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은밀한 모습을 드러낼 때 공감이 넓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줍는 어중간하지 않은 시인 김상배

박근영 기자 / 2023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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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배 시인.

“시는 줍는 것입니다!”


시인의 말이 얼른 수긍되지 않는다. 그 귀하고 놀라운 문장들을 줍는 것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다. 그러나 시인은 사뭇 진지하다.


“그리고 자신의 은밀한 내면을 드러낼 수 있어야 독자와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싶다. 그렇다면 시인은 프라이버시도 없나?

김상배 시인은 계림초와 경주중·고를 나왔고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각별한 소질을 보였지만 자신의 평가대로 글에 관한 ‘어중간’한 관심으로 딱히 문학으로의 열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예비고사 세대인 시인은 역시 자신의 표현대로 어중간한 성적과 외국어가 부담돼 국립대인 충남대 국문학과로 진학했다. 이때 학과 행사로 열린 시화전에 시를 내면서 마침 유명한 시인이던 오세영 교수가 자신의 시를 보고 ‘이 시 누가 썼나?’고 관심을 드러낸 것이 계기가 돼 부쩍 시에 대한 욕구가 솟아올랐다. 마침 술을 공짜로 마실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매주 열리는 ‘화요문학’이란 시회에 참석하며 의무적으로 한 편씩 시를 쓰며 시에 대한 열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충남대학교 문학상 받으며 시에 대한 욕구 늘어, 남이 시집 발문 쓰다 아내 권유로 본격 시인으로 살아 !


“당시 그 시회에 나오던 쟁쟁한 교수님이나 선배님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학적 성찰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그 말들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 같았지요”


군에 다녀온 김상배 시인은 마침 이때 평생의 반려자인 정순옥 여사를 만나 새로운 문학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당시 정순옥 여사는 충남대학교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김상배 시인에게 ‘충남대학교 문학상’에 도전해보라고 권유했다. 응모 결과, 대상으로 무려 50만원의 거금을 상금으로 받으며 일약 충남대학교 문학계보에 이름을 남겼다.


대학졸업 후에는 신평고로 부임, 국어 교사로 첫 근무를 시작했다.


“그때 사글세 살면서 박봉에 시달렸는데 얼마나 쪼들렸는지 아내가 임신해서 탕수육을 먹고 싶어 했는데 그걸 사줄 형편이 못 된 겁니다. 그런 주제에 무슨 시를 쓰나 싶어 시와 멀어졌어요”


그러던 중 어느 친구가 시집을 냈다고 해서 발문을 쓰느라고 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그러지 말고 당신도 다시 시를 써보라고 권하는 겁니다. 그 말 듣고 부쩍 용기가 났어요. 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39세인가 40세에 첫 시집 ‘코 고는 아내’를 냈는데 그 내용이 대부분 아내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김상배 시인은 스스로 삶을 위해 ‘갈 곳 없어’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고 자조하면서도 그 교직에서 일대 큰 변곡점을 만나게 된다.


“절친한 친구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잘렸다는 겁니다. 교육다운 교육을 시키겠다고 나선 선생을 잘랐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전교조의 정서에 찬성해서라기보다 단순히 친구가 잘린 것에 ‘발끈해’ 전교조에 참가했어요”


그러다 그는 심지어 남한 교사의 대표로 북한까지 가서 전무후무한 남북한 교사 교류의 역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때 북측 선생님과 헤어지면서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세상이 바뀌면서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지요. 그때의 아쉬움 역시 시로 남았고요!”


김상배 시인은 모두 4권의 시집을 냈다. 그중 세 번째 시집 ‘낮술’은 딸이 결혼할 때인 2012년에 하객들에게 주기 위해 냈고, 네 번째 시집 ‘아무것도 아닌’은 아들이 결혼하던 2021년에 역시 하객들에게 주기 위한 ‘기념품’으로 냈다고 고백했다.


“시인의 숫자는 인구비례 늘어가는데 세상에서 시의 힘은 차츰 줄어듭니다. 이제부터라도 시중에 범람하는 시들이 시인의 처지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품종으로 개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념품 삼아 낸 시집이라는 시인의 말과 달리 김상배 시인의 시집은 특히 시인들 사이에 더 유명해졌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강병철 작가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글을 한 구절 인용해 보자.

↑↑ 김상배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아무것도 아닌' 표지

이러면 / 안되는데 !! 시인들에게 더 즐겨 인용되는 시 ‘낮술’, 어중간하지 않은, 오히려 치열한 시인의 혼 돋보여!!


