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세월 견딘 가장 오래된 신라 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임진왜란 때 훼손, 1914년 해체·수리, 지금 모습 복구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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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모전석탑 전경. <제공: 문화재청>

석탑이 정말 우뚝하여
(石塔正嶙峋)

우러러 보니 잡고 오르기 어렵네
(仰看難躋攀)

층층이 봄풀들 자라나고
(層層春草長)

계단마다 이끼 꽃이 아롱지네
(級級蘚花斑)

텅 빈 굴엔 원래 불상이 없었고
(空洞元無佛)

호위하는 사천왕상 남만족 같네
(訶撝像似蠻)

아득한 천 년 전의 옛일
(悠悠千古事)

일취몽에도 미치지도 못하네
(不及一炊間)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쓴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이란 시다. 김시습은 이 시에서 당나라 고사 ‘일취몽’(一炊夢)을 통해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일취몽’은 소년 노생이 도사 여옹의 베개를 빌려 베고 잠이 들어 부귀영화를 누리며 80세까지 산 꿈을 꾸었는데, 깨어보니 아까 주인이 짓던 조밥이 채 익지도 않았더라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

김시습이 노래한 분황사 석탑은 이 절을 대표하는 유적이자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다. 634년 분황사 창건당시 건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탑의 정식이름은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이다.

전탑(塼塔)은 흙벽돌을 구워 쌓아 올린 탑을 뜻한다. 반면 모전탑(模塼塔)은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해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이다. 모전탑인 분황사석탑의 돌은 검은 회색을 띠는 안산암(安山巖)이다.

전탑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 시작했으며 지금도 유적이 인도 곳곳에 남아 있다.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도 전래됐는데 숭악사 12각15층탑(523년 조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해 통일신라 때 전성기를 맞았고 고려시대에도 건립됐다. 그사이 전탑을 모방한 모전탑이 등장했다. 모전탑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탑의 양식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우리나라 불교 탑의 발전 양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탑의 발달은 대체로 목탑, 석탑의 순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신라는 특이하게도 전탑과 모전석탑이라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쳐 석탑으로 발전해 간다.

‘삼국유사’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는 신라 최고의 예술가였던 승려 양지를 소개하면서 “영묘사(경주 서악동에 있던 사찰)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 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불교의 여덟 수호신)과 법림사(안동 운흥동에 있던 사찰)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양지)가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모전탑)를 만들었고,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양지가 모전탑을 처음 세웠는데 그 이전에 전탑이 존재했고 이 탑과 탑에 쓰인 기와를 양지가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전탑이 모전탑을 앞서는 증거로 인용된다. 대표적 모전탑인 분황사탑이 7세기 전반에, 대표적 전탑인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1세기 가량 늦은 8세기에 조성된 것을 볼 때 ‘전탑-모전탑’의 순서는 대체적 경향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돌 다루는 기술이 앞섰던 백제는 전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목탑에서 바로 석탑으로 옮겨갔다. 목탑 형식으로 쌓은 돌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신라도 통일이후 석조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전탑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 일제강점기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 <제공: 문화재청>

3층까지만 남았지만 ‘모전석탑 백미’ 꼽혀

문화재로 지정된 국내 불탑 492기 가운데 모전석탑은 1.6% 수준인 8기에 불과할 정도로 희소성을 자랑한다. 이 가운데 분황사석탑은 모전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지만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시습이 ‘분황사석탑’이란 시에서 ‘석탑이 정말 우뚝하여’(石塔正嶙峋)라고 노래한 것으로 미뤄볼 때, 당시만 하더라도 탑은 온전했던 것 같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분황사 석탑은 임진왜란 때 왜병이 훼손했고, 그 뒤 분황사 스님이 고치려하다가 또다시 허물어뜨렸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 해체 수리 때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됐다.

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약 13m, 높이는 약 1m 규모다.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몸돌받침을 마련하고 몸돌을 쌓았다. 기단 위 네 모퉁이엔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상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해체 수리가 이뤄졌던 1915년엔 기단 위에 모두 여섯 마리의 사자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두 마리는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옮겨갔다고 전한다.

1층 몸돌 4면엔 각각 부처를 모셔두는 공간인 감실(龕室)을 만들고 문을 달았다. 감실의 문 양쪽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세웠다. 몸돌은 진회색의 안산암을 잘라 각 층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전탑과 비슷하다. 1층은 34~37단으로 이뤄져 있고 2층과 3층의 몸돌은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든 모습을 하고 있다.

석탑 내부는 큰 돌과 모래, 자갈 등으로 채워져 있다. 지진 등 외부 충격으로 인해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몇 해 전 경주 지진 때 첨성대가 무너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한편, 1915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탑의 2층과 3층 사이에 있던 석함(石函) 안에서 사리장엄구와 각종 공양구가 발견됐다. 당시 발굴조사보고서가 정식으로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토 현황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사진과 도면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은합(銀盒), 녹유리병 조각, 원반형 수정, 곡옥, 금제귀걸이, 금제장신구, 금은제 바늘, 동제 가위, 침통, 조개껍질류 등이다. 그밖에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숭령통보(崇寧通寶) 등 화폐도 다수 발견됐다. 그 가운데 숭령통보는 1102년에서 1106년까지 중국 송나라에서 사용된 화폐로, 이를 근거로 고려 숙종~예종 대에 이 석탑의 수리가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출토 유물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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