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보는 옛 경주 ‘추억과 향수 소환’[1]

1910년대 첨성대부터 읍내 장터까지
과거 본지 지면에 실린 옛 경주 모습 공개

이상욱 기자 / 2023년 0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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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경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은 오늘과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다. 1900년대 초 경주지역 곳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본지를 통해 소개됐다. 1992년과 1994년에 걸쳐 본지에 화보로 실렸던 사진은 독자들이 제공했고, 사진에 대한 해석도 달았다. 이들 사진은 창간 34주년을 맞은 경주신문과 독자, 그리고 시민들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에 당시 보도됐던 신문 속 과거 사진과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지면을 통해 몇차례 소개하며 향수를 소환해본다. 1992년 말부터 1994년까지 본지는 ‘사진으로 보는 그 때’라는 제목으로 독자들이 제공한 1900년대 초 경주 곳곳의 사진을 연재했다. 당시 명문당서점 李淸市 씨를 시작으로 이재건 씨, 김기문 시인, 서울의 최진환 씨 등이 사진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달았다.

↑↑ 146호 5면에 실린 첨성대 전경 <제공: 경주 명문당서점 李淸市>
↑↑ 현재 첨성대 전경


1910년대 첨성대 전경

계림 쪽에서 본 1910년대의 첨성대. 왼쪽편의 나즈막한 초가집이 보이고, 늘어진 수양버드나무가 인상적이다. 흰 페인트로 칠한 안내판이 한적한 길목을 지키고 서있다.

↑↑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석굴암 입구사진.


1920년대 석굴암

1920년대의 석굴암 전경. 초겨울 날씨에 잎진 나무가 을시년스럽고 소로옆에 세워진 어느 나무꾼의 지게가 당시의 곤궁한 농촌을 떠올리게 한다. 입을 벌린 감실 입구는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말이 없는데 보수작업을 위해서인지 절개된 채 드러난 앙상한 입구 위쪽이 역사의 생채기인양 아프게 느껴온다.
↑↑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안압지 전경.
↑↑ 현재 동궁과 월지 전경


1920년대 경주 안압지

태고의 신비가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정적인 호면(湖面). 목선 한 척을 수초 사이에 띄워둔 채 어부는 물속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고······. 1920년대의 경주 안압지 전경이다. 발굴과 복원을 꿈도 못꾸던 그 때. 마음은 시간을 거슬러 옛날로 걸어본다.

↑↑ 150호 5면에 소개된 경주군 감포 바닷가 일대의 일상 <제공: 경주시 황오동 이재건>


경주군 감포 바닷가 풍경

구한말 동해안 풍경의 노상소견(路上所見). 사진으로 보아 경주군 감포 바닷가 일대의 어떤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정치하에 생겨난 신작로에는 포푸라 가로수가 식민연륜의 민족 아픔을 되삭이며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듯 커가고 5월인가 싶게 미끄러질듯 가파른 농경지엔 지금 한창 보리가 피어 푸르르다. 너스레한 바지저고리 차림의 촌로들이 길에서 반갑게 만나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데 그 뒤켠으로 물지게를 지고 총총히 멀어져 갈 뿐인 농부의 뒤를 쫓아 마음은 옛날에 대한 향수에 부푼다.

↑↑ 151호 5면에 실린 경주 읍내장 솥전거리 전경 <제공: 경주시 성건동 김기문>


1910년대의 경주 읍내장 솥전거리 풍경

매 2일, 7일 5일 간격으로 열리던 이 장은 지금의 동부동 경찰서 옆에 섰는데 남문 밖에서 4일, 9일 열리던 사정장과 함께 당시 경주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던 동맥으로 이름이 높았다. 갓을 쓰로 흰 두루마기에 장죽을 든 노인네들이 보이고 좌우로 빼곡이 내민 골기와집에 질세라 새끼로 단단히 엮어맨 나지막한 초가집이 인상적이다.

↑↑ 152호 5면에 실린 장날 나뭇전 풍경 <제공: 김기문 시인·글밭출판사 대표>


1910년대 장날 나뭇전 풍경

1910년대의 경주 장날 나뭇전 풍경. 뒤쪽에 ‘월성아문(月城衙門)’이라 쓰인 현판이 보인다. 나무에 잎이 무성한 것으로 미루어 때는 여름이 가까운 그런 절기이리라. 즐비하게 쌓아놓은 장작이며 소깝단 사이를 갓 쓰고 두루마기 걸친 채 떼지어 오가는 촌로들 모습이 무척이나 한가하다. 당시 경주에는 봉황대 옆에 샅자리전이 있었고, 경찰서 옆에 솥전이 있었다. 지금의 법원 앞 물회식장 자리에 ‘아문(衙門)’이 있었다는데, 사진으로 보아 나뭇전은 구 ‘옹기전’ 자리가 그곳이라 추측된다.

↑↑ 153호 5면에 실린 무열왕릉 귀부상 <제공: 자료제공 김기문 시인·글밭출판사 대표>
↑↑ 현재 귀부상. <제공: 문화재청>


무열왕릉 귀부상

비바람 막아주는 누각도 없이 당그러니 초석 몇 개 남은 풀밭에는 천년 영화의 아쉬움을 더듬는듯 목줄기 길게 뽑아 꿈틀거리는 돌거북···. 1910년대의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동쪽 곁에 있는 귀부상이다. 청솔 푸른 나뭇가지 아래 저편 시가 쪽으론 길 한줄 집 한 채 보이지 않는데 까마득한 역사의 신비를 쫓아 적막함이 아지랑이처럼 감돌아든다.

↑↑ 154호 5면에 실린 1920년대의 경주시가지 전경<제공: 김기문 시인·글밭출판사 대표>


1920년대의 경주시가지 전경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을 간데 없고···. 그러나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한 오늘날의 경주 모습과는 판이한 1920년대의 경주시가지 전경.
 
수도산(선도산) 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 사진은 각각 방향을 바꾸어 찍은 4장의 사진을 연결한 것으로써 당시의 사진술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오른쪽 끝의 숲이 삼릉이오, 왼쪽 끝부분은 지금의 준공업단지 용강동이다.

서천 다리 옆에 구역사(舊驛舍)가 있고, 바로 그 앞이 도시개발로 철거가 돼버린 농창(農倉) 자리이다. 사정동 쪽에 공고 건물이 보이지 않고, 구황동에 경주중·고 건물이 보이지 않는 당시의 경주는 한껏 고즈넉할 뿐이다. 읍내와 충효동을 잇는 서천에는 지영다리가 있고, 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이 마냥 한가롭다. 지금의 경주JC 건물 뒤쪽에 있는 느티나무가 애동목인 그 때. 줄지어 늘어선 강가의 오리(五里)숲이 성벽처럼 감싸고 있다. 경동노회 건물이 들어서 있는 자리엔 일제 때 지은 피(避) 병원이 보이며, 정수장 앞으로 경포선의 목탄 철길이 장난감처럼 뻗혔는데 그 앞의 하얀 모래밭이 되어진 하상(河床)으론 천년영화 덧없이 실어가 버린 듯 형산강 물줄기가 말없이 세월 따라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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