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릉과 능비-통일신라 석비 대표하는 중요 문화유산

석비의 형식이나 비액 새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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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5호인 ‘태종무열왕릉비’는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난 태종무열왕의 능비다. 통일신라 석비를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석비의 형식이나 비액(碑額)의 새김이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으로, 이후 이를 본보기로 우리나라 석비의 형식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은 고려 초까지 우리나라 석비의 전형으로 여겨져 주요한 전통이 됐다. 더불어 이 석비는 왕릉의 주인공이 무열왕이란 사실을 밝혀준 구체적인 증거가 됐다.

↑↑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 <제공: 문화재청>

◆귀부·이수 갖춘 첫 신라시대 석비
삼국 항쟁이 본격화되던 7세기 한반도는 동북아 국제전의 현장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여기에 왜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포위한 가운데 신라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군사 동맹에 사활을 걸게 된다. 이러한 한반도의 정세 변화 속에 당나라와의 외교 협상을 주도했던 이가 김춘추(무열왕)였다.
648년 선덕왕의 명으로 당으로 향한 김춘추(무열왕)는 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상당히 많은 제안을 선제적으로 하게 된다. 당의 연호를 쓰고, 당의 복식을 수용하는 등 거의 모든 외교 영역에서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며 군사적 동맹을 맺게 된다.

이처럼 무열왕이 활동한 시기는 삼국의 항쟁 가운데 가장 치열했고 전략적이었으며, 외교적으로 복잡한 함수를 지닌 때였다. 따라서 그는 이전과 다른 형태의 새로운 전장인 ‘외교’라는 무대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무열왕을 ‘태종무열왕’으로 칭하는데, 그가 죽은 뒤 얻게 된 ‘태종’(太宗)이라는 칭호는 창업에 버금가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의미와 함께, 기존의 불교식 왕호를 버리고 중국식 묘호를 받아들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 신라에서는 묘제 양식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가 나타난다. 능묘를 조성할 때 피장자의 업적을 담은 비석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시작이 무열왕릉 능비다. 이후 문무왕릉을 비롯해 성덕왕릉 등에 비석이 세워진 점으로 미뤄, 이 시기 능비를 세우는 것이 보편화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비석은 왕릉에만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김유신의 묘에도 비석이 세워졌고, 김인문의 묘에도 비석이 있다.

삼국통일 직후인 이 시기 석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기 시작한다. 귀부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 모양 받침돌이고, 이수는 용이 조각된 비석 덮개돌이다. 이후 ‘귀부-비신(碑身)-이수’를 갖춘 석비가 전형적 양식으로 정착된다. 이 같은 방식도 중국 당나라의 영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이 또한 무열왕릉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시간의 흐름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변용되고 신라화된다.

무열왕릉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춘 최초의 신라시대 능비다. 비신은 파손돼 사라지고 없지만 귀부와 이수는 초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귀부는 머리를 앞으로 길게 뻗고 있으며 목의 위아래에 화려한 보상화문을 장식해 신성함을 표현했다. 귀부엔 돌출된 발은 길게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등에 새겨진 귀갑문은 여러 겹의 육각형 문양이 겹쳐지도록 했다. 비좌 주변에는 연화문을 새겨 비신에 대한 공양의 의미를 더했다.

이수는 좌우에 3마리씩 나란히 배치했는데,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다리를 모아 보주를 받치도록 했다. 이러한 이수조각 기법은 중국이나 초기 신라 석비의 전형적 특징이라고 한다.

귀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머리를 앞으로 길게 내밀고 있는 점과 여러 겹으로 표현된 귀갑문이다. 그리고 이수에서 나란히 아래를 향하고 있는 용의 표현도 특이하다. 이런 표현 기법은 초기에 조성된 귀부와 이수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 석비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629~694)이 직접 짓고 쓴 글씨로 비문을 새겼다. 이수 앞면에 새겨진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적힌 명문은 비의 주인공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석비는 661년 6월 무열왕이 사망한 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귀부와 이수가 마련된 석비의 시작 시기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고 학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비석 몸통이 사라져 비문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비석은 퇴계 이황(1501~1570) 당시만 해도 비록 훼손되긴 했으나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퇴계가 경주 유생들이 그 비석을 깨뜨려 벼루를 만들어 쓴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로 이를 꾸짖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사진 자료에는 이미 몸통이 없어진 상태였다는 점으로 미뤄 조선 중기나 후기쯤 깨져 파편화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 태종무열왕릉 전경. <제공: 문화재청>

◆비석 명문 통해 피장자 규명된 무열왕릉
무열왕릉은 당대 만들어진 비석을 통해 피장자가 확실하게 인정이 되는 신라왕의 무덤이다. 이처럼 확실한 왕릉으로 인정되다 보니, 무열왕릉은 신라왕릉의 위치 비정에 있어 기준점이 되고 있다.

무열왕릉의 장지 기록과 관련해 ‘삼국사기’는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이라고 기록했고 ‘삼국유사’는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추사 김정희는 영경사 북쪽과 서악리를 동일하게 보고,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진흥왕릉으로 추정했으며, 고(故) 이근직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나 김용성 박사 등 연구자들도 애공사와 영경사를 동일한 사찰, 혹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명칭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무열왕릉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능의 주위로 괴석이 튀어나와 있는데, 이는 봉토의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호석 일부가 돌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무열왕릉을 중심으로 뒤로는 서악동 고분군으로 불리는 4기의 무덤이 일렬로 조성돼 있고, 그 반대쪽으로는 김양의 묘와 김인문의 묘가 있다. 무열왕릉의 배장묘(陪葬墓)로 추정되는 김양과 김인문의 묘는 현재 도로로 인해 단절된 모습이지만, 본래 하나의 능역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반대쪽 4기의 무덤 주인공은 무열왕의 선대 조상인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문흥대왕(무열왕이 즉위하던 해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추봉)일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개별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으나 이들 4명이 이곳 무덤의 주인공이란 것에 대해선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이런 무덤의 모습은 삼한 통일의 대업을 문무왕과 관련이 있다. 이런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해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죽은자(무열왕)의 시각에서 보지 말고, 무덤을 조성한 사람(문무왕)의 시각에서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사실 서악동 고분군에 무열왕릉을 더한 5기의 무덤은 중국의 묘제와 관련이 있다. 중국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천자 7묘, 제후 5묘에 대한 규정을 따른 것으로, 유교이념에 의거한 정치·문화개혁을 위해 무열왕이 처음 기획했다. 무열왕은 당과의 관계를 위해 스스로 제후국을 자처하며 5묘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문무왕이 지금의 자리에 아버지 무열왕의 무덤을 쓰면서 완성됐다.

이 시기 5묘제 도입은 통일 이후 ‘새로운 왕실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주보돈 교수는 “진골 출신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시대가 출범한다는 것을 알리려는 문무왕의 선언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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