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 서역인 닮은 무인상의 미스터리

동해 용의 아들로 묘사된 처용도 서역계통 인물일까?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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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에 말을 세워두고 오솔길로 들어가니
立馬東倉細路斜

산자락 검푸른 솔밭에 갈가마귀 지저귄다
隔原松檜咽寒鴉

우거진 풀숲에 기린이 누워 있고
姜姜宿草麒麟

은은한 나무 사이에 호랑이 앉았다
隱隱殘林象虎

석양에 나그네 지팡이가 얼마를 머물렀으며
落日幾留行客杖

추풍에 목동의 풀피리는 부질없이 들리는구나
秋風空集牧童

왕기는 처량하게 구름마냥 흩어졌지만
凄凉王氣浮雲散

천고에 한 봉분이 높다랗게 솟아 있다
千古嵯峨一杯


경주 출신 학자 성재 손윤구(孫綸九, 1766~1837)가 노래한 ‘괘릉’(掛陵)이란 시다. 괘릉은 서역인(西域人) 모습의 무인상으로 유명한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이다.

↑↑ .하늘에서 본 괘릉. <제공: 문화재청>

절터 옮기고 조성한 왕릉

이 무덤 자리는 본래 곡사(鵠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다. 이 절은 원성왕의 어머니 소문왕후의 외삼촌인 파진찬 김원량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건물로 지었다. 그 뒤 불상을 봉안하고 경전을 담은 윤장대를 세워 절로 바꿨는데, 절 주변에 있는 바위가 고니 모양처럼 생겨서 곡사라고 불렀다.

세월이 흘러 798년(원성왕 14) 왕은 자신의 장례 절차와 관련한 조서를 통해 번거롭게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들지 말고 지세를 따라 무덤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원성왕이 세상을 떠난 뒤, 담당 관서는 곡사를 지금의 숭복사 자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러나 봉분이 놓일 자리가 절의 연못 터였던 탓에 땅을 메우는 과정에서 계속 물이 솟아나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사람들은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어 허공에 안치했다. ‘능을 걸다’라는 의미의 괘릉(掛陵)이란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원래 괘릉은 오랜 기간 동안 문무왕의 가묘로 알려져 있었지만, 20세기 초 숭복사 터에서 ‘절을 옮겨 원성왕릉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담긴 비편이 발견돼 사실상 이 능의 주인이 원성왕이란 게 밝혀졌다. 사실 원성왕은 원래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삼국사기’는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전말을 이렇게 전한다.

혜공왕(765~780) 말년에 반란이 일어나 왕과 왕비가 죽었다. 상대등 김양상이 앞장서서 반란을 제압했다. 김양상의 동생인 이찬 김경신도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김양상이 선덕왕이 되면서(780년) 경신에게 상대등 자리가 주어졌다.

5년 뒤 선덕왕이 아들 없이 죽었다. 신하들은 선덕왕의 조카 김주원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런데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던 주원은 마침 내린 큰 비로 알천(지금의 북천)이 넘치는 바람에 궁궐에 오지 못했다. 

이에 누군가가 “임금 지위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폭우가 내리는 것은 하늘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했다. 결국 경신이 왕위를 잇게 됐고,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다.

↑↑ 무인상 쪽에서 바라본 괘릉 전경.

무덤 앞 무인상…서역인 왕래 근거되기도


괘릉은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할만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주변을 감싸고 그 사이로 펼쳐진 너른 잔디밭 끝에 봉분이 솟아 있다. 봉분의 밑 둘레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그 주위에 다시 수십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둘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봉분은 완벽한 원형을 보여준다. 입구 안내판에도 이 무덤이 “둘레돌, 십이지신상, 난간, 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 입구에 있는 서역인(西域人) 모습의 무인상이다.

곱슬머리에 깊게 패인 눈, 커다란 코와 덥수룩한 턱수염…. 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무인상은 얼핏 봐도 한민족의 얼굴이 아니다.

사실 신라의 조각 작품 가운데 국제적 성격을 띤 것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중국의 강한 영향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이곳 무인상을 비롯해 사천왕사 터에서 나온 신장상 등은 중국 미술에선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작품들이다.

이를 두고 학계 일각에선 얼굴 생김새는 물론이고 머리에 두른 띠, 허리에 매단 주머니와 복장 등을 근거로 이곳 무인상이 중앙아시아 이슬람 계통의 서역인을 모델로 했다고 본다. 이는 ‘경주 계림로 보검’(보물 제635호)과 더불어 신라~아라비아 간 장거리 교역은 물론, 울산을 통해 외국인이 드나들고 인근에 집단 취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겨졌다. 9세기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 “황금이 풍부하고 여러 가지 이점을 갖고 있어서 무슬림들이 영구 정착하기도 한다”는 등의 신라 관련 정보가 등장하는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런 이유로 ‘삼국유사’에 동해 용의 아들로 묘사된 처용도 서역 계통 인물 중 한 명일 것이란 주장도 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처용이 서역인일 수 있다는 해석을 무조건 무시할 수만 없는 점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며 “이 방면을 순행한 헌강왕이 국가에 필요한 인재 등용을 위해 외국인을 왕경으로 데려갔을 추정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 괘릉 입구 무인상을 둘러보고 있는 관광객들.


왕릉 조성 때 통째로 옮겨진 사찰 터…숭복사지

괘릉에서 2㎞ 정도 떨어진 외동읍 말방리엔 숭복사지가 있다. 798년 괘릉을 조성하면서 통째로 옮겨진 사찰인 곡사가 있던 자리다. 곡사란 이름이 숭복사로 바뀐 것은 헌강왕 때인 885년의 일이다.

곡사가 이곳으로 옮겨지고 60여년이 지난 경문왕 즉위 2년인 862년. 경문왕은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곡사를 주목하고 중창불사를 계획한다. 하지만 곡사의 중창은 쉽게 시작되지 못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865년 어느 날 경문왕은 꿈에서 원성왕을 만나 중창 불사에 대한 허락을 받게 되고, 허비한 3년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중창 불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경문왕의 곡사 중창은 그동안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고 갈등했던 여러 정치 세력들을 ‘원성왕의 후손’이라는 점을 들어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아들인 헌강왕 때에도 곡사에선 또 다른 불사가 추진됐다. 헌강왕은 재위 11년(885)에 곡사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면서 국가가 관할하는 정법사에 예속시키고, 보살과 관리를 파견해 재정을 돌봤다. 곡사를 중창했던 선왕의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면서, 대숭복사와 왕실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려고 하려는 의도였다.

헌강왕은 이듬해인 886년 봄 최치원에게 숭복사비의 비문을 짓기를 명한다. 비는 진성여왕 때에서야 완성되는데, 그것이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인 ‘대숭복사비명’이다. 대숭복사비명엔 경문왕의 곡사 중창과 헌강왕의 대숭복사 개창 내용을 담았다. 이는 원성왕 후손의 일체감 강조를 넘어, 꾸준히 선조의 덕업을 계승하는 경문왕계 왕실의 정통성과 위상을 더욱 부각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숭복사지는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절터가 있는 마을 이름인 ‘말방리사지’(末方里寺址)로 불렸다. 당시 주변엔 석탑 부재가 쌓여 있었고 귀부와 비편, 건물의 초석 등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이후 비편을 수습해 해독하는 과정에서 이곳이 숭복사 터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절은 3단의 석축을 쌓아 맨 위에 법당과 탑을 배치하고 북쪽에 강당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 한편엔 2014년 진품 비편을 본떠 만든 숭복사비가 서있다. 비편과 비를 짊어지고 있던 쌍귀부(雙龜趺)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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