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에밀레종, 깨달음의 일승원음

문학과 예술로 녹아들어 많은 작품 탄생하기도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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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사진.

머리가 어질어질하거나 체한 듯 가슴 갑갑한 날에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종소리를 들으러 간다. 종소리는 복잡하고 불편한 마음을 치유해주는 법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곳 가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신종은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가지고 있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맥놀이 현상으로 일어나는 공명이 사람이 가장 듣기 주파수대라고 한다. 이처럼 신종의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편안하게 해주는 한 편의 시와 같다.


그리고 신종은 소리뿐만 아니라 종합예술품이다. 거대한 종을 만든 기술이 놀랍고 연꽃 방석 위 무릎 꿇고 앉은 비천상,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과 주변의 당초문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리고 비천상과 비천상 사이에는 총 830자의 명문(銘文)이 양각되어 있다.

↑↑ 비천상.

‘지극한 도(道)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설을 열어서 삼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러운 종을 내걸어서 일승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한다.
(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是故, 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鍾, 悟一乘之圓音)’


명문 속의 일승과 삼승에 대해서는 《묘법연화경》에 잘 나온다. 《묘법연화경》의 〈비유품〉과 〈방편품〉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원효(617~686)는 저서 《법화경 종요》에서 일승으로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역설했다. 원효 사후 백 년쯤 뒤에 종이 만들어졌으니 원효의 철학과 사상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승원음(一乘圓音)에 대해서도 《능엄경》에 이근원통(耳根圓通)이란 말이 나온다. 간단히 말해서 소리를 통해서 자기 품성을 보라는 뜻이다. 덧붙이자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살피고 듣는다는 뜻의 관세음(觀世音)도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듣는 깨달음을 중요시하고 있다. 삼대의 왕위에 걸쳐 만들어진 것도 종소리의 원력을 위함일 것이다.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아들 혜공왕 때인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걸었다 하여 봉덕사종으로 불렀다. 북천과 가까운 현 경주세무서 자리에 있던 봉덕사는 큰 홍수로 떠내려가고, 덤불 속에 무거운 종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무렵 경주 금오산에 기거하던 김시습의 시속에 당시 종의 모습이 실감나게 잘 드러나 있다.

‘절집은 무너져서 자갈밭이 되고 종은 덤불 속에 버려졌네. 주나라 문왕의 돌북과 같으니 아이들은 두드리고 소는 뿔을 가는구나’ -김시습의 시「봉덕사종」 일부

이후 1460년 영묘사로 옮겨 매달았는데 종교적 용도보다는 주로 군사적 용도로 쓰이다가 1506년 영묘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봉황대 고분 서쪽에 종각을 지어 가져왔다는 기록이 《동경잡기》에 전하고 있다. 경주 읍성의 남문과 가까운 곳에 자리하다 보니 성문을 여닫거나, 군사 소집 때 종을 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사헌을 지낸 홍직필(1776~1852)은 다음과 같은 시로종소리에 대한 감상을 시로 지었다.


‘종소리가 도성 거리에 진동하여 성안에 가득하니, 저녁과 새벽 구분하려고 때맞춰 울리네. 사랑스럽도다 금경(金莖·비팀목)이 지탱하여, 아직까지 천년 고국의 소리 울리니’

이외에도 유의건의 「봉대모종(鳳臺暮鍾)」을 비롯한 조선의 많은 시인 묵객들이 봉황대에 걸린 신종을 노래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겨 왔다가 1975년에 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30톤에 이르는 무거운 몸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이사를 한 세계 최고의 종의 아이러니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 에밀레종 이송장면.

이제 이사 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안도감 한편에 너무 튼튼하게 시멘트로 지은 집이라 맘에 걸린다. 한옥이 잘 어울리는데 양옥집에 살고 있다. 최고에 맞는 아름다운 집 하나 지어주었으면 어떨까?


한편, 어린아이를 시주하여 ‘에밀레, 에밀레’ 하는 종소리가 난다는 인신 공양의 설화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는 19세기까지 어느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민담채집 과정에서 채록된 이야기라는 게 주된 설명이다. 실제 성분조사에서도 구리와 주석이 전부였으며 뼈의 성분인 인은 제로였다. 비천상 사이의 명문 내용으로 보아 종소리는 부처 목소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도올 김용옥은 에밀레종의 인신 공양과 관련해서 도올다운 특유의 시원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야이 미친년놈들아!
어느 얼빠진 년이 그래 지아들을 부처님 잡수라고 펄펄 끓는 황동의 불구덩이에 집어넣느냐 말이다. 과연 그것이 신앙인가? 과연 그것이 예술인가? 과연 그것이 호국인가? 야이 얼빠진 놈들아!
에밀레 에밀레 좋아하시네!’
-도올 김용옥의 저서
<나는 불교 이렇게 본다> 가운데 일부


이 정도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종은 만든 취지와 불살생을 기본으로 하는 이념으로 보아 일어날 수 없는 일임에 전적으로 공감이 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에밀레종 이야기는 예술적 영감과 상상력을 가져다주었으며 시와 소설, 희곡 등 문학으로 녹아들어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고 영화와 연극 그리고 대중가요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최인수 교수는 외국 생활 중에 어떤 바람결에 들려온 에밀레종 소리에 영감을 받아 작품 ‘먼 곳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만들었는데 소리가 조각 예술로 재탄생 된 것이다.


↑↑ 에밀레종 이송장면.

‘세상에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어 이 종소리로 대신 한다’ 멋지고 맛깔스럽게 함축된 이 문장은 사학가 최순우 선생이 제자들에게 한 말이기도 하고, 문광 스님의 글에서도 등장한다.

‘우주 그 자체요 핵심(核心)이라는 ‘도(道)’가 무엇인지는 속인이 헤아려 알지 못할 바요, 다만 어렴풋이 현상이 보이는 외형만 바라볼 뿐 내재하는 근원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으련만 신종(神鐘)이 한번 울리면 어리석은 중생들로 하여 도를 깨우치는 심안(心眼)을 뜨게 하여 마음과 눈과 귀를 밝혀 주는 듯하다. 누구나 한 번 종소리를 귀에 담으라. 그대를 위하여 영원한 복음이 되리라’


미술사학가 소불 정양모의 글 <한국의 종> 중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그는 경주를 제대로 알려면 에밀레종 소리를 들어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정식 명칭은 성덕대왕신종이지만 에밀레종으로 부르고 싶다. 꼬맹이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으며 이미 입에 베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고향 친구 만나면 이름보다 별명이 먼저 생각나듯 정감이 갈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사방백리를 간다는 에밀레종 소리가 오대양 육대주로 울려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일승원음(一乘圓音)의 둥근 종소리는 바로 붓다의 말씀이기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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