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향기 스민 천년고찰… 경주 분황사

신라불교의 중심역할, 원효·자장 등 당대 고승 머물러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3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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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전경. 절터 중앙에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이 서있다. <제공: 문화재청>

황룡사와 마주하여 서 있는 분황사
(芬皇寺對黃龍寺)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
(千載遺基草自新)

우뚝한 흰 탑은 나그네를 부르는 듯하고
(白塔亭亭如喚客)

띄엄띄엄 푸른 산은 벌써 시름 젓게 하네
(靑山點點已愁人)

전삼이라는 말 제대로 아는 중 없는데
(無僧能解前三語)

부질없이 장육신의 불상만 남아 있네
(有物空餘丈六身)

거리의 반이 절집이라는 소리 비로소 믿어
(始信閭閻半佛宇)

법흥왕이 어느 시대의 요진과 같았는가
(法興何代似姚秦)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문을 모은 ‘사가시집보유’(四佳詩集補遺)에 실린 ‘무너진 분황사’(芬皇廢寺)란 시다. 서거정은 세조 8년(1462)에 공무로 영천을 들렀다가 경주에 온 적이 있는데, 신라의 대표적인 유적을 노래한 그의 시 12수는 이 시기 지어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선덕여왕 염원 서린 절

서거정이 노래한 분황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대에 지어진 절이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첫 여왕으로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분황사와 영묘사, 황룡사 9층 목탑, 첨성대 등 일련의 국가사업을 마무리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국력의 열세를 당나라를 끌어들여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외세에 의존한 외교정책을 추구했다는 비판과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반면, 당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선덕여왕을 심하게 모욕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태종은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며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하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했다. 결국 꽃이 피니 과연 왕의 말대로 향기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당태종은 그림까지 보내 여자이자 짝(벌, 나비)이 없는 선덕여왕을 대놓고 조롱한 것이다.

이처럼 여자로서 선덕여왕은 신하들의 반발과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로 고전했다. 그는 재위 1~2년 연속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재위 3년(634) 음력 1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꿔 자주국가를 천명했다. 동시에 황룡사 북쪽에 조성 중이던 사찰을 완성한 뒤 분황사(芬皇寺)란 이름을 붙였다.

신라불교를 진흥시키고, 불력으로 외침을 막으려고 했던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은 분황사를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을 넣어 ‘향기가 나는 황제의 절’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는 동시에 지혜로우면서도 어진 자신의 진면목을 만천하에 드러내, 즉위 후 끊임없이 제기됐던 자격 시비 논란을 잠재우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고려 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제공: 문화재청>


원효대사 머물며 왕성한 집필활동 해

오늘날 분황사는 탑 하나, 법당 하나, 우물 하나가 거의 전부인 자그마한 절로 남았다. 하지만 신라시대 분황사는 담을 맞대고 있던 황룡사와 함께 신라불교의 중심 역할을 했던 거대한 절이었다.

불교 대중화의 선각자로 꼽히는 원효(元曉)를 비롯해 자장(慈藏) 등 당대 이름난 고승들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다. 특히 원효는 이곳에 머물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고 한다.

신라의 대표적 학자로 꼽히는 설총은 아버지인 원효가 죽은 뒤 그 유골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이곳에 모셨다고 하는데, 여기엔 원효가 분황사에 머물렀던 인연이 작용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고려시대엔 임금의 명으로 원효를 기리는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이곳에 세워지기도 했다. 그밖에도 사찰이 한창 번창할 당시 이곳엔 솔거가 그린 천수관음보살 벽화도 있었다고 전한다. 분황사가 특별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오늘날 분황사를 상징하는 건 절집 중앙에 자리 잡은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이다. 634년 분황사 창건 당시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의 정식이름은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본래는 9층 탑이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훼손돼 3층만 남았다.

모전(模塼)이란 ‘벽돌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당시엔 중국을 중심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 유행했는데, 벽돌을 찍어내는 건 엄청난 자원과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벽돌을 구울 때 땔 나무를 대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 돌을 깨서 벽돌을 모방해 탑을 쌓은 이유다. 이렇게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깨서 쌓은 탑을 모전 석탑이라 부른다.



신라인에게 희망 되어준 사찰

분황사엔 삼국유사가 기록해 놓은 짧은 전설이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 때 이야기다. 경주 한기리(漢岐里)라는 마을에 희명(希明)이란 여자가 살았다. 희명의 아들은 다섯 살 되던 해에 갑자기 시력을 잃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희명이란 이름은 ‘밝음을 바란다’는 뜻이었는데, 정반대로 자식의 눈이 멀게 된 터였다.

희명은 애끊는 모정으로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다니다 분황사를 찾는다. 분황사엔 솔거가 그렸다는 천수관음보살 벽화가 있었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손에 천 개의 눈이 달려 있다는 보살이다. 아이를 안은 희명은 분황사 왼쪽 전각의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관음보살 앞으로 나아가 아들에게 향가를 부르도록 하고 기도를 했다.


“무릎을 곧추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께 비옵나이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셨으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눈이 둘 다 없는 이 몸에게/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가 얼마나 클까요”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관음상 앞에서 ‘두 눈이 없는 내게 자비로 눈을 달라’는 기원의 노래였다. 어미와 자식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를, 관세음보살은 들어줬다. 아이는 눈을 떴고, 분황사는 신라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찰이 됐다.

그래서일까. 분황사에는 탑을 돌며 소망을 비는 이들의 발길이 여전히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절집이 지어진 지 1400여년. 그 오랜 시간 분황사 탑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망과 기도가 바쳐졌을까. 봄이 오기 전, 새해 소망을 안고 분황사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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