통해 소개하며 향수를 소환해본다. -편집자주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경주의 옛 읍성 

지금의 경주시 북부동, 동부동에 걸쳐있는 경주의 옛 읍성. 1930년대의 모습. 고려 현종 3년에 쌓은 토성을 조선 초기 석축으로 개축하였다. 당시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 4개소의 성문이 있었으며, 동쪽이 약 660m, 서쪽이 약 648m, 남쪽이 약 564m, 북쪽이 약 636m였다고 한다. 온전히 나타나 있는 성벽의 고풍스러움과 우람한 노목의 자태에서 옛 도시의 풍정(風情)을 느껴볼 수 있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경주읍성 남문 밖의 난전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살기 위한 생계수단엔 예외가 없는 것 같다. 읍성 남문 밖의 난전(옹기전 골목)에서 무늬 없는 백도자기를 내다 팔고 있는 광경의 1930년대 사진. 토담벽 아래 맨 땅바닥에 전을 펴고 안경집과 담배 쌈지를 허리춤에 싼 무명옷 바지저고리의 가장이 아내, 3형제 아이들 할 것 없이 식솔들 모두와 함께 우두커니 모여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음이 곤궁한 당시의 서민들 생활상을 한 눈에 보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놋그릇 제조장 

일정 때 전쟁물자로 징발해갔던 놋쇠그릇. 이의 사진을 보노라면 한반도의 문물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고 말았던 이네들의 침략사가 불현듯 되살아 또한번 우리들 가슴을 아프게 한다. 수공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1930년대)의 놋그릇 제조장. 기능별로 세분된 공정과정을 사진으로 보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다. 쇠를 두드리는 사람, 그릇 표피를 쇠칼로 깎아 내는 사람, 이를 윤기 나게 닦는 사람. 이렇게 각자의 일을 분담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장소 미상의 유람 자동차 사무소 

오는날 관광버스의 효시였을까? 경주 고적지 순회를 위한 유람 대여 차량들이 손님을 기다리며 대기 중에 있다. 현재의 어느 장소인가는 알 수 없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이야말로 당시 상황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 서울의 창덕궁에 보존되어 있는 李왕가 전용차와 같은 차종으로 보이는데 ‘순종의 캐딜락’, ‘고종의 리무진’ 중 어느 것일까마는 여하튼 지금으로서는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안경 제작의 장인 모습 

오두막 초옥에서 혼자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안경 제작의 장인. 여닫이 방문을 열어 젖혀 뜨락에 전을 편 상품 진열이 지금 보기로는 사뭇 초라할 뿐이건만 그 시대 상황으로서야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럽기만 한 자기 긍지였으랴. 일본시대 신문명의 도래와 함께 볏짚 추녀 끝에 매달아 놓은 카나리아(?) 새장이 이채롭다.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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