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지(上) 문무왕의 얼 서린 ‘신라 호국불교’의 성지

터만 남은 사천왕사
전쟁, 승리로 이끌겠다는 염원으로 세워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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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본 경주 사천왕사지와 낭산. 사진 가운데 나무가 없는 곳이 사천왕사지, 그 뒤로 나지막하게 솟아 숲으로 이어진 곳이 낭산이다. <경주시 제공>

경주의 동쪽 지역인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는 해발 115m의 야트막한 산이 있다. 낭산(狼山)이다.
 
동네 뒷산 같지만 옛 신라인에게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실성왕은 이곳에 하늘의 신령들이 내려와 노닌다고 해서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다. 413년의 일이었다.
 
낭산 일대에 선덕왕릉,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보물 제665호),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최치원의 고택이 있던 독서당 등이 몰려 있는 이유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낭산 일대가 사적 제163호로 지정된 이유다.

↑↑ 사천왕사지 전경. <문화재청 제공>

-명랑법사와 문두루비법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작은 나라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당의 세력을 막아내며 한반도 통일의 대업을 이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국민의 단결과 협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를 지켜내려는 ‘호국 의지’에서 시작됐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신라인이 강력한 호국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계기는 ‘불교’였다. 신라인에게 불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상이었다. 오늘날 많은 불교 연구자들이 신라 불교의 핵심 중 하나로 꼽는 것도 ‘호국불교’다.

경주 낭산(狼山) 자락, 터만 남은 사천왕사는 불력을 통해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세워졌다. 사천왕사가 신라 호국불교의 대표적 사찰이자 삼국통일의 상징적 사찰로 불리는 이유다.

사천왕사는 문무왕(재위기간 661~681)의 뜻에 따라 지어진 대표적 사찰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은 이뤘지만, 문무왕에게 한반도 지배를 노리던 당나라는 큰 골칫거리였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일으킨 나·당전쟁은 문무왕 통치기인 670년 신라가 지원하는 고구려 부흥군이 합세한 연합군이 압록강 너머 당군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당나라엔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외교사절로 가있었고, 당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볼모로 억류된 상태가 됐다. 마침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의상대사는 김인문을 만나 당나라의 대규모 신라 침공 계획을 전해 듣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다.
 
의상대사로부터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문무왕은 당나라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지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했고, 각간 김천존은 “근래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왔다고 하니 그를 불러 물어 보라”며 다소 황당한 책략을 제안했다.

명랑법사가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비법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는 주술적인 밀교(密敎) 의식이었다. 문무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명랑법사를 부르게 되는데, 그는 “낭산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긴박해져만 갔다. 당나라 군대가 서해로 쳐들어온다는 전갈이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왕은 명랑을 불러 일이 급하게 됐으니 어찌 하면 좋겠냐고 물었고, 명랑은 여러 가지 색 비단으로 절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문무왕은 명랑의 말대로 낭산 자락에 비단으로 절을 짓고 오방신상을 만들어 세웠다.

드디어 당나라 장수 설방은 군사 50만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고 있었다.
 
명랑은 계획대로 문두루비법을 활용해 큰 바람과 거센 물결을 일으켜 적의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
이듬해인 671년에도 명랑의 문두루비법은 신라로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을 서해에 수장시켰고, 신라는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문무왕 19년(679)에 이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고 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사천왕사 건립 배경이다.

↑↑ 사천왕사지 입구에 있는 귀부. <문화재청 제공>

-왕경 핵심부를 지키려는 문무왕의 뜻
‘문두루비법을 쓰니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다소 과장이 있었겠지만 “사천왕사의 창건이 통일전쟁 직후, 당의 공격시점에 이뤄졌다는 것은 사천왕 신앙의 호국적 성격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2006년부터 만 7년 동안 사천왕사지에 대한 정밀학술발굴조사를 벌였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불교에 따르면 사천왕이란 수미산 중턱 사방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신라에선 호국의 신으로 각광받았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사천왕사 창건의 의미에 대해 “불력을 이용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려 한 문무왕의 승부수”라고 요약했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자리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사천왕사는 경주의 동쪽 지역인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 야트막하게 솟은 낭산 남쪽 자락에 있다.

낭산은 동네 뒷산 같지만 옛 신라인에게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13년 실성왕은 이곳에 하늘의 신령들이 내려와 노닌다고 해서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사천왕사지가 세워진 곳은 7번 국도변으로 울산 방면에서 경주로 들어서는 입구에 해당한다. 결국 사찰의 사천왕문이 승속의 경계를 지키듯, 왕경을 지킨다는 의미로 이곳에 사천왕사를 세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당시 신라인들은 낭산을 수미산이라 여겼고, 사천왕사 자리는 수미산으로 올라가는 승계의 입구에 해당한다”며 “왕경의 중심부가 불국토라는 관념 속에, 사천왕사를 세워 왕경의 핵심부를 지키려는 문무왕의 뜻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무왕을 추념하는 비석도 사천왕사에 세워졌다. 현재 사천왕사지 입구 풀숲엔 머리가 잘려나간 귀부 2개가 남아 있다. 최근까지 사천왕사지 인근에서 출토된 비편은 2종류로, 문무왕릉비와 사천왕사사적비로 밝혀졌다.
 
머리가 잘린 2개의 귀부는 이들 비석을 받쳤던 것들이다. 출토된 비편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다. 금당 앞에 목탑이 동서로 배치된 ‘쌍탑식 가람배치’가 나타나는 최초의 사찰이란 점도 사천왕사의 특징이다.

한편, 불교사학계는 명랑이 행했던 문두루비법의 실체 규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왔다. 학계에 따르면 문두루란 불교의 밀교(密敎)에 속하는 종교의식으로, 산스크리트 ‘무드라’(Mudra)를 음역(音譯, 소리 그대로 옮김)한 말이다. ‘신(神)의 약속’이란 의미다.

문두루법의 구체적 실체는 중국 동진시대 천축(天竺)에서 건너온 승려 삼장 금시리밀다라가 번역한 불경 ‘불설관정경’(관정경)에 담겨 있다. 요약하자면 재앙이 닥칠 때 오방대신의 이름을 둥근 나무에 적어 놓고 그것들로 문두루를 삼으면 모든 재앙과 악귀를 없앨 수 있다는 내용이다.

명랑법사는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비법을 행할 때 유가종의 승려 12명을 불러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사천왕사 터엔 둥근 구멍이 뚫린 12개의 초석으로 이루어진 방형 건물지가 금당이 있던 자리 옆에 남아 있다. 마침 그 뚫린 구멍의 지름이 20㎝를 웃도는 크기들이라 만약 문두루법에 필요한 원형 기둥을 여기에 꽂는다면 적당하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곳을 명랑이 주문을 외울 때 사용한 단석(壇席) 터로 추정하기도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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