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복사지-웅장하고 화려했던 신라 왕실사찰 흔적 곳곳에

목탑 터 바로 옆 귀부자리 종묘 관련 가능성도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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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황복사지 전경. <제공: 문화재청>

통일신라 신문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탑을 세웠다.
692년에 조성한 것으로 전하는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7호로 지정된, 낭산(狼山)의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다.
 
1942년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함께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 경주 구황동 금동여래입상(국보 제80호)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발굴 유물 중 하나인 금동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돼있었는데,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선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했다는 내용이 확인됐다.

◆베일 벗는 황복사
황복사(皇福寺)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625~702)가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로, 건립 연도와 창건자 등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황복사 탑으로 전해지는 삼층석탑이 있다는 이유로 황복사지 삼층석탑 앞 건물 터는 오래 전부터 황복사지로 불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傳) 황복사지’인 셈이다.

그리고 황복사는 삼층석탑 해체 때 나온 금동 사리함 뚜껑에서 ‘죽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가람’을 뜻하는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란 명문이 드러나 신라왕실의 종묘 구실을 한 왕실사원으로 추정돼 왔다.

사실 이 사찰 터는 일찍이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일본 학자 노세 우시조(1889~1954)가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주로 발견되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을 발굴해 많은 관심을 받아온 지역이었다. 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젊은 학자 노세의 조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조선총독부는 출토유물의 노출공개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 부조상은 발굴 이후 다시 묻히게 된다.

노세의 첫 발굴 이후 국내 학계에서는 여러 연구 결과 등을 토대로 이 십이지신상이 원래는 왕릉에 썼던 부재였으나, 어떤 이유로 왕릉이 폐기된 이후 황복사 건물의 기단터를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해왔다. 십이지신상 면이 완만하게 휘어져 있고 더구나 다른 곳에서는 건물 기단에 십이지신상을 설치한 예가 없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게다가 절터 인근 들판은 폐왕릉지로 추정돼 왔다. 무덤 조성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여럿 방치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덤의 주인은 신문왕으로 봤다. 인근에 신문왕을 위한 석탑(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리하자면, 이 지역이 홍수 등의 이유로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무덤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왕릉을 폐기한 뒤 석재를 가져와 건물에 사용했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었다.

그러던 중 폐기된 왕릉지에 대한 발굴이 이뤄졌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2016년부터 황복사지와 그 주변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였고, 2017년 2월 첫 결과를 내놨다.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 이 왕릉이 실은 어느 누구의 무덤으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가릉(假陵)이란 것이었다. 무덤의 주인은 효성왕(재위 737~742)으로 추정됐다. ‘효성왕이 죽은 뒤 매장을 하지 않고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다’는 기록을 근거로, 효성왕의 무덤으로 사용하려다가 화장과 산골이 결정되면서 왕릉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폐기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삼층석탑 앞 건물지에 묻혔던 십이지신상도 이 미완성 왕릉에 쓰였던 십이지신상을 재활용했을 것이란 견해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2017년 2차 조사에서, 땅에 뭍혀 있던 십이지신상 면석의 크기를 실측한 결과, 이들은 절터 앞 왕릉에 쓰인 석물보다 크기가 훨씬 작고 뒷부분 탱석 얼개도 달랐다. 미지의 다른 왕릉 석물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을 재활용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신라 왕실사찰의 웅장하고 화려했던 면모도 드러났다. 국내 발굴 사상 최대 규모의 대석단 기단 건물터와 대형 회랑, 연못 등 크고 작은 유적이 무더기로 드러난 것이다. 유적 안에선 금동입불상 등 불상 7점을 비롯해 1000점 이상의 유물도 쏟아졌다.

왕실사원 성격과 관련해 주목한 곳은 탑 아래의 대석단 기단 건물터였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에 덧붙여 동-서 축선을 중심으로 조성됐다. 내부에 대형 회랑을 돌린 독특한 얼개는 경주의 기존 신라 유적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가람 배치 방식이었다. 게다가 건물터 뒤에 삼층석탑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문-탑-금당의 일반적인 고대 가람 배치와 다른 문-금당-탑의 배치구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해졌다.

↑↑ 십이지신상을 사용한 건물터 기단. <제공: 문화재청>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 가람?
경주 불국사에 가면 대웅전 앞마당에 두 개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국보 21호)이다. 지금은 터만 남은 감은사지에도 동·서 삼층석탑이 마주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쌍탑의 시원은 679년 낭산 남쪽에 들어선 사천왕사로 알려져 왔다. 옛 신라에선 1탑이었다가 삼국통일 직후 사천왕사에서 최초로 쌍탑 가람 배치가 나타났고 이후 감은사·불국사를 비롯해 통일신라 사찰의 기본 틀이 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2019년 이곳에서 쌍탑의 기원이 삼국 통일 이전인 옛 신라 때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쌍탑 목탑터가 발견돼 화제가 됐다.

앞서 언급했듯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가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이다. 그런데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신문왕이 죽자 아들인 효소왕이 692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다. 의상이 출가할 때와 석탑을 조성한 때가 30년 이상 차이가 난다.

게다가 황복사에서 탑돌이 의식을 주관했던 스님이 공중에 떠서 탑을 돌았고, 그 위신력으로 함께 따르던 무리들도 공중에 떠서 탑돌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공중에 떠서 탑을 돌았다’는 데 주목했다. 석탑에는 기본적으로 계단이 없다. 황복사지 삼층석탑도 마찬가지다. 반면 계단이 놓이는 목탑이었다면 이 같이 묘사했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이 절터가 황복사가 있었던 자리가 맞다면, 현재 남아있는 삼층석탑을 세우기 전 목탑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최근 두 개의 목탑지로 추정되는 유구(遺構)가 발견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목탑 터가 맞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 가람이고, 쌍탑의 시작이 늦어도 7세기 중반 옛 신라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다수 학자들은 황복사가 ‘신라 최초의 쌍탑 가람’이라는 의견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분위기다. 목탑 터로 보기엔 규모가 작고, 중문 터와 탑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게 주요 이유다. 발굴조사를 주도한 성림문화재연구원 박광열 원장도 “목탑 터 바로 옆에 귀부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종묘와 관련된 곳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고 했다.

어찌됐건 황복사지 일원에 대한 3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이전엔 남북 선상으로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동·서 목탑지, 중문지 등의 유구가, 통일신라 때는 동서 선상으로 십이지신상 기단의 건물지와 황복사지 삼층석탑, 동·서 귀부 등이, 고려시대엔 초석건물지와 관련시설 등이 각각 확인됐다. 결국 삼국유사 기록처럼 통일신라 이전 옛 신라 때도 사찰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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