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보는 경주 과거 ‘추억과 향수 소환’[2]

이상욱 기자 / 2023년 03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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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경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은 오늘과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다. 1900년대 초 경주지역 곳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본지를 통해 소개됐다.


1992년과 1994년에 걸쳐 본지에 화보로 실렸던 사진은 독자들이 제공했고, 사진에 대한 해석도 달았다. 이들 사진은 창간 34주년을 맞은 경주신문과 독자, 그리고 시민들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에 당시 보도됐던 신문 속 과거 사진과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지면을 통해 몇차례 소개하며 향수를 소환해본다.


↑↑ 1920년대 경주 시가지 전경

1920년대 경주 시가지 전경 경주 시가의 옛 모습. 1920년대 경주읍은 이층집 한 채 눈에 띄지 않고 띄엄띄엄 있는 골기와 지붕의 몇몇 古屋(고옥)들을 에워싼 초가들이 즐비한 그런 성내 풍경을 이루었다. 이것이 해방되고 1955년 9월에 시로 승격되면서 변화되어온 현대도시 구조의 골격으로 커 온 것인데, 오늘에 이르러서도 겨우 14만 수용인구로 밖에 신장되어지지 않은 것이고 보면 사적 보존 위주로만 발전하여온 도시개발의 속도감이란 느리기가 이만저만이 아닌 듯하다. 이 사진 촬영은 황남동 98호 고분 위에서 북쪽을 향해 본 것이다. 전면 가운데 교차로 왼쪽 빈터 논밭이 지금의 시청자리이다.(노동동 청사 구 시청 부지를 이름)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 1930년대 구 경주박물관을 찾은 덕혜옹주

1930년대 구 경주박물관을 찾은 덕혜옹주 한·일 합방 후인 1930년대 사진으로 조선왕조 德惠翁主(덕혜옹주, 사진의 좌측부터 여섯 번째 시녀 바로 앞의 나이 어린 옹주)가 신하 및 시녀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경주시 동부동 소재 건물인 구 박물관 경내를 시찰하고 있는 모습으로, 당시 관아의 의전 모습을 부분적이나마 한 눈에 엿볼 수가 있다. 맨 앞에 양복차림의 관리가 행렬을 끌고 그 뒤로 대취타와 대금, 징 등을 연주하는 소규모 고적대가 뒤따르고 있어 퍽 이채로워 보인다. <자료제공: 김정국(경주시 황남동)>

↑↑ 1910년대경 촬영한 경주향교

1910년대경 촬영한 경주향교 1910년대 쯤일까? 내물왕릉을 등 뒤로 하여 촬영한 경주향교.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아해 보이는 맞배 골기와 지붕을 배경으로 소나무 몇 그루 보기 좋게 어울리는 풀밭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나란히 서 있는 무명 한복차림의 이곳 동네(현재의 교리) 사람들 포즈가 참 소박해 보인다. 지게를 어깨에 진 채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막 농사일을 나서던 참이었던지……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 1930년대 계림의 풍경

1930년대 계림의 풍경 잎새 무성한 느릅나무 가지가 고색창연한 비각 위에 드리워져 있음이 한여름을 느끼게 하기 족한 1930년대 계림의 풍경. 의젓하게 서서 포즈를 취한 떠꺼머리총각. 한 켠에 있는 나무의 밑둥이 60여년 세월이 지난 지금과 대조되리만큼 어린 것임을 보면 세월의 흔적이 자연스레 실감되어진다. 비각 안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비석이 있고, 비의 앞면에는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명(鷄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銘)이라 새겨져 있다.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 1930년대 훼손된 원원사 3층 석탑

1930년대 훼손된 원원사 3층 석탑 도굴된 채 흩어져 있는 탑신과 옥개석들이 아픈 역사의 생채기인양 느껴지는 1930년대 경주군 외동읍 모화리의 원원사지 3층석탑. 일정치하 우리의 많은 역사 유물이 일본인에 의해 도굴, 훼손 등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신라 때 세워진 원원사 3층 석탑은 그 시대 석조미술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는 탑으로서 개화기의 양복을 입은 사람들의 기념사진을 위한 촬영의 배경물로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볼 때 안타까움이 앞선다. 1938년 5월 3일 사적 제46호로 지정, 보호되어 오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복원됐다.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 1930년대 경주읍성 남문의 모습

1930년대 경주읍성 남문의 모습 지금의 경주법원 앞 포항물회식당과 복다방 사이길 네거리가 옛날의 남문터였다. 이 사진은 고려 때 토성으로 축조, 조선 초기에 석축으로 개축했다는 1930년대 경주읍성 남문의 옛 모습. 비록 퇴색되긴 했어도 이렇게 한 장의 사진으로서나마 전해져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古都南樓(고도남루)라는 현판 하나 걸려진 남문의 망루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그 때 그 사람들의 무명한복 차림이라던가, 등 뒤로 길게 땋아 늘어뜨린 떠꺼머리총각의 뒷모습에서 가난하고 소박했던 구시대 우리의 살림살이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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