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지(下)-국내 고대 조각품 중 첫손 꼽히는 ‘녹유신장상’ 출토

악귀 짓밟고 불국토 지키는 생동감 넘치는 자태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1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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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왕사 녹유신장상. 국립경주박물관 내 불교사원실에 전시돼 있다. <사진제공=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의 정확한 폐사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매월당 김시습의 시집 등을 근거로 조선 건국 직후인 1400년대 초반까지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경역 안쪽까지 민가가 들어서고 곳곳에 잡풀이 무성했던 사천왕사 터가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1910년대 경주-울산 간 철도 개설에 따른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시작이었다.

이 조사를 통해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꼽히는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과 다량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며 사천왕사 터가 확인됐으나, 동해남부선 철도가 절터를 가로질러 놓이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1922년엔 조선총독부가 ‘고적발굴조사사업’의 일환으로 경주의 여러 사찰과 함께 다시 조사를 벌였고, 1928년과 1929년엔 동경제국대 교수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의해 절터 규모와 범위, 가람의 배치, 주요 유물의 정밀 실측 및 측량 조사가 이뤄졌다. 반면, 광복 이후 60여년 동안은 사지 주변에 대한 간단한 조사 외에 제대로 된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사천왕사가 전모를 드러낸 것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진행한 정밀발굴을 통해서다. 모두 7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해 금당지와 목탑지, 강당지, 부속건물지, 단랑의 회랑지와 익랑지, 중문지 등의 유구가 확인됐다. 출토 유물로는 각종 기와 조각과 금동불상, 비편, 이수편 등이 있다. 특히,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당의 위치 및 크기의 변천, 익랑의 존재, 목탑 기단부 면석에 배치된 녹유신장상의 위치를 확인한 것은 주요 성과였다. 또, 중문 남쪽 귀부 중앙으로 석교가 발견돼 고대건축연구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 경주 망덕사지 터에 있는 보물 제69호 ‘망덕사지 당간지주’. <사진제공=경주시>

-신라 대표예술가 양지와 녹유신장상
녹유신장상은 국내 고대 조각품 가운데 첫손에 꼽는 걸작 중 하나다.
녹색 유약을 입힌 벽돌판(녹유전) 위에 만든 이 조각상은 꿈틀거리듯 생생한 조형감이 일품이다.
갑옷 차림에 화살, 칼 등을 든 수호신들이 악귀를 짓밟고 불국토를 지키는 자태가 생동감 넘치게 다가온다. 신라 지배층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불안해하는 민심을 하나로 모아 외적을 누르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사천왕사 터에서 녹유신장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15년이었다. 1915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서탑터에서 녹유전 조각을 발견했으나, 당시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어 다시 땅에 묻었다.

이후 1918년과 1922년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발견된 유물조각으로 연구가 이어졌다. 부서진 파편에 불과했지만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 뛰어난 조형성,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며 당시부터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뛰어난 조각품은 ‘양지’(良志)라는 이름의 스님이 만들었다. 그는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가 백결과 함께 신라를 대표할 예술가로 꼽힐 만한 뛰어난 조각가였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때 활동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녹유신장상의 제작자라는 점에서 사천왕사가 창건된 문무왕 때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지 스님은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뿐만 아니라 영묘사 장육존상과 천왕상, 법림사 주불과 좌우금강신, 석장사 탑삼천불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글씨도 잘 써 영묘사와 법림사 등 큰 절의 현판을 직접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작품 활동 외에 전하는 바가 적어 양지 스님의 출신과 이력 등을 두고 각종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그의 전기가 전한다는 점에서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조각상 형식, 제작 방식 등이 고대 인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 근거해 서역에서 온 외국인일 것이란 추정도 제기된다. 또 신라에 와당 제작술 등을 전한 백제 승려일 것이란 견해도 있다.

녹유신장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복원작업은 첫 발견 이후 90년이 지난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연구소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200여점의 파편을 수습했다. 그 결과 수십 년 풀리지 않았던 이 조각상의 실체가 드러났다.

국내 미술사학계에선 사천왕사지에서 나온 녹유신장상이 절 들머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천왕(四天王, 수미산 중턱 사왕천에서 불법을 지키는 네 명의 수호신)의 일종이란 설과, 사천왕의 부하신 팔부중(八部衆,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 상이라는 설이 팽팽히 맞서왔다.