또 몇 순배 돌았고 해장술로 불콰하게 익었는데 좌중의 연장자인 권서각 시인이 건배사를 하면서 “얼굴은 본 적이 없으나 김상배 시인의 「낮술」로 건배합니다. 제가 ‘이러면’ 하면 여러분들은 ‘안 되는데’ 하시면 됩니다”, “자, 이러면! 으쌰으쌰!” “안 되는뎃! 으쌰, 으쌰!” 그렇게 선창, 후창으로 이어진 이 건배사가 그의 한 줄짜리 시 「낮술」의 전체 문장이다.


이 에피소드 하나만 보더라도 김상배 시인의 시가 가진 공감을 수긍하고도 남는다.
김상배 시인은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줍는다’는 표현을 쓴다. 시는 억지로 써지지 않고 어떤 감흥이나 영감에 의해 찰나에 그려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 줍기를 좋은 것에서 주우려면 절대로 좋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단호히 선을 긋는다.


“생각해 봅시다. 노을을 시로 쓴다면 노을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나요? 아니 세상의 누가 노을보다 아름다운 노을 시를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의 이런 시 철학은 그의 시에서도 그대로 자주 드러난다.


절 마당 오층탑은
대웅전 뒤안
이끼 낀 바위만 못하고
주지스님 염불이
추녀 끝에 저
풍경소리만 못하네
-꽃 중에서


그 대신 김상배 시인은 공감을 넓히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나 은밀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역설한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완전하지 않으므로 더러는 실수도 하고 더러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그것을 드러내고 반성함으로써 공감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크게 취해 엎어진 날, 엉망으로 망가진 그 자신을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시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그의 시 ‘그릇’은 이런 그의 상념을 그대로 보여준다.

내 그릇이 작다는 것을 느꼈을 때
퍽 괴로웠답니다.
내 그릇이 작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마음이 편안해졌지요.
그릇이 작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행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릇


김상배 시인은 늘 자신을 어중간 한 사람이라 칭하고 무엇을 했건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하고 피치 못할 방편으로 했다고 겸손해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명한 것이 등단에 대한 이야기다. 김상배 시인은 스스로 등단조차 하지 않은 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이러고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불콰하게 술이 들어가자 숨겨놨던 등단에 대한 이야기를 역시 객쩍은 듯 들려준다. 어느 유명 문예지에서 굳이 김상배 시인에게 문학상과 함께 거액의 상금까지 주면서 등단시켰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안 친구 시인이 “아니. 김상배조차 등단해 버리면 누가 진정으로 시를 붙들고 사느냐”며 볼멘소리했단다. 그때 퍼뜩 정신이 들어 그 상금 전체를 평생 구독료로 돌려주고 일체 등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 일화야말로 어중간은커녕 시에 대해 치열하기 이를 데 없는 시인의 혼을 그대로 드러낸다.


김상배 시인은 ‘시는 산문의 압축인 만큼 산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서슴없이 호령한다. 그 자신 다양한 문예지에 산문을 쓴 달필가이기도 하다.


교육도 그렇다. 김상배 시인은 전교조 시기 ‘해직의 영광’보다 ‘현직의 부끄러움’을 택해 어중간히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금은 그 뜻이 다소 퇴색됐지만 초기 전교조는 진정한 교육을 주창한 선생님들이 피와 눈물,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뤄낸 교육계 최초의 변혁이었다. 그중에서 그는 논산에서 가장 노조원이 많았던 센뽈여자고등학교에서 분회장으로 오래 활동하기도 했다. 더구나 경상도 출신의 남성중심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로 산 그가 아니었나. 그런 열정과 진심이 있었기에 그를 스쳐 간 많은 제자들이 지금도 그를 참스승으로 기억한 채 찾아오고 중요한 인생 기로에서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다.


지금도 페이스북에는 김상배 시인이 수시로 시를 올리고 있다. 역시 이런 것도 시가 되는가고 묻는, 예의 그런 일상에 대한 기록들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아내에게서 자녀들로 옮겨간 시가 다시 손주들에게로 넘어간, 그러면서 인생과 사회, 자연과 종교까지 관조하는 그의 인생이 훤히 보이는 시들이다. 그런데 이런 시들을 읽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공감된다. 그가 말하는 ‘은밀한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이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일까?


멀지 않은 시기에 이들 중에서 김상배 시인, 아니 정확하게는 부인 정순옥 여사의 선택을 받은 시들이 5집 시집이 되어 나올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을 시인이라 생각하는데 아내는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는 김상배 시인의 마지막 변이 재미있다.


“내가 며칠 고심한 시를 아내는 여지없이 솎아서 버립니다. 이게 저의 시답지 않다고 대번에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 기사가 신문으로 돌아오는 주말, 김상배 시인을 다시 만나 낮술을 마실지도 모르겠다. ‘이러면 / 안 되는데’를 외치면서!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무수한 것들이 빛나는 시가 되어 나뒹굴고 그것을 김상배 시인의 ‘어중간하지 않은’ 가슴이 ‘줍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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