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의 경주인문학산책] 유금오록<遊金鰲錄>으로 찾아가는 경주여행

매화 찾아 나서는 탐매 관한 시만 14수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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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산 용장사지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 운무.

경주 남산은 어디를 가도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용장 계곡이 가장 좋다. 특히 비 온 뒤 용장골은 환상적이다. 청량한 물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흘러내리며 귀를 즐겁게 한다. 용장사지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는 저 멀리 영남알프스 운무는 선계(仙界)와 다름없다. 그리고 솔가지 스치는 바람 소리는 매월당 선생의 시를 읊어주는 듯하다. 남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금오산과 용장사는 조선팔도를 떠돌던 김시습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1463년 29살 늦가을쯤 김시습은 경주에 당도했다.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며 우리나라 소설의 효시가 된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썼다. 『금오신화』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일면을 엿보는 것 같다. 대표작 『금오신화』가 유명하다 보니 그의 다른 작품집들은 주목을 덜 받는 느낌이다. 삼천리강산을 유람하며 쓴 기행문인 4대 유록의 평가와 언급은 부족하다.


↑↑ 기림사 영당의 김시습 영정.

경주로 오기 전 김시습은 승려 차림으로 관서지방과 관동지방을 여행하고 「유관서록」과 「유관동록」을 엮었다. 그리고 호남지역을 유랑한 다음 지리산 넘어 함양과 해인사를 거쳐 이곳 용장사지에서 머물면서 「유호남록」을 마무리했다.


그가 평생 운수납자로 떠돈 이유로는 가정사와 가치관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여윈 뒤 부친의 재혼, 외가살이, 평탄하지 못한 가정생활과 계유정란, 세조의 왕위찬탈, 사육신 처형, 단종유배 등 큼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느낀 무력감과 자괴감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경주에서 머문 7년여 동안 그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텅 빈 궁궐터, 잡초 가득한 절 마당, 무너져 내린 탑과 전각, 훼손된 불상들, 그 옛날의 영화가 사라진 폐도 경주의 모습과 본인의 마음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윽한 고도의 분위기가 좋았던 걸까?


↑↑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

1583년 편찬된 문집 『매월당집』 속 「유금오록」을 통해 경주의 모습과 그의 심사도 엿볼 수 있다. 「유금오록」에는 106제, 146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경주의 풍물, 생활과 관련된 시가 100수 가량 된다.


그는 경주 곳곳의 유적지와 사찰들을 빠짐없이 돌아보며 시를 남겼다. 분황사에서는 본인처럼 아웃사이더인 원효를 추모하며 지은 시 ‘무쟁비(無諍碑)’는 존경의 마음이 묻어나 있다. 백률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간공동체인 향도가 신라에서 조선 중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에 없는 것도 상당히 많다. 반월성 터에 있었다는 연회 장소 월성당(月城堂), 오릉 북쪽에 있었다는 남정(南亭)이라는 정자, 사계화라는 꽃을 노래했던 알천 북쪽에 있었던 동천사(東川寺), 그리고 본인의 22대조이자 강릉 김씨 시조로 알천 홍수로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의 집터 등은 시에는 있지만, 현재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곳들이다.


김시습은 매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스스로 ‘매월당’이라는 별호를 짓고, 당호로 삼았다. 매화를 찾아 나서는 탐매(探梅)에 관한 시만 14수나 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직접 매화를 심으며 지은 ‘종매(種梅’)라는 시도 남겼다. 매화뿐만 아니다. 거처 주변에 장미도 심고, 소나무와 잣나무도 심었다. 죽순을 키우고 대나무 울타리도 치며 경내 한쪽에 차나무도 재배했다. 교유하던 서거정에게 작설차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가 즐긴 ‘초암차’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차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그는 경주에 머무는 동안 두 번 한양을 다녀왔다. 효령대군 추천으로, 법화경언해 사업과 원각사 낙성식 참석으로 한양에 갔는데 꿈속에서 보일 만큼 경주 금오산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꿈에 산방에 이르다’ (夢到山房) 라는 부제가 달린 시다.

어젯밤에 금오산 꿈을 꾸었는데
산새들이 울며 돌아오라 재촉하더라.
산방에는 책들이 가지런하였지
너무도 기뻐하다가 그 끝에 슬프더라.

또한 ‘옛산이 그립다(憶故山)’를 시를 보면, 한양에서 나고 자란 그가 금오산을 고향의 옛 동산으로 여길 정도로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에 발 멈춘 지 서너 해건만
여전히 꿈속에선 옛 산으로 돌아가네.
금오산 천 겹 봉우리에 구름 걷히고
파도 그친 바다에 한 조각 배 떠 있으리.
매화 꽃봉오리 눈앞에 삼삼하고
창맡 파초의 빗방울 소리 들리는 듯.
봄 들어 죽순과 고비 우쑥 자란 때
용당 영령(금오산 산신령)은 나 돌아오길 기다리리.

잘 차려진 서울 음식보다는 고사리와 죽순, 송이버섯 같은 금오산에서 나는 산나물들을 그리워했다. 다음 시를 읽으면 책 속에서 송이 향이 새어 나오는 듯도 하다. 남산 송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온 뒤 송이꽃이 덥수룩 젖었더니
갓이 막 올라오매 향기가 진동하네
-중략-
썰거나 국 끓여도 물리지 아니하니
가을에 쌓아두어 겨울을 대비하리
-시‘송이버섯을 따다’ 중 일부

경주 남산 달 밝은 밤에 「초사(楚辭)」와 「이소경(離騷經)」을 읽으며 불우한 처지의 굴원(屈原)과 자신의 심정을 비추어 보았으리라. 자기모순과 자기분열의 사회 부적응자, 이방인, 광인, 영원한 자유인 김시습에게 경주와 금오산은 젊은 날의 방랑과 방황으로 점철된 피 뜨겁던 한 시절이 정리 정돈된 시간이었다. 한 겹 성숙한 영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금오신화』와 같은 작품이 태어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경주와 금오산은 글에 나오는 그대로 정신적 고향이었다.

21세기의 우리가 「유금오록」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15세기 당시 경주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일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한 시대를 살다간 천재의 눈에 비친 경주를 통해 우리는 눈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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