그런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동·서 목탑의 기단구조와 녹유신장상의 봉안모습이 확인되며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나게 됐고, 지금껏 녹유신장상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녹유신장상은 사천왕상 같은 네 가지 상도, 팔부중의 여덟 신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사천왕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세 가지 상으로만 복원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머리에 우아한 보관을 쓴 A상, 화려한 투구를 쓴 채 화살을 든 정면의 B상, 옆이 말린 투구를 쓴 채 칼 들고 반가부좌 자세로 앉은 C상 등 세 종류가 전부였다.

녹유신장상으로 사천왕사지 금당 앞 왼쪽과 오른쪽에 세워진 목탑 2기의 기단 벽면을 장식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동탑 발굴에서는 이들 녹유신장상 4기가 탑 기단부에 온전히 박힌 모습으로 출토됐고, 상세히 몰랐던 C상의 전모도 알 수 있게 됐다. 발굴 조각들을 모아보니 A상과 B상은 각 6구씩, C상은 9구나 복원이 가능했다.

기단 벽면 장식 방식은 녹유신장상 세 종류를 한 묶음으로 한 면마다 2번씩 되풀이해 붙인 형태였다. 다시 말해 탑 기단부 한 면에 6개의 녹유신장상이 A-B-C, A-B-C 식으로 배치된 모양이었던 것이다. 추론해보면, 탑 기단부 4면에 붙은 신장상은 24개로, 동탑과 서탑 2기를 장식하기 위해 모두 48점이 제작됐다는 결론이다.

녹유신장상은 각각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세 종류의 틀을 만들어 찍어내 배치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B형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A형은 오른쪽에,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C형은 왼쪽에 두어 신장들이 목탑 주변 사주를 경계하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이런 이유로 녹유신장상은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壁塼)으로 불리기도 한다. 녹유신장상은 ‘녹색 유약을 입힌 장군신상’이라는 뜻이고, 녹유신장벽전은 ‘녹색 유약을 입힌 장군신이 새겨진 벽면 장식용 흙벽돌’이란 의미다. 전자는 예술작품이란 점에, 후자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이름이다.

-외교적 술수가 낳은 망덕사
사천왕사지에서 7번 국도 건너 남산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절터 하나가 보인다. 사천왕사지와 함께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망덕사 터다. 논으로 둘러싸인 절터엔 보물 제69호인 망덕사지 당간지주와 몇몇 건물지와 초석이 남아 있다.

망덕사(望德寺)란 이름을 풀어보면 ‘(당 황제의) 덕을 우러러보는 절’이라는 의미다. 자칫 대국에 굽실거리는 힘없는 나라 백성을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망덕사 창건 경위다.

문무왕이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낭산 자락에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명랑법사를 시켜 문두루비법을 시행하게 하자 신라로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은 두 차례나 바다를 건너다 몰살한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은 옥에 갇혀있던 신라 한림랑 박문준을 불러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비법을 쓰기에, 당에서 두 번이나 대군을 보냈는데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는가?”

박문준이 답했다.
 
“저희는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 지나 본국의 사정은 잘 모르나,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에, 그 은덕을 갚기 위해 낭산 남쪽에 천왕사라는 절을 지어 황제의 장수를 비는 법석(法席)을 오래 열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예부시랑 악붕귀를 사신으로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왕은 사천왕사를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여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 절이 바로 망덕사다. 그러나 당의 사신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사천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사신은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신라 사람들은 뇌물로 금 1천 냥을 주며 그를 달랬고, 그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박문준이 말한 대로라고 전했다. 그 뒤 당나라 사신의 말에 따라 절의 이름을 망덕사로 불렀다.

망덕사는 이처럼 나당전쟁 당시 당의 사찰단을 속이기 위해 세운 절이다. ‘당나라에 대한 보여주기식 충성’을 통한 신라의 ‘실리외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천왕사와 망덕사에서 주목할 점은, 부처의 힘으로 당의 군사를 물리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본래 지은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제의 안녕과 수복을 빈다는 거짓 명목을 만들어 그 옆에 새 절을 지었다. 또 사신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사천왕사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는데, 이처럼 호국불교의 상징물을 지키려 한 신라인들의 노력과 의지가 사천왕사 터와 망덕사 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의지의 중심엔 문무왕이 있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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